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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시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1. 17. 15:21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박숙인 2025. 1. 4. 17:16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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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 그만 써야지하며 쓴 글···힘내어 다시 쓰겠습니다

 

​ 얼마 없는 목돈을 털어 덜컥 적금을 들어버린 기분입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끌어올려 주신 당선작은 제가 ‘시를 그만 써야지’ 생각하고 쓴 글이었습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는 제가 싫었습니다. 시의 기초도 모르면서 대단한 것을 써내고 싶은 욕심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기억해 두고 싶은 순간들, 다양하게 오래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어서, 솔직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를 믿어주시고 붙들어 주신 정끝별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격려를 들으면 제가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된 것처럼 힘이 생깁니다. 제가 감히 시를 써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선생님들과 문예창작전공 문우들에게도 고맙습니다. 늘 선의를 가지고 저를 지켜봐 주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선후배동료들과 선생님들께 특히 감사합니다. 저를 살게 한 모든 순간들, 풍경들, 인연들에 고맙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캡틴, 진심 어린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엄마에게 감사합니다. 아빠, 언제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제 곁에 머물러주는 친구들에게 ‘시가 어렵기만 하지는 않음’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서 기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문학은 쓴 사람의 진심이 담긴 삶의 궤적입니다. 오래 지켜보면 사랑하게 되고 믿어보고 싶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 시이고 사람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잘’ 쓰는 축이 아니었던 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게 하고 이 세계에 정붙이게 한 것이 문학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줄 알았던 것을 특별한 관심으로 새기는 일, 그것이 시쓰기라고 믿습니다. 시의 순간으로 하여금 여러분 모두의 일상에 희망과 위안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저도 힘내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글쓰며 살겠습니다.

안수현

△ 1998년 출생.

△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박사 수료.

 

 

[심사평]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고 질긴 생명의 온기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탄핵 소추안 가결을 하루 앞둔 날, 네 명의 심사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온종일 신춘문예 시 응모작을 읽고 있던 풍경이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저물어가던 2024년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덮을 만한 사건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24년 이 땅에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린 낯선 분위기 속에서 시 응모작들을 읽었다. 기후 위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강세였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자기 고백적으로 드러낸 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외롭고 무기력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

 

응모작들 중 네 명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개의 춤’ 외 4편, ‘테라스’ 외 4편, ‘테레민’ 외 4편,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을 두고 숙의의 시간을 가졌다. ‘개의 춤’ 외 4편은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자유자재로 공간을 구축하는 ‘방’의 상상력이 흥미로웠는데 예측 가능한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테라스’ 외 4편은 오래 시를 써 온 공력이 느껴졌다. “수없이 늘어선 토르소가 울타리로 일어나고 있었다.”처럼 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대상을 호명하거나 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점은 아쉬웠다. ‘테레민’ 외 4편 중에서는 ‘백자 앞에서’가 눈에 띄었는데 기시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빚어지는 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유전되는 돌봄과 성장의 문제를 식물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는 시선이 믿음직스러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지만 끝끝내 살아내는 질긴 생명의 온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심사의 과정은 늘 어렵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이지만 사실상 마지막 몫은 당선자에게 달렸다. 호명되지 못한 응모자들의 새해도 너무 춥지 않기를 바란다. 시를 쓰며 지금 여기를 견디고 어디 먼 곳에 가닿고자 하는 당신들은 이미 시인이다. 머잖아 지면에서 꼭 만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시절이다. 시를 읽는 시간 동안 잠시나마 느꼈던 온기를 새해에는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심사위원 김선오·이경수·이제니·황인숙(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