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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시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6. 01:58

토론토 시편

                         독도를 생각하며

 

   

  <파장 罷場>


          -* 독도 시와 사진전


올 사람은 왔고

오지 않을 사람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제 거두어들일 일만 남은

한적한 전시장

높이 매달아 두어

행여 떨어질까 가슴 여미던 조바심도

부질없다

떨어져야 할 때를 누가 일러 주었을까

저 사과에게

저 별에게

저 새들에게

나는 그 누가 걸어 두었던 액자였을까

숨막히는 생의 목졸림이

떨어질까 두려워했던 시간을 비웃는다

아, 이제 어디로 가지?


* 2003년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카나다 토론토 한국총영사관에서 〈독도. 시와 사진전〉을 개최했다.


<*에드워드 파크를 지나며>


또 만나게 되네. 정적아

낯가림하며 지나갔던 것이

너였니, 아니면 나였니?

손 내밀고 싶은데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데

연습이 부족했던가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어색하구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돌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르친다


* 토론토 시내에 있는 공원


<*애비뉴 로드 555번지>


떠나 왔다

허리케인은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나

군데군데 색칠이 벗겨진 벤치

나무들은 서둘러 잎을 물들이고

제 몸을 삭제시키고 있다

낮에는 매미가 울고

밤이면 귀뚜라미가 우는

구월

허리케인은 길을, 신호등을 무시한다

바람을 가득 품은 저 차들. 저 사람들

비 맞으며 빵을 먹는다

영혼의 시린 밥을 먹는다

 

*토론토 한국 총영사관이 있는 곳



<산문>

                          토론토 詩篇



9월 14일 추석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 나는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여름 내내 국내외 시인 6명의 독도 앤솔로지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출간에 매달리다가, 8월 29일 출판기념회 겸 문학세미나를 개최하고 나니 후속 행사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독도, 시와 사진전>을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열게 되어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토론토 한국 총영사관의 배려로 장소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현지에서 제작한 액자를 전시회장으로 가져오고 그것들을 다시 전시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의 영토, 독도를 지키고 사랑하자는 캠페인이 8만 여명을 웃도는 동포들에게 얼만큼 울림을 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토론토 중앙일보와 얼 TV 등이 홍보에 협조해 주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독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국내의 정세 속에서 독도를 기억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영유권 분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일본이 집요하게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몇 해 전의 굴욕적인 한일 어업협정의 내용을 숨기고 있는 현실을 알려 준 것은 캐나다 토론토의 박정순 시인이었다. 그녀는 토론토에서 일본해라 불리우는 동해의 이름을 되찾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내쇼날 지오그래픽사에 동해 표기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그녀의 활동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무엇이 그녀를 행동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는가? 나는 오래지 않아 그 해답을 얻었다.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나는 독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몇몇의 시인들을 어렵지 만나게 되었다. 평생 천 여 개의 섬을 찾아간 이생진 시인, 독도에 호적을 옮기는 등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편부경 시인, 대한산악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독도를 탐사한 미국의 오정방 시인, 제주도 출생으로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고대진 교수는 물론이고 연대 정치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한국학술연구원을 설립하고 해외에 한국관련 논문집을 발간하고 있는 김명회 박사를 통하여 역사를 등한시하는 민족은 필시 쇠락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이고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계량화되고 물질화된 현대인, 그 중에서도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인에게 시인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은 인생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존재이다. 그 무형의 가치는 개인사에 머무는 사소한 것 일수도 있고, 인류와 자연을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일수도 있다.

시인이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일으켜 세운 화두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일이다. 치열하게!



쓸데없는 일에 목숨거는 일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으랴

(중략)

그러나 쓸데없다고 다들 외면하는 일에

목숨거는 일처럼

위대한 일은 없다

정치가나 사업가나 학자들 보다

쓸데없는 일에 청춘을 불사르고

목매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밝아졌다는 것을

두꺼운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이름 없는

그들 때문에

세상이 맑아졌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졸시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일부분


 나는 일 년 치의 일용할 양식을 사화집 출판과 문학세미나 그리고 <독도, 시와 사진전>에

기꺼이 사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인은 오늘날, 쓸데없는 일에 목매다는 존재가 아닌가? 쓸데없는 일에 목매다는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살아 숨쉬고 세상은 한층 밝아지지 않았는가?

토론토의 박 시인은 재외동포재단에서 행사에 필요한 극히 적은 행사비를 지원 받고 기꺼이 <독도, 시와 사진전>을 토론토에서 열기를 희망했다. 영광도, 명예도 그 아무 것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일에 투신하는 일처럼 밝고, 맑고, 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토론토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다. 구월 중순인데도 빗줄기는 차갑고, 나무들은 서둘러 겨울준비를 한다. 간간이 찾아오는 유학생들. 현지 교포들에게 사진과 독도에 관련된 현황을 알려주다 보면 하루 해는 금방 저물고 만다. 점심은 대충 전시실에서 커피와 피자 또는 방으로 때우고, 무료하면 영사관 근처, 조그만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인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일, 객창을 통하여 노을을 바라보거나 동 터 오는 새벽을 맞이하는 일, 그렇게 가끔씩 어깨를 부딪는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몇 편의 시를 끄적거려 보는 일로 예정된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목요일, 하태윤 총영사가 점심을 내겠다고 하여 김대억 목사, 박정순 시인과 함께 하얏트 호텔로 갔다. 외교관으로서 남북의 통일문제, 북핵문제, 한국의 경제를 바라보는 하 총영사의 시각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매력적이고 여유로워 보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김 목사와 박 시인은 기도를 하고, 나는 포크를 들어 음식을 집을 때였다. 그 때 총영사는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식사를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김 목사가 올리는 감사 기도를 마치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 나는 신자는 아니지만, 목사님이나 신부님의 기도를 들으면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총영사는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렇다. 자신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일들을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 그것을 품에 안는 일처럼 여유로운 기쁨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런 기억도 떠오른다.

