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산문 읽기

무정한 세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 18:39

   무정한 세상


                                                             권채운

                                                             

  보여 주시죠.

  나는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서 심사위원들을 무구한 눈길로 바라본다. 내 눈길 저 편에는 궁금해서 몸살이 나는 청중이 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갑자기 청중 속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지른다. 나는 미동도 않는다. 이봐요 김성택 씨, 연기를 하라니까. 기다리다 못한 심사위원이 짜증난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나는 꿈쩍 않고 앉아 있다. 심사위원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는 그제야 심사위원들에게 싱긋이 웃음을 보낸다. 그리곤 조용히 일어나 허리를 최대한 꺾어 공손히 절을 하고 뒤돌아 나온다. 그들이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 친구 뭐야? 지금 저걸 개그라고 한 거야? 낫살이나 먹어가지고 내 참. 첫 오디션, 일단은 성공이다. 그것이 폭소였든 조소였든 그들의 입을 열었으니까.

 연기학원에도 가 봤다. 누굴 찾아 오셨습니까? 아 네, 연기를 배우고 싶어서…… 아저씨가요? 우리는 십대만 중점적으로 지도하거든요. 그래, 십대 좋다. 누구는 십대 아닌 적이 있었나? 그까짓 것, 내 인생이 코미딘데 굳이 돈 내고 배울 것까지 있겠어? 나는 집에 돌아오면 내 방에 죽치고 앉아 개그프로를 줄기차게 찾아서 본다. 공중파 방송의 소위 인기 있는 프로들을 모두 섭렵한다. 보고, 보고, 또 보지만 나는 전혀 우습지가 않다. 그런데도 청중들은 까르르 웃어젖힌다. 왜 우습지? 이유 없이 넘어지고, 아무 잘못 없이 얻어맞고, 병신 짓 하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나는 도무지 우습지가 않다. 방청석을 꽉 메운 젊은이들이 딴 세상 사람인 것 같다. 저들은 저들끼리 통하는 언어로 소통하며 눈짓을 나누고 함께 폭소를 터뜨린다. 나만 외계인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개그맨이 되려고 하는 거지? 개그맨들이 나를 웃겨보겠다고 저 용을 쓰는 데도 입 꼬리 한 번 올리지 않는 내가 감히 누굴 웃겨보겠다고 나서는 건지 생각할수록 우습기 짝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다시금 다짐을 한다. 나는 하고 말 것이다. 입 꾹 다문 채 도무지 웃지 않는 나와 같은 당신들을 웃기고야 말 것이다.

  

  강당은 넓다. 한없이 넓다. 텅 빈 무대는 쓸쓸하기까지 하다. 무대 위로 올라가 소리쳐 본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나는 우렁우렁 울리는 내 목소리에 놀라서 드넓은 강당을 휘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누가 있을 턱이 없는 데도 나는 지레 기가 죽는다.

  남보다 30분이나 일찍 출근해서 출근부에 사인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할 일이 없다. 나를 밀어 내겠다 이거지. 누가 밀려 날 줄 알고?

  버텨보자. 어쩌면 달리 갈 데라고는 없어서 발길이 저절로 회사를 향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한 달을 채우면 월급은 통장으로 입금되니까 아내를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었다. 툭하면 지각을 하던 버릇이 싹 고쳐졌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내 얼굴을 쓱 지나가는 것조차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연초에 감사역으로 발령 받았다. 감사면 감사지 감사역은 또 무언가. 복도에다 책상이라도 하나 놓아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오기를 부리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표를 쓰라는 게 인간 대접을 해주는 것일 게다. 무단 해고로 인한 말썽을 염려해서인지 나와 정대리가 감사역으로 발령받았다. 정대리는 버럭 화를 내며 즉시 사표를 던졌지만 나는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못했다.

  회사 안을 샅샅이 훑어보니 비어있는 데라고는 강당뿐이었다.

  나는 강당으로 출근한다.

