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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시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2. 2. 13:38

[최영미의 어떤 시]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입력 2021.05.02. 15:00업데이트 2021.08.11. 14:49
 
 
 

한낮에 잠들어, 으스스한 밤에

쓸쓸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깨어난 나는 바보였네.

내 장미를 너무 일찍 꺾어버린,

내 백합을 덥석 부러뜨린 바보.

 

내 작은 정원을 지키지 못했네

시들어 완전히 버려지고서야,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듯 우네

오 잠들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겨울이네.

 

미래의 봄과 햇살 따사로운

즐거운 내일을 얘기한들 뭣하리-

희망이며 이것저것 다 사라져,

웃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나 홀로 앉아있네.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이보다 슬픈 시를 본 적이 없다. ‘이브의 딸’ 제목부터 기막히다. 자신을 가두는 ‘여성’을 분명히 인식했던 로제티는 훗날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3행의 ‘comfortless’를 어떻게 번역할지? 직역하면 ‘편하지 않은’인데 시 전체의 분위기로 미루어 (남성의) ‘호의를 잃은’ ‘지루한’의 뜻으로도 읽힌다. 차가운 달을 수식하니 ‘쓸쓸한’이 제일 무난하겠다. 제목에 ‘이브’가 나오니까 밑의 ‘garden’은 에덴동산이 아닐까.

종교적 이유로 약혼을 파기했던 젊은 날을 돌아보며 그녀도 후회의 눈물을 흘렸을 게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도 시인이었고 오빠는 라파엘 전파 시인이자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다.

문학과 예술을 갖고 놀던 크리스티나의 여름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고 세 차례의 청혼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중년에 갑상선을 앓으며 집 안에 틀어박혀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데, 시만이 그녀의 탈출구였으리.

A Daughter Of Eve

 

A fool I was to sleep at noon,

And wake when night is chilly

Beneath the comfortless cold moon;

A fool to pluck my rose too soon,

A fool to snap my lily.

 

My garden-plot I have not kept;

Faded and all-forsaken,

I weep as I have never wept:

Oh it was summer when I slept,

It’s winter now I waken.

 

Talk what you please of future spring

And sun-warm’d sweet to-morrow:

Stripp’d bare of hope and everything,

No more to laugh, no more to sing,

I sit alone with sorrow.

-Christina Rossetti (1830∼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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