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담 / 박연
가담
박 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 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 이마와 심장. 고구마 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 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 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속셈이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오래 미워하고 있어.
어디로 걸어야 할까.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더 많은 숨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와중에 스스로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뭐가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 흩날리는 게 눈송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웃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였던 날?
갚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갚으러 오는 아이들이 즐비했던 문구점
그곳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귀를 훔치는 아이들이었지. 더 이상 훔칠 귀가 없는데도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는
어째서 세계의 비밀을 듣는 놀이를 즐겼을까
옆 나라의 수장이 계속해서 무기를 사다가 결국 소년들을 팔아버렸다는 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힌다는 것
말을 아끼는 동안
너는 산뜻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밭은 숨을 쉬게 돼
우리 심장은 우리의 가슴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있으니까
*
우리의 얼굴을 한 영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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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울고 있는 사람의 곁에, 소리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
눈을 꾹꾹 눌러 밟으며 걸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몇몇 사람들이 먼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밟힌 눈은 단단한 얼음이 되어갔다. 몇몇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나뭇가지는 눈 속에 파묻혀 있다가, 눈이 얼음이 되어 투명해지자 모양새를 드러냈다. 나뭇가지는 말랑말랑하다. 나뭇가지는 휘어진다. 이리저리 휘어질 나를, 부러지더라도 말랑말랑하게 허물어질 나를 상상했다. 다시 눈을 헤치고 걸을 때는 종아리에 눈이 닿아 차가웠다.
아주 오랫동안,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일은 결백한 사람이 되는 일 같기도 했다. 주위에 폭력이 만연하고, 우리는 오늘도 몇몇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사이에서 인간은 도저히 결백할 수 없다. 폭력은 조밀하다. 그런 끔찍함과 공존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은 허상일까. 그러나 한 사람이 타자를 만나 사랑하는 순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다짐하는 순간은 아름다움에 가까운 쪽이라는 생각을 한다.
눈송이들은 단단해질 결심을 하고서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모르는 자의 이마 위로 떨어져 그를 사랑하게 되고, 녹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눈송이로 이 세상에 온 친구들에게. 너희가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 결국 투명해져, 오랫동안 휘어보고 허물어뜨린 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때때로 되새긴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 울고 있는 사람의 곁에, 소리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
무너지려 할 때마다 옆에서 나를 일으켜 계속 걷게 해 준 친구들에게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친구들의 마음이 오래 간직하며 쓸 빛이 되었다. 바로 보고, 끝까지 쓰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 준 미복씨, 미복씨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될게요. 나의 곁 량곤, 환한 밤을 함께 통과하자.
![](https://blog.kakaocdn.net/dn/yHjzi/btsMjA1tRxa/NXop1Bh5gkr888C8DXTxj1/img.jpg)
박 연
△199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미디어창작학부 졸업 예정
[심사평]
언어와 사유, 두 축이 팽팽한 기량 뛰어난 시 많았다
예년보다 응모 편수가 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건네받은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매우 높았다. 언어와 사유, 두 축이 팽팽한, 그만큼 뛰어난 기량을 갖춘 시들이 많았다. 이 시들이 어디를 어떻게 지시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즈음 세상은 너무도 소요하고 도처에서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시를 쓰는 이라면 누구보다 예민하게 지금-여기를 감지하리라 믿기 때문에.
투고작들에서 발견한 대략의 경향이라면 이런 것이다. 먼저, 시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것. 기성의 추세를 수용한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적 밀도를 높이고 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꼭 길게 쓰는 것만은 아닐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용 면에서는 식물과 동물(주로는 반려동물)을 주요 소재로, 시 쓰기의 행위 자체를 하나의 장치로 채용한 경우가 다수 눈에 띄었다. 스스로를 잉여적 존재로 규정하는 화자, 더불어 자살 혹은 죽음의 징후를 내세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후, 생태, 노동, 그리고 현 정세에 대한 우려 등을 기반으로 공공적 상상력을 펼쳐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유의미한 주제들이 표층적 차원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도 되었다.
이런 가운데 ‘가담’ 외 4편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아주 섬세하게, 진정(眞情) 어린 어조로 그려냄으로써 마음을 끌었다. ‘가담’은 “두려운 일이 매일 새롭게 일어나는” 속에서도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택할지언정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선한 의지가 돋보였다. 선량함 자체가 아니라 그 같은 성질을 담담하게 추동해내는 감각이 귀하게 여겨졌다. 자신을 넘어 타자를 향해, 가까운 곳에서 멀리까지 관계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태도와 그것을 지지하는 조밀한 언어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응모한 작품 모두 일정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점 역시 미더웠다.
마지막까지 함께 논한 작품은 ‘매미 없이 여름 나기’ 외 4편, ‘생활의 트라이앵글’ 외 4편, ‘혹한기’ 외 4편 등이다. ‘매미 없이 여름 나기’ 외 4편은 쓸쓸함의 정서를 그리는 데 있어 각양의 이미지를 능란하게 잇대어 전개한 점이 좋았고, ‘생활의 트라이앵글’ 외 4편은 일상의 사소한 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심장한 사유를 길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혹한기’ 외 4편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거대한 문제를 생활 안으로 들여와 생생하게 풀어낸 점이 탁월했다. 이들 작품을 최종으로 선택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무언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한 가치가 있었다 정도로 말해 두고 싶다. 어느 정도 심사자들의 취향이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곧 다른 지면을 통해 기꺼이 만나게 되리라 예상한다.
정성스러운 작품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께 감사를 전하며, 자신만의 보법으로 계속 정진해 가시기를 응원한다.
심사위원 : 진은영•신해욱•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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