  집에서 들고 나온 신문을 한 자도 빼지 않고 읽다보면 그럭저럭 점심시간이 된다. 회사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강당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쫓아와서 인사를 하던 직원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태연히 나의 일상을 고집한다. 진종일 노는 데도 월급을 따박따박 주는 걸 보니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잊혀졌다. 경리과 김현숙 씨만이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게 너무 고마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취업준비는 잘 되세요? 나를 밀치고 내 자리에 앉은 이과장이 내 앞에 식판을 놓으며 알은 체를 한다. 취업? 여기 이렇게 잘 다니고 있는데 취업은 무슨 취업? 먹고 놀기만 하는데도 월급 주는 데가 여기 말고 어디 또 있겠어? 김과장님 능력을 알아주는 회사가 꼭 있을 거예요. 한창 일하실 땐데 이러고 계시면 시간이 아깝잖아요. 왜, 부장이 뭐래? 꼴 보기 싫으니까 구슬러 보래? 됐다고 그래. 나는 아주 만족스럽거든. 회의 준비하느라고 콩 튀듯 팥 튀듯 하지 않아도 되고, 느긋하게 커피 마시고, 시간이 아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게 마치 내 인생을 엿가락처럼 죽 늘여서 사는 기분이야. 어때, 이과장도 한번 해 볼 테야? 감사역? 이과장은 다 먹지도 않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이과장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니다. 회사 내에서 그래도 맘이 맞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내 일을 제 일처럼 안타까워 해 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지만 내 입에서는 엉뚱한 말만 튀어 나온다. 직원식당에서 똑 같은 메뉴의 점심을 먹고 있지만 한솥밥을 먹는 의미는 달아난 지 오래다. 나는 전 직원이 보란 듯이 한 숟갈을 스무 번씩 꼭꼭 씹어서 한 시간에 걸쳐 점심식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 오래도록 먹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나를 훈련시키느라고 일삼아 그렇게 했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하다보면 얼굴은 두꺼워지고 뻔뻔스러워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이대로 뻔뻔해 지다가는 지하철에서 천 원짜리 장갑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당신, 몇 시에 퇴근해? 내가 회사 앞으로 갈까? 안 돼, 오늘 야근이야. 당신, 오늘 결혼기념일인 거 잊었지? 내가 달력에다 빨간 동그라미 쳐 놓은 거 못 봤어? 바쁘다니까 그러네. 바빠 죽겠는데 언제 그런 걸 다 챙겨. 당신이나 애들하고 외식하던지. 결혼기념일인데? 몇 시까지 야근 해? 그럼 집에서 기다릴게. 기다릴 거 없어. 어쩌면 호텔로 옮겨서 밤새울지도 몰라. 어머, 그렇게 바빠? 당신 힘들어서 어떡하지? 내가 야식 싸다 줄까? 됐다는데 그러네. 전화 끊어.

  결혼기념일은 무슨 얼어 죽을 결혼기념일? 여편네들이란 집구석에서 쓸 데 없는 데만 신경 쓴다니까. 하긴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기념일에 아내를 위해 장미를 샀다. 그나저나 어쩐다? 정시에 회사를 나섰지만 막상 갈 데라고는 없다. 집까지 걸어서 가볼까? 차로 한 시간 거리니까 걸어가다 보면 아침이 될까? 무슨 미친 짓이람.

  같이 술 한잔하자고 불러낼 친구 이름 하나가 생각나지 않는다. 술을 먹게 되면 보나마나 신세타령이 나오게 될 테지. 그 끔찍한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터벅터벅 걷다보니 서울역이다. 총알처럼 빠르다는 KTX나 타 볼까? 부산에 가서 어정거리다가 새벽에 출근해도 되겠지? 출근? 내가 말을 해놓고도 새삼스럽다. 내가 과연 출근이라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정대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전에는 무슨 건강식품을 팔러 다닌다고 하던데, 노인들한테 사기나 치고 다닐 위인이 못 되는 정대리가 아직까지 그 노릇을 하고 다닐는지도 궁금하다.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하나로 대충 요기를 하고서도 나는 서울역 대합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총알처럼 빨리 달려갈 곳이 어디인가.

  나는 서울역을 나와서 인도를 따라 터덜터덜 무작정 걸었다. 식구들하고 밥이나 먹을 걸 이 무슨 청승인지 모르겠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빗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빌딩 출입구에 서서 비를 피하고 섰으려니까 중년 여자들 한 패거리가 나를 밀치듯이 하고 들어선다. 나는 그제야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5층에 찜질방이 있는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서자 나는 중년여자들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번쯤 찜질방에서 밤을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운으로 갈아입으면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도로 옷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탈의실은 남녀 구분이 있었지만 웬만한 체육관 넓이의 방으로 들어서자 남녀 구분 없이 여기저기에 다들 질펀히 누워 있다. 집 놔두고 왜 이런 데서 시간을 보내는 걸까. 나는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내 옆의 남녀가 삶은 계란을 먹고 있다. 욕지기가 치밀어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나는 삶은 계란을 먹지 않는다. 아니 보기도 싫다. 계란을 보기만 해도 생각나는 여자가 내 마음을 흐리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내 마음 한 구석에 양심이란 것이 처박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계란, 특히 삶은 계란을 무척 좋아했다. 주말이면 삶은 계란을 싸가지고 교외선을 타거나 서울 근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 이마에다 삶은 계란을 톡톡 치며 까르르 웃던 여자. 자네, 사귀는 여자 있나? 아니오, 없습니다. 현대무용을 전공했다는 딸을 자랑하던 부장의 말 한마디에 나는 그 여자를 지웠다.

