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 읊고 강산에 노래하던… ‘청춘의 해방구’로 기차가 떠난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1-09 09:11
원릉역에서 일영역 구간을 시험 운행 중인 교외선 열차. 교외선은 양방향 열차가 하나의 선로를 이용하는 단선구간이다. 단선의 철로를 전철이 아닌 디젤기관차가 달린다. 오래전 교외선 열차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겠다는 배려 같지만, 단선 선로 유지나 디젤기관차 투입 등은 순전히 경제성 측면의 선택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의정부 ~ 고양… 21년만에 다시 달리는 교외선 (1)
1979년 유신체제 몰락 대혼란기, 백마역 철로변에 들어선 주점 ‘화사랑’
신촌역서 가는 낭만의 문화살롱… 2015년 폐업뒤 우상호 등 단골들 ‘복원’의기투합
4월 재개장… 김지하 육필 원고·80여권 방명록·LP판 ‘보물’ 간직
고양·양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오늘’이나 ‘내일’ 대신, ‘어제’를 만나러 간다.
한 해의 시작 무렵인데도 자꾸 뒤부터 돌아보게 되는 건, 지금의 터널이 어둡고 깊기 때문일까.
이번 여정의 목적지는 ‘추억’이다. 그것도 불붙이면 화르르 타오르는 ‘인화성 강한’ 추억 이야기다.
도화선 심지가 돼서 추억에 불을 댕긴 건 ‘교외선 열차 운영 재개’ 소식이었다.
오는 11일부터 교외선 여객 열차가 다시 운행된다. 신촌역에서 타면 유원지가 있던 일영이며 장흥, 송추까지 데려다주던 그 교외선 열차다. 교외선의 여객영업이 중단됐던 건 2004년. 그러니까 21년 만의 운행 재개다.
# 그 시절의 기차는 낭만의 다른 이름
다시 운행을 시작하는 건 교외선 서울 서북부 구간이다. 1963년 최초 개통된 ‘교외선(郊外線)’은, 애초에 이름처럼 서울 외곽의 교외를 빙 도는 선로로 계획됐다. 서울역에서 의정부까지 가서 성북역과 왕십리역을 거쳐 다시 서울역으로 되돌아오는, 서울 지하철 2호선과 비슷한 개념의 순환선이었다. 도시 확장과 개발로 동남부 구간은 수도권 전철에 편입되거나 전철화했고, 교외선은 개발이 지체된 서북부 지역에만 남았다.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교외선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태부족이었던 당시, 교외선은 ‘낭만의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수단이었다. 교외선을 타고 나간 근교의 기차역 주변에는 유원지가 있었고, 미술관이 있었다. 낭만적인 분위기의 주점(酒店)도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교외’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교외선 일영역 바로 옆 2층 건물에는 당시 구파발까지는 가야 볼 수 있었던 다방이 있었고, 장흥에는 당시 서울에도 드물었던 피자집이 있었다.
교외선을 타고 떠나는 여행은 낭만적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비장한 느낌도 있었다. 되돌아보면 유신체제에 뒤이어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학 캠퍼스가 최루탄 연기로 뒤덮이는 날이 비일비재했던 때였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공간과 낭만을 소비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이동수단은 고작해야 비둘기호나 통일호 기차였고, 목적지는 MT 손님을 받는 유원지나 허름한 주점이었다.
통기타와 이동식 전축을 들고 탈 때도 있었고, 가슴 두근거리는 데이트로 탄 적도 있었다. 때로는 달리는 교외선 기차 난간에 매달려서 청춘의 뜨거운 피를 식히기도 했고, 허름한 주점에서 동동주 몇 잔에 불콰하게 취한 채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늦은 밤, 만취한 채 담벽에서 토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막차를 놓치기도 했다. 그때 그런 시간을 달리던 교외선 열차가 이제 며칠 뒤부터 단선의 선로 위를 다시 달린다.
