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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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을 우러르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9. 23:11

절벽을 우러르며

 

 

집을 나설 때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송곳니 같은 인수봉 절벽이다.

다섯 살 되던 해 시내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살기 바랬던 아버지는 정능으로 집을 옮겼고, 그 후로 나는 줄곧 삼각산 연봉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삼각산 연봉의 끝에 도봉을 옆에 두고 우뚝한 인수봉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암벽 등반의 명소이거니와. 나는 가끔 인수봉을 바라보면서 그 암벽을 기어오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곤 한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암벽 등반을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그 절벽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며칠 전에도 도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비와 경험 부족으로 그만 중도 포기하고 말았었다.

바위가 주는 둔탁하고 싸늘한 촉감, 그것에 도전하면서도 결국 그 바위 덩어리에 자신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휩싸이면서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릴 때의 나는 얼마나 왜소하고 비겁한 것인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홀연히 아버지 이 세상을 버리시고 급격히 기울어버린 가세를 돌이켜 보겠다고 어머니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밥을 굶고, 등록금을 못내어 교실에서 쫓겨나는 괴로움, 설상가상으로 화재까지 겹쳐 우리 삼 형제가 이 집 저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을 때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은 열 다섯의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지리도 공부 못하고 의붓 엄마의 박대에 시달리던 친구와 나는 북한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암벽을 죽기 살기로 기어오르곤 했다.

손톱이 부서지고 팔꿈치가 벗겨지고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학교를 빼 먹으며 우리는 벅차오르는 청춘의 절망을 암벽을 껴안으며 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친구는 산에서 혼자 바위를 타다가 쓸쓸히 죽었다.

친구의 죽음 이후로  암벽타기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심한 절망감이 찾아오게 되면 그 때 마다 불쑥 암벽을 타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쳐 오르곤 한다.

 나 자신에 대한 도전과 의지의 시험, 그런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가 절벽이라는 시이다.    

  

  절벽    

  

 절벽을 뛰어내리는 일과

  절벽을 기어 오르는 일이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인지 모르지만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리면 삶은 순간에 끝나고

  기를 쓰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삶은

  오래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담쟁이나 나팔꽃같은 넝쿨들이 아름다워 보이는것은

  그들이 올라가야할 벽을 의식하는 한

  그들은 항상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은 조용히 썩어가야 하는

  밀알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푸른 하늘을 경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비가 그치면 인수봉에 오르려고 한다. 전 번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수봉 꼭대기에 올라 그 바위 틈에 사는 소나무들에 입을 맞추거나 아니면 아득히 추락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