  계란도 지겹고, 너도 지겨워. 그녀는 계란을 한입 베어 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일영의 냇가 둑에 버려두고 나는 돌아섰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내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레 내가 그녀에게서 버림을 받은 느낌이었다.

  잘 살겠지. 죽는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던 그 여자의 자존심대로라면. 사랑? 삼 년이 시한이라며? 사랑이 출세시켜주나? 그동안 사랑했던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나는 장인의 뒷심을 힘입어 승승장구했다. 아내는 그녀보다 열 배는 세련되었고, 두 살 터울의 아이들도 건강하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회사 내의 실세였던 장인이 재작년에 돌연사 하지 않았다면 내가 처량하게 혼자서 찜질방에 웅크리고 있을 일은 없을 거였다.

  그 장면만 떠오르면 나는 이가 바드득 갈린다. 나는 너무 많은 강당의 빈 의자를 견디지 못해서 ‘감사역’이라는 플라스틱 명패를 새겨서 강당 맨 앞 의자에 꽂아놓고 내 자리로 삼았다. 마침 강당을 둘러보던 신임 상무가 그 명패를 툭툭 쳐가며 나를 깔아뭉갰다.

  당신, 개그해?

  뒤에 서 있던 이과장의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신임 상무는 혀를 끌끌 차고는 강당 문을 메어 닫고 나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개그 한다. 아니, 개그 할 거다.

  내가 구상하는 개그의 제목은 ‘강당으로 출근하는 남자다’.

  빈 강당의 무대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무대는 온통 내 차지다. 나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납작하게 엎드려 보기도 하고, 팔다리를 엇갈려도 보고, 호통을 쳐 보기도 한다. 코흘리개들의 개다리춤과 막대인형춤도 춰보고, 흔들흔들 웨이븐지 뭔지도 해 보고, 늴리리야 니나노도 한가락 뽑아 젖힌다. 그러고는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주머니에서 계란을 한 개 꺼내서 이빨에 톡톡 두드려서 껍질을 까서는 흰자위는 버리고 노른자위만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거지. 그러다가 문득 나는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루해서 못 견딜 때까지. 아니 내가 지겨워서 못 견딜 때까지. 보다 못한 누군가가 그만 하라는 투로 한번 박수를 짝 쳐주면 나는 그제야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 하고 퇴장하는 것이다. 박수칠 때까지. 제목을 박수 칠 때까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람들이 웃을까?

  넘어지고 뒹굴고, 말재간을 피우는 것이야 펄펄 나는 젊은 개그맨들이 다 해버렸으니까 나는 이걸 하자.

  계란, 빌어먹을 계란. 무얼 생각 좀 하려면 이놈의 계란이 내 눈 앞에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계란을 톡톡 쳐서 호로록 빨아먹어야 하는 대목에서 어쩌자고 삶은 계란의 껍데기를 까고 있는가 말이다.

  갑자기 속에서 닭똥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다. 저녁에 먹은 것이라곤 햄버거와 콜라뿐인데…… 자자. 잠이나 자두는 게 상수다.

  왁자하니 웃음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나와 동시에 찜질방에 들어왔던 중년여자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다. 한밤중에 계모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다들 하나같이 수건을 접어서 귀마개 달린 모자처럼 만들어 쓴 여자들이 한 여자를 일으켜 세우느라고 열심이다. 펑퍼짐해서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일어선다. 여자는 돌연 정색을 하더니 째지는 목소리를 터뜨린다.

  에, 여러분의 열화 같은 성화에 못 이겨 한 자락 깔아 드리겠습니다.