초창기 ‘화사랑’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왼쪽 사진은 화사랑 주인 김원갑 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그려준 1980년의 화사랑 모습. 오른쪽 사진은 고양시가 2020년 복원한 ‘화사랑(숲속의 섬)’.
# 청춘이 공유하는 기억…‘화사랑’
교외선은 그 시절 젊음을 보낸 이들의 ‘공유의 기억’ 속에 있다. ‘교외선의 추억’에 공감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부류다. 나이는 적어도 50대 중반 이상, 서울, 그것도 주로 서울 서부권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여행을 좋아하거나 문학에 취미가 있었다. 아니면 술을 좋아했던지.
교외선의 추억 이야기는, 빛바랜 일기장과 비슷하다. 너무 낡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너무 사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추억이라지만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교외선의 추억’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꺼내놓기 망설였던 이유다.
교외선을 타고 출발하기 전에 먼저, 말해야 할 곳이 있다. 외딴 역 철로 변에 있던 주점 ‘화사랑(畵舍廊)’이다.
화사랑은 198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젊은이들의 로망의 공간이었다. 화사랑은 교외선이 아니라 경의선 백마역에 있었다. 교외선과 경의선, 둘 다 신촌역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때는 화사랑에 가면서도 자기가 탄 열차가 교외선인지, 경의선인지 잘 몰랐다. 어찌 됐든 화사랑은, 교외선과 경의선을 통틀어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가장 낭만적인 명소였다.
화사랑은 백마역 철로에 바짝 붙어 있었다. 가는 길은 몰라도 됐다. 백마역에서 내린 이들은 죄다 철길을 걸어서 화사랑으로 향했으니까, 그 뒤만 따라가면 됐다. 그곳은 도무지 주점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외딴 시골구석에 화사랑이 들어서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랜 수소문 끝에 어렵게 화사랑 사장이었던 김원갑(78) 씨를 찾았다. 그를 만나서 화사랑의 ‘시작부터 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 씨는 홍익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뒤 스물여덟 나이에 벽시계를 만드는 회사인 국제전광사에 입사해 디자인실에서 일했다. 회사 취업 전에 그는 신촌역 앞 화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화실 창밖으로 매일 출근 시간에 신촌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많은 사람이 다 어디서 오는지’가 궁금했단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는 나들이 삼아 교외선을 타고 문산을 자주 오갔다.
# 화사랑은 왜 백마역에 들어섰을까
신촌역에서 문산까지 경의선 구간의 딱 중간쯤에 백마역이 있었다. 그린벨트를 막 벗어난 첫 번째 역이었다. 백마에는 철로 변에 마구잡이로 지은 무허가 집들이 있었다. 얼기설기 지은 허술한 집이었는데, 이런 집들은 공간을 잘라 서너 칸씩 세를 줬다. 서울에서 밀려났거나 서울로 입성하지 못한 가난한 이들이 거기 셋방을 얻어 살았다.
부산 출신인 김 씨는 백마에 셋방을 얻어 서울로 출퇴근했다. 회사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회사 생활이 무료했던 그는 친구와 의기투합해 셋집에다 철길 쪽으로 처마를 달아매서 돌로 지은 13평짜리 공간을 만들었다. 무허가 주택 세입자가 무단 증축까지 한 것. 그리고 거기다 ‘화사랑’이란 간판을 써서 걸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둘. 1979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니, 유신체제 몰락 이후의 사회는 정치적 대혼란기였다. 대학 캠퍼스가 최루탄 연기로 뒤덮이는 날이 비일비재했던 시절. 화사랑은 그 무렵의 혼돈과 고뇌 속에서 청춘을 건너온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준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의표를 찌르듯 허허벌판 논둑길 옆에 차린 화사랑은 금세 명물이 됐다. 시골구석의 난데없는 주점이 신기하기도 했고, 경의선 열차를 타고 온 젊은이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서울에서 떠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다. 미술 전공의 주인이 한껏 솜씨를 부려 연출한 낭만적인 분위기도 한몫했다. 황토 바닥에다 천장은 짚으로 이었고, 어두운 실내에는 촛불을 켜놓고 드럼통으로 만든 벽난로를 설치했다. 김 씨는 거기서 막걸리와 파전, 커피를 팔았다. 금세 직장 다니며 받는 월급의 몇 배를 벌 수 있었다.
