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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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폐허를 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9. 02:02

 폐허를 담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를 다녀와서

 

 

   

 두 번 째 檜岩寺趾에 다녀왔다. 2 년 전 쯤이던가 여름에 한 번 들렀었고, 작년 여름에도 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길을 놓치는 바람에 이번으로 기회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회암사지로 가는 길은 의정부에서 동두천 방면으로 북상하다가 덕정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오 킬로쯤 직진하여 회암령 고개턱밑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거나 의정부에서 축석령을 넘어 송우리(소흘읍)에서 회암령을 넘거나 하면 되는데 나는 포천에서 회암령을 넘어가는 길을 좋아한다. 차로 넘거나 걸어서 넘거나 고개는 삶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게 하여주는 힘이 있다.'시지프스의 신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힘겹게 바위를 정상을 향하여 밀고 올라가서는 다시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행위를 거듭하는 삶,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인식적 성과는 바로 신을 만나는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한계령


    곧은 생각으로 걸어왔다

    가장 높은 깃발로

    매달리기 위하여


    내려다보면

    구곡양장

    사나운 채찍질뿐인

    저 길


   

 비단 한계령만 그럴 것인가, 어느 고갯길을 넘든지 넘는 행위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지우다 보면 회암사터, 17 만평이 넘었다는 절터는 쉬엄쉬엄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겨울이기에 일손을 놓고 있다. 절터 코 앞까지 밀어닥친 레미콘 공장과 망루까지 세워진 兵營 탓에 살벌하기 이를데 없지만 260칸이 넘는 집들과 15척 되는 불상이 일곱 개가 되었으며 10척이 관음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그 기억이 헛헛하게 허공에 덮혀 있고, 발 밑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깨진 기왓장들은 3천 명이 넘는 승려의 발자국마냥 을씨년스럽다. 당간지주 한 쌍과 저 멀리 산기슭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부도탑이 만들어 놓은 깊고 넓은 적막을 쓸어담는 일 만으로도 가슴은 벅차기 이를 데 없다.조사전,설법전,사리전,정청,방장,나한전,대장전…… 이 터에 가득했을 집들은 이미 기둥을 세우고 있는 그 순간부터 무너짐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던가.



    여보게 道友 2



    백년 뒤

    이 땅에 누가

    남아

    노래할까?


    솔바람

    풍경소린

    남아 있겠지,


    여보게

    이 땅에 다시

    오려나?


    그리운 사람

    있다면……


    모두가

    다

    그리운

    사람들야


  석용산은 실패한 수도승이라고 말한다.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그는 큰 법력을 얻는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비난하기 전에 한 인간이었을 그를 생각한다. 지금 세상에, 하루에도 몇 번 씩 머리 깎고, 수도원에 가야겠다는 서원을 세워야만 할 거친 세상에, 거두절미하고 머리를 밀어버린 그 결심, 그 고통을 생각을 해 본다.


    스님  3



    피가

    흐르며……


    숨도 쉬는

    박제.


    뼈가

    있는……


    따스한

    박제.

  

   

  범인에게 수도자는 무엇이며 수도자에게 범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과 저것의 경계, 그 경계를 의식하면서 무시하는 것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은 본질이 틀리다.누가 頓悟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단 말인가? 돈오는 개인적이고 무차별하며 우리는 그 껍데기, 그 허상만을 보는 것이 아닌가?

  회암사지에 불이문은 없다. 경계 없음, 여기에서 나는 마음껏 가질 수 있다.깨알같이 글자를 적을 수 있고 두들기고 내팽쳐 댈 수 있다.저 허공을, 저 적막을……

   인도의 지공선사가 주석한 이후 나옹과 무학, 그리고 끝내 제주도 귀양길에서 죽은 보우에 의해서 우람해지고 넓어졌던 도량, 다시 그 무게만큼, 그 넓이만큼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깨달음은 오로지 저 솔밭의 푸르름 만이 알고 있을 것인가


  자수성가


  

  어쨌든 집은 튼튼해야 하며

  온갖 풍상에도 견뎌야 한다고

  마치 뜻을 세우고

  미래를 자로 재듯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리라

  호언했다


  법이 바뀌고

  바퀴가 없는 역사는

  파괴와 건설의 널뛰기를

  계속해도

  어느 시대에도 변덕이 없는

  집이 있다

  개미떼들!

  그리고 노동자들!

 


  1376년 5월 17일,4년에 걸친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친 나옹은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생을 마친다.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삶. 신륵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고 이곳 회암사 (회암사지에서 800미터쯤 위로 올라간 곳)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겨울 하늘이 낮게 내려오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무엇이라 나지막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말없이 지나쳐 간다. 바람이다.나의 집이었던, 나의 사랑이었던 바람이 앞서 가고 나는 급히 속세로 돌아오고 있다.     

  

 1 회암사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자공대사가 창건하고 나옹선사가 중건했으며 그 뒤 무학대사가 주석하였으며 이성계가 퇴임한 후 머물어 제 2의 경복궁이라고 불리웠던 대찰이었다.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불교는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으나 명종 대에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아 보우는 도첩제(승려의 신분증)를 부활시키고 이로 말미암아 유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도첩제는 본디 중국에서 시행되던 제도로서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되려면 丁錢( 일종의 세금)을 내게 함으로서 효과적으로 불교의 세력을 억지하는 방법이었다.

문정왕후가 죽고 곧이어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가게 되고 그곳에서 척살 당한다. 이후에 회암사는 방화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의 회암사는 그 후 순조시대에 회암사지에서 훼손된 유물을 수습하기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비가 보존되어 있다.


2. 지공대사


  인도인이다. 인도 마가다국 만왕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나란타 사에서 계를 받고 중국으로 건너와서 포교활동을 전개하게 되며 1326년부터 1328년 까지 전국 사찰에서 법문을 연다.지공은 선불교에 정통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3.나옹대사


  20세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불문에 들어 57세에 입적할 때 까지 활발히 불법을 폈던 인물이다. 원나라에 11년 동안 유학을 가서 지공문하에 들어 법맥을 이어받고 지공에 이어 회암사를 중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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