  자, 이게 무엇입니까. 여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고 한 바퀴 돌자 둘러앉은 여자들이 계란이요, 하고 합창을 한다.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들을 한번 쓱 훑어본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여자가 목소리까지 낮추자 좌중이 숨소리를 죽인다. 네, 계란 맞습니다. 네? 달걀이라고요? 네 네 달걀도 맞습니다. 맞고요.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요 사랑스런 계란, 얼마나 예쁩니까? 미운 며느리 뒤꿈치가 계란 같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아리송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란형 얼굴을 최고 미인으로 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계란에 얽힌 아릿한 추억 하나쯤 가지고 있겠지요? 양은 도시락의 쌀밥 아래 숨겨진 계란 후라이가 유일한 생일 선물이었던 사람도 있을 테고, 소풍가서 삶은 계란을 급히 먹다 체해서 여선생님의 등에 업혀 왔던 간질간질한 추억이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책상 위에서 계란 돌리기나 계란 세우기를 한 번쯤 안 해본 사람도 없겠지요? 조류독감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을 때는 또 어땠고요? 사람들이 털도 나지 않은 요 알까지 외면하는 바람에 계란장수 아줌마들을 독감에 걸리게 했던 사연 많은 ‘계란의 추억’ 말입니다. 요즘에는 포장마차에서 계란 한판을 몽땅 깨 넣고 만든 초대형 계란말이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안주는 떨어져 가고, 주머니는 비었는데 서비스로 나온 계란찜은 환상이지요. 아, 제가 삼천포로 잠깐 빠졌습니다.

  여자가 계란을 높이 쳐들었다.

  여러분, 이 계란이 삶은 계란일까요? 예, 맞습니다.

  여자는 돌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기 이마에 계란을 톡톡 쳐서 계란 껍데기를 단번에 깐 다음에 계란 노른자위와 껍데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흰자위를 야금야금 먹었다. 저는 삶은 계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란 노른자위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노른자위는 그이 몫이었거든요. 삶은 계란을 이렇게 이 짱구, 하면서 내 이마에 톡톡 쳐가며 껍데기를 까던 남자가 계란을 한 보퉁이나 기차에 놓고 내려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왜 이 자리에 삶은 계란을 들고 나온 것일까요? 그이를 찾아 나선 길입니다. 그이는 이제 학부형이 되었겠지만 저는 아직도 그이가 그립습니다. 계란 노른자위를 좋아하는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연락 주십시오. 아직도 삶은 계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여자는 빙그르르 돌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방송국으로 보냅시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몇날 며칠을 고심해서 대본을 쓰고 연습했던 삶은 계란을 저 펑퍼짐한 아줌마가 숨 한 번 안 쉬고 좌중을 휘어잡으며 쏟아 놓다니…… 개그맨이고 뭐고 다 틀렸다. 이런 머리로 개그를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개그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로 누웠다.

  이봐, 네가 그랬지? 조사하면 다 나와.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맹랑하게도 꿈도 개그 꿈을 꾼다. 요즘 본 개그프로 중에서 그중 내 입맛을 당기게 하는 장면이 꿈에 그대로 나타났다. 무고한 시민을 잡아다놓고 무턱대고 자백하라며 몰아치는 내용인데 꿈속에서는 내가 무고한 시민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한잠 푹 잘 잔 것 같은데도 온몸이 찌뿌드드하다. 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좀 더 구상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을 만큼 꽉 쟁여서 타던 사람들은 아직도 이불 속에 있는지 전동차의 긴 의자에는 아예 길게 드러누워 잠이 든 사람까지 있다. 행색들이 추레한 게 어디 빌딩 청소나 뭐 그런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노숙자에 버금가는 행색을 한 자도 눈에 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코를 큼큼거리며 나한테서도 무슨 냄새가 나지나 않을맡아본다. 담배냄새가 날 뿐이다. 하기는 어느 누가 내 차림새를 거들떠나 보겠는가.

  구상은커녕 나는 모로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던 모양이다. 이 지하철 당신이 전세 냈우? 같이 앉읍시다. 누가 나를 툭툭 친다. 전동차는 어느새 만원이다. 마침 정차한 역에서 나는 쏜살같이 내렸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수염이 시커멓게 자라 있다. 택시를 타도 지각이다. 지각을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런 몰골을 보여주긴 정말 싫다.