화사랑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는 백마에서 을지로1가에 있는 회사까지 출퇴근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조직생활도 생리에 맞지 않았다. 청춘들과 어울리는 생활은 즐거웠다. 마음 붙일 곳 없는 젊은이들에게 공간을 마련해줬다는 뿌듯함 같은 것도 있었다.
이제 백발이 다 된 김 씨는 젊은 시절을 추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돌아보면,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아요.”
새로 복원한 ‘화사랑’의 내부. 30~40년 전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공간이다.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는 매입 당시 조건에 따라 예전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무대 쪽에는 시인 김지하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지정석처럼 앉던 자리가 있었다.
# 눈 내리는 날, 신촌역이 붐볐던 이유
김 씨에게서 그 시절의 화사랑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자리마다 촛불을 켜고, 한쪽에는 ‘도라무깡(드럼통)’ 벽난로까지 놓았어요. 미술 전공의 특기를 살려서 철사로 전등갓을 만든 뒤 붕대로 감싸 은은한 조명을 만들기도 했지요. 기차를 타고서 철길을 걸어서 거기까지 온 것만 해도 낭만적인데, 손님들이 이런 공간을 보고 다 반했어요.”
김 씨는 “처음 화사랑을 알아본 건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고 했다. 당시 이대 앞에는 ‘시작(詩作)’이란 꽤 유명한 카페가 있었는데, 문학 취향의 그 카페 열혈 단골들이 화사랑에 와보고는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한 입소문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화사랑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약 명소가 됐다. 주말이면 경의선을 타고 화사랑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하루 1000명이 넘었다. 낭만의 절정은 ‘눈 내리는 날’이었다. 눈이 내리면 화사랑에 가려는 젊은이들로 신촌역이 발 디딜 틈 없었을 정도였다.
당시 화사랑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신화에 가까웠다. 화사랑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주변에 비슷한 주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썩은 사과’ ‘원두막’ ‘고장 난 시계’…. 삼엄했던 그 시절에 어떻게 간판을 달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불온의 대명사’였던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상호로 쓴 주점 ‘지하(芝河)’도 있었다.
이 중 ‘썩은 사과’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 씨의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 애자 씨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화사랑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손님과 교류하던 애자 씨는 오빠 김 씨가 결혼하자 독립해서 인근에 ‘썩은 사과’란 간판을 걸고 카페 겸 주점을 차렸다.
2017년 작고해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그는 40년 넘게 그 공간을 지켜왔다. 화사랑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원조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얘긴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자.
