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의 보수주의자의 Rock]
그 노래는 어떻게 보수 우파의 찬가가 됐나
Rich Men North of Richmond(2023)
![](https://blog.kakaocdn.net/dn/E0HGY/btsMhOfJuGg/zPkOw0Xf9xDB87AxG9Jj0K/img.jpg)
미국 대선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2023년 9월. 가난한 노동자 올리버 앤서니(Oliver Anthony)가 부른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Rich Men North of Richmond)’이 발표되자마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봤다. 꾸준히 음원을 내며 차트에 들기는커녕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두개골 골절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일용직만 전전하던 이가 전 세계 음악인들이 동경하는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그것도 2주씩이나? 세계 최초 기록을 지닌 가수가 궁금해서 라이브 영상을 찾아봤다.
덥수룩한 수염에 구겨진 티셔츠 사이로 빨갛게 그을린 목이 보이는 남자가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하는 영상이었다. 노동자의 고된 삶과 부자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다소 좌파적인 가사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두 눈을 질끈 감고 절규하듯 토해내는 노랫말엔 보수우파가 주장하는 정책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먼저 앤서니는 ‘리치먼드 북쪽 부자들(워싱턴의 정치인들) 때문에 ‘너의 돈은 가치가 없고, 내야 하는 세금은 끝이 없어’라며 과도한 세금과 바이든 시절의 고물가 상황을 비판한다. 앤서니는 이렇게 힘든 상황의 원인으로 정치인들의 과도한 PC주의 정책과 무분별한 복지를 지목한다.
노랫말은 ‘정치인들이 지금 이곳에서 힘들게 일하는 광부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외딴섬에 있는 미성년자들에게만 관심 갖지 말고’라고 이어진다. 정치인들이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미성년자 성착취 사건에 대해서는 온갖 정의로운 말들을 내뱉으며 정부 세금으로 대책을 약속하지만, 정작 그 세금을 만들어내고 있는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그리고 ‘길거리엔 사람들이 굶주려 있고 뚱뚱한 사람들은 복지금을 빼돌려. 160cm에 136kg라면, 세금이 그들의 초콜릿 쿠키를 사기 위해 쓰이면 안 돼’라며 힘들게 일해서 낸 세금이 복지가 필요 없는 이들에게 마구 뿌려지는 모습에 분노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젊은이들은 땅 구덩이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있고, 나라는 그들을 걷어차 쓰러트려’라며 암담한 현실을 토로한 올리버는 ‘고된 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술로 잠재운다’는 가사를 뱉어내며 노래를 끝맺는다.
과도한 세금과 무분별한 복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보수우파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사 때문이었을까. 이 노래는 단순한 빌보드 1위 인기곡을 넘어 보수 진영의 찬가 반열에 올랐다. 심지어 공화당 대선 토론회에서 이 노래를 같이 듣고 후보들이 이 노래가 만든 사회 현상에 대해 토론하는 일도 벌어졌다.
정치적 파장이 커지자 앤서니는 “자신의 노래가 ‘정치적 무기화(weaponized)’되는 것이 싫다”며 정파적 해석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보수 진영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기존에 보수 진영과 멀다고만 여겨졌던 다수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에게도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가 충분히 소구력이 있으니 선명한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워키즘(wokism·깨어 있다는 뜻으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비꼬는 용어)으로 대변되는 퀴어, 페미니즘 등의 메시지가 강조되고 세련된 디지털 기계음이 중심이 된 팝음악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제는 레드넥(redneck·땡볕에서 일해 목이 빨갛게 그을린 노동자를 지칭)으로 대변되는 애국심, 가족애 등의 가치를 강조하고 투박한 아날로그 악기 사운드가 담긴 컨트리록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우경화 트렌드가 문화예술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 기저에는 앤서니의 노랫말처럼 조국과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힘든 노동의 결실인 세금이 정치인들의 올바르게 보이려는 치적에 낭비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의 요구를 잘 파악한 트럼프는 세금 감면, 물가 안정 등 자국민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대안 없이 ‘트럼프는 범죄자’라며 검사 시절의 언어만 반복한 해리슨에게 대승을 거뒀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지난 총선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을 내세웠다가 참패하며 ‘양남(강남과 영남)당’으로 쪼그라들었다. 당연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올라 국민의 생활이 어려운데 인터넷에서는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이백충’이라며 무시하는 밈까지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 여당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야당을 심판해 달라는데 누가 표를 주겠는가.
‘좌파는 안 된다’가 아니라 ‘우파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는 다수의 노동자들도 지난 민주당 정권에서 얼마나 혈세 낭비가 심했는지, 그리고 25만원 지원금 살포 같은 정책이 얼마나 나라를 병들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파 정권 탄핵 위기에도 기존 지지자의 결집은 물론 노동자들의 지지도 늘어나는 것은 이런 정책이 반복되었다간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탓일 것이다.
이제 보수우파 정당이 세금은 줄이되 걷었으면 낭비하지 않는 정책을 말해야 한다. 예를 들면 매년 수백억 적자를 내는 공항들과 공공 병원들의 통폐합이 있겠다. 복지 재정 누수를 막는 대책도 병행해야 한다.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한 농산물 수입 다변화, 한시적 관세 인하(할당관세) 등 여러 정책도 약속해야 한다.
고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이 으레 보수우파적인 가치가 담긴 정책을 싫어할 것이라고 여기고 포기하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노동자들의 자부심을 세워주고 노동의 결실을 시켜주어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정치 집단이 보수우파라고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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