  그래, 네가 얼마나 버티겠어? 그렇지, 그렇게 무너지는 거야. 너라고 별 수 있어? 사람이 오기를 부릴 때 부려야지. 그만하면 말귀를 알아들어야지 언제까지 강당으로 출근건데? 소나기 퍼붓듯이 들려오는 환청에 귀를 막는다. 버텨야 한다. 개그맨이 될 때까지. 대 반전을 하는 거야. 역전의 명수는 영화제목일 뿐이라고? 천만에, 뜨기만 해봐라. 그깟 월급쟁이 하라고 해도 안 한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여보!

  잔뜩 울상을 한 아내가 회사 앞에 서 있다. 당신 웬일이야? 애들 밥은 어쩌고 이 시간에 여기 서 있어?

  아내는 다짜고짜 내 팔을 붙잡아 끌고 걸어갔다. 왜 이래? 나 늦었어. 나는 아내의 팔을 뿌리치고 회사를 향해 뛰었다. 당신, 정말 이러기야? 당신한테 나는 뭐야?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돌려세웠다. 내 참, 뭘 잘못 먹었나? 왜 그래? 밤샘작업 하느라고 피곤해 죽겠구먼. 왜, 내가 외도라도 한 것 같아? 그렇게 남편을 못 믿어? 집에 가 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따 집에 가서 얘기하자구.

   아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집으로 가요. 집으로 가자구요. 이딴 회사 집어 치우고 집으로 가자구요. 허, 참. 이 사람이 뭘 단단히 잘못 알았구먼. 나 빨리 들어가 봐야 해. 회의 시간 늦겠어. 나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아내의 손을 우악스레 잡아떼고 늠름히 회사의 회전문을 밀었다. 아내의 악다구니가 귀청을 찢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강당으로 향했다. 마침 강당에서는 전 직원 조회 중이었고 해외시찰에서 돌아온 회장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그예 알아버린 모양이다. 안들 대수랴.

  아주 잘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당신, 자존심 상한 모양인데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애들 안 굶기고, 당신 손에 구정물 안 묻히는 게 내 자존심이야. 다른 데 취직될 때까지 버틸 거야. 여기서 내몰렸다고 다른 데서도 찬밥일 것 같아? 기다려. 나를 믿고 기다리라구.

  화장실의 좌변기 위에 걸터앉은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대사를 읊고 있다. 입버릇이 되어버린 것이다. 체질이라니까.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의 발짝 소리가 나서 나는 잔뜩 긴장하고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김과장 오늘 출근 안했데? 아유, 내 속이 다 시원해. 진작 그만 둘 일이지. 나는 김과장 얼굴만 보면 아침 먹은 게 딱 얹힌다니까. 왜 안 나왔지, 어디 아픈가? 그렇게 걱정되면 전화라도 걸어보시지 그래? 너무 그러지마. 우리도 언제 그 신세가 될지 모르는 판인데…… 이봐, 재수 없는 소리 그만 해. 김과장이야 장인 빽 믿고 너무 나대다가 밀린 거지. 어휴, 월급쟁이 목숨, 파리 목숨이지 뭐. 나도 요리 학원에나 다닐까? 투잡 시대잖아? 그럴 시간이 어딨어? 원잡이나 열심히 하세요. 뭘 그래? 이과장도 공인중개사 자격증 따 놨다며? 그거야 불안하니까. 소용없어, 그거 하나 있다고 달라질 거 하나도 없어. 그래?

  조과장과 이과장 목소리였다. 다행히 그들은 용무만 보고 곧 나갔다.

  나는 강당으로 갔다. 사람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오늘따라 신문도 들고 오지 않았으니 무얼 한다? 이쯤에서 그만 두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무원시험공부나 해볼까. 공무원시험이 고시보다 더 어렵다는 세상인데,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머리로 새삼스레 공부가 될까. 사람이 여유가 없어지니까 생각도 막히고 도대체 유머라고는 없다. 무슨 일에든지 먼저 화가 불쑥 치밀 따름이다. 무턱대고 화를 내는 남자. 개그의 콘셉트를 그걸로 바꿔볼까.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버럭버럭 화를 내면 사람들이 웃으려나? 웃기는커녕 냉큼 달려들어 붙잡아다가 볼기를 칠지도 모른다. 현대판 유배다. 무얼 잘못했나. 왕위 찬탈을 기도한 것도 아니고 살인을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아니 내가 나를 유배시켰다. 스스로 반성문을 쓸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얼굴은 그녀다. 나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던 그녀, 그녀는 지금 누구와 행복할까. 사람이 자신감을 잃으면 마음도 약해지는 모양이다. 내 선택이 옳았다. 젊을 때 주어지는 단 한번 도약의 기회를 놓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나보다 훨씬 조건이 좋은 남자를 만났을 것이다.