# 노래도, 그림도, 시도 있었던 곳
셋집을 한 칸씩 내보내며 공간을 늘려나가던 화사랑은, 1985년 큰불이 나서 20분 만에 다 타버렸다. 인근 건물의 지하로 잠깐 옮겨 갔다가 김 씨는 예전의 자리에 80평짜리 독립 건물로 화사랑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시작된 화사랑의 전성기. 그 무렵 청춘을 보낸 이들이 기억하는 화사랑은, 대부분 불 난 뒤에 다시 지어진 화사랑이다. 그 시절 화사랑에서는 밤마다 즉석 공연이 펼쳐졌다. 화사랑에서는 누구나 통기타를 들고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김원갑 씨의 회고. “화사랑에서는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어요. 가수 윤도현도, 강산에도 여기서 노래를 불렀지요. 자기들이 하고 싶어 노래를 부른 거라 출연료 같은 건 없었어요. 아, 강산에에게는 돈을 줬어요. 노래만 한 게 아니라 손님 서빙까지 겸했거든요. 가수 이문세가 찾아온 적도 있어요. 노래를 했던 건 아니고, 레코드판을 주면서 ‘자주 틀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 시절 화사랑에는 노래도, 그림도, 그리고 시(詩)도 있었다. 이화여대 교수 정끝별 시인은 화사랑에서 열린 시낭송회 장면을 선명한 사진처럼 기억했다. 1984년 12월 초. 화사랑에서는 연·고대와 이대의 합동 시낭송회가 열렸다. 낭송회 행사가 끝날 즈음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갓 수습기자가 된 고(故) 기형도가 무대 위에서 자작 시 ‘안개’를 낭송했다. 시를 다 읽은 기형도는 친구 성석제와 함께 무대에서 듀엣으로 ‘퍼햅스 러브’를 불렀다. 기형도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맑은 고음 부분을 맡았다고 했다. 이날 관객석에 앉아 있던 정 시인은 대학 2학년이었다.
이듬해 기형도는 그날 낭송한 시가 신문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됐다. 2년 뒤에는 화사랑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던 성석제가, 그리고 4년 뒤에는 관객석에 앉았었던 정끝별이 등단했다. 화사랑은, 그들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다
백마의 화사랑은 한창 장사가 잘되던 1991년 문을 닫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으로 일산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보상금을 받고 쫓겨나게 된 것. 김 씨는 이주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교외선 장흥역 주변을 골랐다.
김 씨는 최초의 사설 미술관으로 젊은이들의 나들이 장소로 인기 있던 토탈미술관 옆 500평이 딸린 목조주택을 샀다. 백마 시절보다 더 크고 근사하게 내부를 꾸미고는, 화사랑 간판을 달았다.
화사랑은 그러나, 예전 같지 않았다. 이른바 ‘마이카’ 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버스와 지하철 등 교통수단이 다양해지면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기차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소비 주체로 떠오르면서 굳이 근교까지 나가지 않아도 서울 도심에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곳이 늘어난 것도 원인이 됐다. 결정적이었던 건 문민정부 들어 장흥 일대에 숙박업소 허가가 무더기로 나면서 러브호텔이 마구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술과 낭만의 문화공간이었던 장흥이 한순간에 ‘욕망의 모텔촌’이 돼버리면서 젊은이들은 발길을 뚝 끊었다.
장흥에서 줄곧 고전하던 화사랑은, 1999년에 다시 백마로 돌아왔다. 백마역 주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애니골’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삼성캐슬빌리지’가 들어선 그 자리다. 애니골은 본래 애현(愛峴)골, 그러니까 ‘사랑 고개’였는데, 그게 발음 변화로 애니골이 됐다. 화사랑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자 뒤따라 학사주점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화사랑은 백마로 돌아온 뒤에도 예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격식 있는 퓨전음식점으로 변신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숯가마 찜질방까지 열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돌아온 화사랑은 더 이상 청춘의 공간이 아니었다. 상전벽해가 된 신도시에서 어떻게든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올라타 보려 애썼던 화사랑은 결국 2015년 간판을 내렸다. 화사랑은 그렇게 사라졌다.
가수 김광석이 활동했던 ‘동물원’이 1993년에 낸 5집 음반에 ‘백마에서’란 노래가 있다. 화사랑을 기억한다면, 그래서 추억이 있다면 들어보시길…. 기차 기적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노래는, 첫눈 오는 날 교외선을 타고 백마역의 주점을 찾아간 이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옛 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눈 덮인 철길을 따라 걸어서 애인과 함께 갔던 노래 속의 ‘촛불 켜진 백마의 주점’은, 당연히 화사랑이다.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햇살이 눈이 녹듯 그렇게 사랑은 녹아 사라져 가도, 소중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은 너도 잊을 순 없을 거야.” 화사랑이 눈 녹듯 사라졌고, 이제는 기억도 하나둘 흐려지고 있다.
