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 광명기업 - 김용희[2025 신춘문예]
- 문화일보
- 입력 2025-01-02 09:26
일러스트 = 송재우 기자
■ 2025 신춘문예 - 시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무너뜨리는 계획에 지쳤나요 자꾸 삐걱대는 녹슨 곳이 발견되나요 이곳에서 기름칠을 하고 헐거운 곳을 조여보아요 감출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작업복으로 덮어 봐요 작업복을 입으면 얼룩이 대수롭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툭툭 털고 일어나는 털털함을 배워보세요 먼지 풀 풀 날리는 공장이지만 한 뼘씩 자라는 미래를 그려봅시다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자꾸 가게 될 겁니다 긍정 쪽으로
밝은 빛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종의 상징이지요 바람이지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길에 몸을 실어보세요 터널을 좋아하나요 터널이 좋아지게 될 거예요 끝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로
어둠에 갇혔나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분류 : (중소기업) 제조업 - 선박 부품 제작
임금 : 최저시급, 일 8시간(잔업 1시간), 격주 토요일 근무
깔 깔 깔
쿤이 땀 흘리며
너트를 조이는 래칫 렌치를
이곳 사람들은 깔깔이라 부릅니다
웃음 많은
이곳으로 와요
노동문제 발랄한 문장으로 녹여내…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詩[2025 신춘문예]
- 문화일보
- 입력 2025-01-02 09:18
- 업데이트 2025-01-02 09:26
2025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박형준(왼쪽부터), 나희덕, 문태준 시인이 응모작을 살펴보고 있다. 윤성호 기자
■ 2025 신춘문예 - 시 심사평
암울한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탄력적인 상상력과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를 우리 시의 뜨거운 현장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심사 내내 젊은 층의 투고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삶 속에서 얻어지는 문장들과 상상화된 것을 통해 역으로 깊이 있게 현실을 성찰하는 시편들에서 ‘나’를 관찰하고 ‘나’를 정립하고자 하는 활달한 시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응모작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생활시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상의 감정이나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족에 대한 시편들도 어머니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고모, 이모 등 폭넓게 소재를 확장하여 가족 관계를 성찰한다. 또한 인간 아닌 유령 같은 비인간적인 존재들, SF나 우주를 끌어들인 묵시록적인 분위기, 반려동물과 반려식물들을 활용하는 등 일상 속에 중간중간 끼어들어 오는 타자에 대한 관심을 증폭해낸다. 두 번째로 이상기후나 지구 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다른 존재와 맺는 생명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세 번째로 현실을 내면화하여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인 문제를 내면화하여 바라보려는 시적 통찰을 밑바탕에 둔다. 몇 차례의 토론과 고심의 시간을 거쳐 당선작과 경합을 다툰 작품은 아래와 같다.
‘랜드’는 문명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나 위험성을 반어적으로 경쾌하게 제시한다. 자본이 자리를 잡기 전 세워지다 만 놀이공원을 통해 묵시록적으로 반문명적 상상력을 전개한다. 주제가 클 수도 있는데 그것을 담담한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기에 다정한 듯하면서 쓸쓸하게 다가온다. ‘완벽한 인사’는 잘 짜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족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는 서사적인 상황을 시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전개한다. 서로 소통하는 듯하지만 단절되고 마는 관계를 어긋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맛깔나게 표현한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말과 침묵의 관계를 리드미컬하고 절제 있게 전개할 뿐만 아니라 시적 여백을 최대로 효과 있게 사용하는 시적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말의 운용과 함께 빚어내는 상상력이 산뜻하고 새로우며 안정감과 숙련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랜드’는 몇몇 시행이 다소 평이하고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이, ‘완벽한 인사’는 세밀하게 전개되는 리얼리티가 장점이나 시적 구성이 다소 단조롭다는 점이 지적되어 제외되었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다만, 일상의 공간이 상상 공간으로 넘어가는 데 있어 세련된 품격을 보여주지만 그 시적인 이미지들이 모여서 의미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까지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를 쓰는 솜씨가 돋보여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구인> 광명기업’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직면한 노동의 문제를 밀도 높은 리얼리티의 사회적 지형도로 구현한 작품이다. 자신이 매일매일 현장에서 피부로 경험하는 노동의 현장을 무겁게 문제화하지 않고 가볍게 경량화해서 다룬다. 구인 공고 형식을 활용하여 현장 노동자의 입을 통해 한국인을 포함, 외국인이 함께 일하는 ‘광명’기업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곳이 얼마나 유토피아 같은 곳인지 소개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반어적인지를 발랄한 문장 속에 녹여낸다. “소속이란 등껍질”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땀’과 ‘웃음’의 병치 등의 위트 있는 겉이야기를 통해 그 이면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직면한 고통과 사회적 문제를 씁쓸하면서도 수가 높은 아이러니로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하여 어떻게 현장감과 공감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시의 한 모습을 여실히 제시한 작품이다. 당선작에서 보여준 현장감과 기량이 앞으로 써 나갈 작품에서 어떻게 더 뻗어 나갈지 새로운 노동시의 면모가 기대되며, 당선을 거듭 축하드린다.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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