몇 해 전 나에게 시를 공부해 보겠다고 찾아온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는 서울의 북쪽 민통선 가까이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집에 상사화가 꽃을 피웠는데 한번 와서 보시지요"

어느 날엔가 수업 시간에 상사화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심결에 이야기 한 것을 잊지 않고

상사초를 구해다가 집에서 키웠는데, 이제 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회지의 잘 나가는 교회를 넘겨주고 척박하고 황량한 전방에 새로이 일군 교회에 장로들이 찾아 왔다.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장로들은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히고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노년의 농군들이었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면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는데, 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참으로 어색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5분이 지나도 기도는 끝나지 않고,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 저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들이라니! 두 손을 모두우고 기도에 임하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흔한 나물과 국, 잡곡밥이 전부였건만 그들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내려주신 성찬이었고, 그 성찬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 이상의 삶의 기쁨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자니 또 한 토막의 해후가 떠오른다. 토론토에 체류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엘리자벳인가 하는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북동부를 강타하고 있는데, 보도된 바로는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태풍 매미보다 그 위력이 두 배는 되어 토론토 지역도 그 영향권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관람객도 뜸했었는데, 초로의 부부가 전시장으로 찾아 왔다. 오래 전, 그러니까 10년 전에 서울에서 만난 것이 전부였던 나영자 시인 부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나영자 시인은 나와 같은 문학지로 등단하고, 같이 동인활동을 했던 터라 반가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출가한 딸이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데 방송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가깝지도 않은 거리인데, 지하철을 타고 그것도 우중에 찾아오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들은 기꺼이 해후를 위하여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이 동인활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같이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만남의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없다.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알량한 삶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잊어버리고 언어의장벽과 알싸한 외로움에 투정을 부리고 있다가 정신이 화들짝 드는 것은 마음에 여백을 간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초만원인 서울행 비행기를 놓치면서, 나는 진정한 삶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 보다 나은 삶의 신천지를 갈구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세계 3위의 인구밀도와 온통 산지로 둘러싸인, 부존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땅, 전쟁의 위협과, 경제의 난국, 치열한 교육 현실을 벗어나 이민과 유학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쓸모없다고 버려두고 있는 북쪽의 땅을 제외하고도 캐나다의 국토는 넓다. 풍광이 아름답고

삼 천 만이 안 되는 인구, 우리보다 자원이 풍족한 캐나다에 정착하고 싶은 것이 어디 한 두 사람의 마음이겠는가?

그러나 이민자의 삶은 그리 녹녹치가 않다. 언어의 장벽이 그 첫 번째이다. 소위 서울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기업의 간부를 거친 절친한 친구가 전시장에 찾아왔다.

그는 몇 군데 직장을 그만 두고 조그만 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접시닦기도 했고, 전선을 통에 감는 일도 했었는데.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것이다. 열심히 성실히 일한 것은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더듬거리는 일상회화는 용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뿐이랴.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것  또한 생각보다 어렵다. 오늘날의 캐나다는 선대들의 피나는 노력과 땀과 투쟁으로부터 이어받은 선물이다. 미지에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후에 엄습하는 자연과의 싸움, 영토를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전쟁을 감수해야 했던 고난의 역사가 지나간 다음에 오늘의 캐나다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캐나다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민자는 영원히 떠도는 이민자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탄에 빠진 나라는 누가 구하나? 돌섬 하나를 지키겠다고 우리는 어떠한 싸움을 벌여야 하나? 우리 후손들에게 비겁하지 않고 당당히 운명을 개척한 선조들로 기억되기 위해서, 유학을 떠나고, 원정출산을 하러 떠나는 일이 시급한 일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이고,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이 필요조건이고 무엇이 충분조건인가?


나는 토론토에서 김치를 먹고 싶지 않았다. 스테이크에 질리지도 않았고, 커피에 주눅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고통,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수 없는 강요된 침묵은 견딜 수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탄한 대지를 바라보면서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의 산이었다. 한발자국만 나서면 발길을 가로막는 높고 낮은 산은 내 의식의 곳곳에 복병처럼,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원에서, 커피 숍에서, 호텔 방에서 몇 편의 시를 썼다. 내가 토론토에서 만난 것은 한 웅큼의 정적과 모국어, 내 영혼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사랑이었다.

전시회가 시작되었을 때처럼. 전시회의 액자들을 끌어내리는 일도 우리의 몫이었다. 행여 떨어질새라 꽁꽁 여며두었던 매듭을 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 일본 시네마현의 조례 통과로 또다시 나라가 시끄럽다. 왜 우리는 잠깐 열 받다가 잊어버리는 우를 반복하는가? 일이 터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데, 우리는 늘 사후약방문을 내거는데 능숙한 것은 아닌가? 모 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마음이 쓸쓸하다.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법이거늘!


    ⊙ 발표문예지 : 시와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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