  지루해도 시간은 흐른다. 점심시간이다. 직원식당에 나타난 내 얼굴을 보고 이과장이 흠칫 놀라는 표정이더니 눈인사를 한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다.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속였어? 강당으로 출근한다며?  이과장 마누라한테 다 들었어. 김대리 마누라랑 장차장 마누라랑 찧고 까불고 뒤에서 얼마나 흉을 봤겠어? 아유, 창피해. 우리 당장 이사 가. 오늘 집 내놨어. 

  현관문을 열자마자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누라의 잔소리에 나는 다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아내의 위로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사 가려고 집을 내놨다는 데는 질려버린다.

  그래서, 이사 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우선 아무도 모르잖아. 당신한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래. 나한테는 그게 중요해. 내 심정 따윈 아랑곳없고? 당신 심정이야 당신 무능력에서 나온 거니까 당신 책임이지만 나는 뭐야? 그래? 당신 그런 사람이었어? 왜, 월급이라도 안 나왔으면 당장 갈라서자고 덤비겠네? 창피하게 이게 뭐야. 대출 받아서 가게를 열던지 하면 될 걸 가지고 동네 창피하게 강당으로 출근하다니, 6개월 동안이나 나만 모르고 다 알고 있었잖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지 알아? 누군 강당으로 출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 복귀거야. 내 자리로 돌아간다구. 누가 받아 준대? 이미 잘린 거라던데? 누가 그따위 소릴 해?

  학원 다녀왔습니다. 큰아들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들이 들었을까? 아들에게 무능한 아버지로 비치는 건 죽기보다 싫은 노릇이다. 무능한 아버지는 증오의 대상이기 십상이라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유능해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다. 일류대학교와 일류기업, 내 노력의 대가는 정당하게 돌아왔다. 지금 잠깐 삐거덕거릴 뿐인 것이다.

  아내가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지 침대에 눕자 말을 건넨다. 당신, 하루 종일 강당에서 뭐해? 공부해. 신문만 본다던데? 누가 그따위 소리까지 꼬아바쳐? 친절도 하군. 그 친절로 내 일자리나 알아봐 주던지. 당신 왜 그렇게 삐딱해졌어? 당신도 강당에서 6개월을 견뎌봐. 어떻게 되나. 그러게 왜 그만두지 않느냐고요. 그게 그렇게 간단해? 내일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는 있지.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는 못해 주겠어. 무언가이루기까지 버틸 거야. 그게 뭔데? 나중에 알게 되겠지. 잠이나 잡시다. 어제는 어디서 잤어? 찜질방.

  나는 이불을 둘둘 말아 덮고 돌아누웠다. 아내는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줄 양인지 돌아누운 나를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내가 그럴수록 나는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아내가 토라져서 등을 대고 누워버리자 한숨이 나온다. 강당으로 출근한 다음부터 아내를 안지 않았다. 거세를 당하기라도 것처럼 도무지 욕정이 일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가 더러 나를 질벅였지만 나는 피곤함을 핑계로 돌아눕곤 했다.

  아내도 생각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하철 노점상을 주제로 하는 개그가 재밌던데, 그건 벌써 다른 사람이 써먹었으니 소용없고. 학창시절에는 머리 좋다는 소리께나 들었는데 왜 이렇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직원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내 얘기를 하다가 뚝 그친 게 분명하다. 도로 나가서 밥을 사먹을까 하다가 나는 꾹 참았다. 훈련이니까, 이제까지는 집 안마당에서 논 것이라면 앞으로는 생판 모르는 동네에 가서 이겨먹어야 되니까, 이까짓 냉대쯤에는 의연해야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주방 아줌마까지 전에 없이 나를 힐끗거린다. 많이 드슈. 생전 않던 인사까지 하는 걸 보니 무슨 별다른 조치라도 내린 건지 모르겠다. 밥알이 모래알 같다. 모래알 아니라 바윗덩이라도 삼켜야 한다.

  커피 자판기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린 여직원 몇이 바깥을 내다보며 깔깔거리는 게 보인다.

  강당아저씨, 그예 돌았다며? 무대에서 춤추고 난리도 아니라던데? 너도 봤니? 요새 돌아가면서 강당아저씨 구경 가는 게 큰 재민데 그걸 놓쳐? 그나저나 안됐다. 어쩐다니 불쌍해서.

