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지지가 기반,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동전의 양면'
중앙선데이
입력 2025.03.22 00:09
업데이트 2025.03.24 13:04
[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민주주의 위기와 파시즘
지난 15일 런던 테슬라 대리점 앞에서 시위자가 “나치 차를 사지 말라”라는 팻말을 들었다. [EPA=연합뉴스]
민주주의가 요동치고 있다. 언론이나 학계가 1930년대 파시즘의 시대를 자꾸 되돌아보는 것은 그만큼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이야기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위기가 1930년대 파시즘의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반파시즘 진영의 축이었던 서유럽과 미국도 그 위기의 한 축이라는 점이다.
서유럽과 동유럽을 가를 것 없이 극우 정치세력이 약진하고 있는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영국의 극단적 보수주의 정당인 ‘개혁영국당’의 위세나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파격 조치들을 보노라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다. 불법 계엄을 획책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대통령 윤석열과 ‘선출된 권력’의 이름으로 탄핵을 남발하며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더불어민주당 사이에 낀 한국의 민주주의 역시 질식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최선’ 아닌 ‘차악’의 제도
많은 중국인이 트럼프 정부의 모습에서 문화혁명을 떠올리고 일론 머스크를 홍위병과 비교한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도 웃프다. 언론 검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의 한 리버럴 저널리스트는 뜨거운 냄비를 벗어나니 불 속으로 뛰어든 격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시진핑 치하의 중국인들이 미국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이 역설은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적성국 국민법’이라는 18세기 말의 낡은 법령을 소환해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박탈하는 조치를 넘어서 트럼프는 ‘추방 일시 정지’ 명령을 내린 판사를 탄핵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트럼프의 논리는 자신은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법원의 명령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보수 성향의 미국 대법원장의 공개 반박도 그렇지만 베네수엘라 정부조차 트럼프 정부의 이주자 강제 송환을 ‘반인륜적 범죄’라며 비난하고 나설 정도니, 민주주의가 거꾸로 섰다.
미국 역사에서 ‘적성국 국민법’의 가장 심각한 인권 위반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벌어졌다. 진주만 공습이 있자, 1942년 2월 루스벨트 행정부는 행정명령으로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과 이민자들의 재산과 일자리,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고 오지의 강제수용소에 수용했다. 1988년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모든 생존자에게 2만 달러씩을 배상함으로써, 이 비극적 역사는 4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정의를 회복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집회에 참여한 홍위병들의 모습. [중앙포토]
팔레스타인 출신의 컬럼비아대 박사과정 학생으로 영주권자인 마흐무드 칼릴이 반이스라엘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체포되어 불법체류자 수용소에 구금된 것도 놀랍다. 유대계 부모에게 태어나 나치 점령기와 스탈린주의 치하 루마니아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주한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마리안느 허쉬는 칼릴의 불법체포 소식을 접하고는 유대인 배반자의 의심에 시달리던 어릴 적의 공포를 떠올렸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치하에서 유대계 가족이 느꼈던 공포가 민주주의 미국에서 재연될 때,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부딪치게 된다.
이래저래 21세기의 민주주의가 1930년대로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제도에 내장된 잠재적 위험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의 아슬아슬한 행보가 민주주의 원칙과 충돌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지만, 미국민의 다수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상 그의 정책이 민의를 반영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강변해도 그만이다.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압도적인 지지율을 과시하고 있는 푸틴도 그렇고,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의 지지로 유신체제를 정당화한 박정희의 헌정 쿠데타도 그렇다. ‘인민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일당독재를 정당화한 공산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다수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정당하다는 생각은 대통령 트럼프와 윤석열, 이재명의 더불어민주당이 공유하는 민주주의의 문법이다.
민주적이지만 민주적이지 않은 민주주의의 모순어법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뭇 심각하다. 최고 주권자인 국민 다수가 독재적 성향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지지한다면, 그것은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밑으로부터 ‘국민’ 다수의 동의 아래 소수를 타자화하고 억압하는 다수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독재를 지지하는 다수에 반하여 소수가 민주주의를 지지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대중독재’ 프로젝트가 던진 이 질문들은 모순어법으로 가득찬 민주주의의 세계사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물론 이런 이해는 ‘대중독재’가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전제정’을 발견한 알렉시스 토크빌에서 시작하여 스탠리 페인, 유진 웨버, 조지 모스 등에 이르는 독재 연구의 대가들은 20세기 파시즘과 나치즘의 사상적 기원을 프랑스 혁명기의 급진적 민주파인 자코뱅주의와 인민주권론에서 찾았다.
실제로 1930년대 파시즘과 21세기 글로벌 대중독재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와 굴락(소련의 노동수용소), 비밀경찰 등 독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폭력도 원칙적으로는 다수의 동의나 묵인 아래 배제되고 타자화된 소수에 대한 선별적 폭력이었다. 1930년대 파시즘 시대의 독재 정권들은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파시즘은 반자유주의적이지만 반드시 반민주주의적이지는 않다’는 나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 칼 슈미트의 선언적 명구는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독재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지지는 단순히 선전 선동의 효과로 돌리기에는 나름대 로 단단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조와 ‘공익 제보’가 없었다면, 불과 281명의 게슈타포가 인구 400만의 뒤셀도르프를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계엄·탄핵사태 한국 민주주의도 위기
실제로 히틀러는 ‘독일 주민 대다수로부터 괄목할 만한 정도의 인기’와 ‘대중적 지지기반’을 누렸고, ‘국민투표를 통해 체제를 정당화하는 높은 수준의 갈채’를 얻었다. ‘독일소녀단’의 광신적 멤버들에게 히틀러가 누렸던 인기는 아이돌 가수 뺨치는 수준이었다. 무솔리니는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 했고, 지금도 연말이면 신나게 팔리는 무솔리니 사진 달력은 그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여전히 존재함을 입증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노동자계급은 우익 독재인 나치즘에 완강하게 저항하리라는 좌파의 기대는 환상에 가까웠다. 망명 사회민주당의 한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는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많은 부문의 노동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특히 히틀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나치 패전 이후에도 독일 노동자들의 적지 않은 수가 나치 시대를 실업의 감소와 경제 호황, 질서로 상징되는 ‘정상적 시기’로 기억했다.
대숙청으로 인한 사회적 상향 이동성의 증대와 공공영역에서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낸 스탈린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사’로 동원되어 고도성장이 제공한 일자리와 생활 수준 개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남한의 노동자들이 박정희 개발독재에 보낸 일정한 지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노동자들의 인격을 인정한다는 슬로건 아래 노사관계를 인간관계로 환원시키고, 생계를 보장하는 ‘생활급 체계’를 정착시킨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에서도 비슷한 현상은 발견된다.
밑으로부터의 지지가 컸다고 해서 파시즘이나 나치즘, 스탈린주의가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독재 권력의 선전 선동에 넘어가서 혹은 유대 자본이나 아시아적 볼셰비즘의 음모가 먹혀들어서 1930년대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는 식의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상투적 이분법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1930년대 파시즘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 그리고 그에 합당한 정치제도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를 같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라기보다는 차악의 제도이다. 민주주의가 차악에서 최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문지방 위에 서있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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