  미쳤다구? 내가 개그 연습하는 게 쟤네들한테는 미친 걸로 보였나? 남이사 신문을 보든 개다리춤을 추든 자기들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하기는 별 재미없는 세상에서 하기 좋은 얘깃거린 되겠지.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여직원들은 내 모습을 보자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커피가 유달리 썼다. 이제는 강당에서 연습 하지 말아야겠다. 미친놈 취급을 받아서는 그나마 강당에서도 쫓겨나고 말 터이다.

   나는 강당의 맨 앞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문이 슬쩍 열리고 누군가가 엿보는 기색이 있기라도 하면 나는 더욱 꾸벅꾸벅 조는 시늉을 했다. 강당으로 출근하는 게 정상으로 출근하는 것보다 백배는 힘들다는 걸 저들은 알 턱이 없다. 느닷없이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눈물이라니, 이 상황에 눈물이라니. 나는 가방을 열고 ‘아이디어맨의 특별한 비법,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기’를 꺼냈다. 내 가방에는 언제나 ‘아이디어’라는 말이 들어간 제목의 책이 들어 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의 아이디어를 읽고 배운다고 내 아이디어가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개그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있으면 훨씬 쉬울 텐데…… 여간 웃기게 생겼든지 바보짓을 잘 하든지 아님 말솜씨가 탁월하든지,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데다 얼굴까지 영락없는 샐러리맨이다. 차라리 울퉁불퉁하게 생겼더라면 좋았을 걸. 개그맨의 조건에 들어맞는 거라고는 한 가지도 없다. 엊그제 신문에는 의사도 그 좋은 직업 때려치우고 개그맨을 하겠다고 나서고, 지게차운전기사도 개그맨을 하겠다고 나선다며 개성을 요구하는 개그맨에 각양각색의 늦깎이 도전자가 숱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경쟁해서 물리쳐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직업 속에 어린 애환을 각색할 것이다. 나는 밀려난 사람, 벼랑 끝까지 밀렸지만 끝까지 버티는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풍자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이 재미없는 세상을 웃게 하겠다.

  무대를 코앞에 두고 연습을 하지 않으려니 그 또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부단한 연습 말고는 내가 개그맨이 되는 길은 없을 것이다. 나는 개그노트를 뒤적였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었다가 얼기설기 엮어 놓으면 그런대로 하나의 재밌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웃어버리면 실패다. 다른 사람을, 그것도 여러 계층의 사람을 동시에 웃겨야 하는 것이다. 하기는 무대만 있으면 무얼 하나. 관객이라야 미친놈 취급하는 직원들이 이따금씩 빠끔 들여다보는 게 전부일 텐데……

  관객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하철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 개그를 시험해 보자. 언젠가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저희는 가난한 고아입니다 어쩌구 하면서 전동차 안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사람들의 동정을 사지 않았나?  나중에 연극반 학생들의 연습이란 것이 밝혀져서 벌쭘하긴 했어도. 어찌 알겠는가, 재바른 젊은이가 내 개그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릴지? 그래서 누군가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될지? 슬쩍 우연에 기댄 행운까지 점쳐 본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뺑뺑이를 쳤지만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 노점상이 내 앞에 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올드팝 CD를 파는 내 또래의 남자가 전동차를 내리자 나는 다짜고짜 따라 내렸다. 남자는 승강장에 앉아서 잠시 쉴 요량인 것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곁에 앉았다.

  잠깐 뭐 좀 물어 봅시다. 뭐요? 어떡하면 전동차 안에서 입이 떨어집니까? 장살해 보게요? 그건 아니고 뭐 좀 시험해 볼 게 있는데 도통 입이고 발이고 떨어지질 않아서요. 그 남자는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웬만하면 관두슈 했다. 별 재미없습니다. 단속이 심한 데다 장사꾼이 여간 많아야지요. 무슨 노하우가 있을 텐데 소주 한잔 살 테니 좀 알려 주십시오. 이까짓 보따리 장사에 노하우는 무슨 노하우요? 그저 처음에는 사람 얼굴 보지 말고 하여간에 아무데다 한군데 시선을 고정시키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내가 왜 이 CD를 파는 줄 아슈? 그게 잘 팔립니까? 웬걸요, 일단 음악을 크게 틀어 놓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잡을 수가 있거든요. 그다음에야 외운 대로 떠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일당벌이는 됩니까? 재수좋은 날은 되고, 어떤 날은 공치고, 그러다가 단속에 걸려 벌금을 물기도 하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잘 해 보슈. 남자는 전동차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를 따라 전동차에 올라탔다. 나는 두 시간 동안 그를 따라 다닌 후에 그 남자와 저녁을 먹었다.

  그만한 끈기면 뭘 해도 굶어죽지는 않겠수다. 근데, 뭘 팔 작정이우? 나요. 나를 팔다니? 나를 한번 팔아 보려구요. 이 사람이 사람을 놀리나? 그게 아니라, 개그맨이 되고 싶어서요. 우하하, 개그맨이라고 했우? 이사람 진짜 개그하네. 거 봐요. 지금 웃었잖아요. 진심이우? 처음에는 오기로 그랬는데, 이제는 진짜로 하고 싶어요. 세상을 웃어주고 싶어요. 그 나이에? 내 나이가 어때서요? 애들만 사람 웃기라는 법 있우? 정말 웃어야 될 사람들은 어른들이라고요. 생전 웃을 일이 있나? 그저 골치만 아프지. 텔레비전 개그프로 보면 저는 하나도 우습지가 않습디다. 애들은 잘도 웃더구만. 맞는 말만 하시네.

  나는 주말마다 그를 따라 다녔다. 왠지 의지가 되었다. 내일은 한번 해 보슈. 나는 시골 갈 일이 있어서 내일 못 나오니까 한번 부딪쳐 봐요.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아무렇지도 않습디다.

  일요일 오후 3시쯤이 어떨까. 지하철이 한가하겠지? 붐비는 2호선 말고 3호선 독립문역쯤에서 해볼까? 사람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쑥스러울 테니까.

  나는 우선 심호흡부터 했다.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종로 3가에서 3호선을 탔는데, 독립문역이 지나도록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배추밭 고랑에 서 있다. 양 두둑에 알이 꽉 찬 배추가 줄지어 앉아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고 나서 눈을 떠 보면 무표정한 사람들이 제각각 졸고 있거나 책을 보거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녹번, 녹번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나는 내리려는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배에 힘을 주고 통로 저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힘껏 외쳤다.

  이기동을 아십니까?

  나는 내가 내지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슴이 쿵덕거렸지만 곧 표정을 수습해서 통로 쪽에다 시선을 고정시킨 다음 연습한 대본을 외기 시작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환영회에서 한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습니다. 야, 너 이기동 알아? 이기동이 누군데요? 몰라? 땅딸막한 코미디언? 왜요, 그 사람이 어쨌길래요. 죽었어요? 그야 모르지. 근데 왜요? 선배는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옆자리 신입생의 어깨를 툭 치며 야, 넌 이기동 알아? 했습니다. 그렇게 한 바퀴 돈 선배는 아, 올해도 나랑 친구할 놈은 하나도 없구나 하고 나갔습니다. 선배가 나가자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좌중의 누군가가 일어서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더군요. 자, 자, 주목. 저 선배는 8년째 재학 중인 대선배니까 다들 알아서 모시도록.

  그런데 대관절 이기동이 누굽니까. 여러분은 이기동을 아십니까? 그 선배는 왜 그토록 이기동을 아는지 묻고 다녔을까요? 그가 유행시켰던 유행어를 아십니까? 아, 괴롭고 싶구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구나. 어쩌면 이렇게 지금 내 심정을 한 마디로 대신해 주는 걸까요. 십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그 선배는 이기동을 아는 친구를 만났을까요?

  갑자기 목울대가 후끈했다. 눈앞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준비했던 대본이 한 대목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긴 통로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문 채 전동차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렸다.  

   아저씨, 여기 앉으세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내 팔을 잡아끈다. 그제야 정신이 들면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거나 고개를 저으며 하나같이 안됐다는 표정들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나서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예 눈물이 솟는다. 이게 아닌데…… 전동차는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걸까.

  전동차가 서자 나는 황급히 내렸다.

  승강장의 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내려놓자 전동차가 출발한다. 전동차 안에서 한 여자가 손을 흔든다. 나는 얼른 주위를 돌아보았다. 승강장에는 나 혼자였다.

  느닷없이 아슴푸레하던 그녀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나는 전동차가 사라진 어두컴컴한 터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원고지84장

'산문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리  (0) 2009.01.11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0) 2009.01.03
매듭  (0) 2009.01.01
  (0) 2009.01.01
청기와 암자   (0) 200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