왼쪽 사진은 복원한 화사랑의 LP판. 가운데는 화사랑 주인이었던 김원갑(78)씨. 오른쪽은 1980년 초반 방문객들이 남긴 방명록.
# ‘썩은 사과’로 다시 살아난 화사랑
화사랑은 사라졌지만, 김 씨의 여동생 애자 씨가 운영하던 ‘썩은 사과’는 살아남았다. 아슬아슬하게 일산신도시 개발구역 선 바깥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태가 달라지고, 명성도 빛이 바랬지만, 썩은 사과는 ‘초록 언덕’에서 ‘섬’으로, 다시 ‘숲속의 섬’으로 상호를 바꿔가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2017년 애자 씨가 작고하기 전까지 숲속의 섬은 그 시절 백마역과 젊은 날의 화사랑을 그리워하는, 몇 안 되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위안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세상을 뜨면서 숲속의 섬도 문을 닫았다. 추억의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무렵, 화사랑을 기억하던 이들이 숲속의 섬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맨 앞에 우상호 국회의원이 있었다. 연세대 국문과 재학 시절 그는 ‘화사랑’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얼마나 그곳을 좋아했냐면,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 첫 자취를 시작했을 정도였다. 훗날 그는 화사랑을 ‘들어가자마자 숨이 멎는 곳’이라고 회고했다. 그에게 백마는 ‘피안의 장소’였다. 기차를 타고 백마를 오갔던 시절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침에 기차를 타면 맞은편에 해가 떠오르고,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는 온 들녘이 노을로 물들었다.’ 오는 11일부터 재운행하는 교외선은,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그런 감성을 간직한 채 단선 궤도와 철도 건널목을 느릿느릿 달리게 된다.
우 의원이 앞장서고 이재준 당시 고양시장이 의기투합하면서 고양시는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20년 숲속의 섬을 인수했다. 우선 건물을 ‘고양시 상징건축물 1호’로 지정한 뒤에 그걸 명분으로 숲속의 섬을 매입했던 것.
고인의 두 딸은 ‘갖고 있던 것은 아무 것도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숲속의 섬을 고양시에 넘겨줬다. 신신당부한 ‘팔지 말아야 할 것’이야말로, 숲속의 섬에 남아 있는 보물과도 같은 것들이다. 낡은 전축과 벽 한쪽을 가득 채운 LP판, 김지하 시인이 직접 써준 육필 시 원고, 오래된 책과 잡지….
보물 중의 보물은 40년 넘게 간직해온 ‘방명록’이다. 80여 권에 달하는 방명록은, 화사랑 시절이던 ‘19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방명록에는 그 시절 청춘들의 세태와 치기 어린 감상, 그리고 진한 고뇌가 다 담겨 있다. 부치지 못한 편지도, 넋두리하듯 풀어놓은 고민도 있다. 40년 전 누군가의 ‘청춘의 시간’이 거기 박제돼 있는 것이다.
고양시는 방명록의 기록을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기 이름을 입력하면 과거에 자기가 썼던 방명록을 확인할 수 있게 해둔 것. 젊은 시절 백마의 주점을 드나들었다면 남긴 글이 없는지 확인해보자.
숲속의 섬은 2020년 11월 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찻집 겸 지역주민들의 교육문화 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코로나 19의 와중이었던 데다 홍보도 제대로 안 돼 운영은 곧 중단됐다. 지난해까지 운영을 전면 중단했던 고양시는 오는 4월 재개장을 준비하고 있다.
숲속의 섬은 얼마 전부터 ‘화사랑’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이걸 두고 시비가 있다. 그 시절의 화사랑이 아닌데도 ‘가짜 간판’을 달고 있다는 것.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과연 진짜와 가짜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 ‘진짜’의 의미란 ‘건축과 공간’에만 있는 것일까. 공간이 이미 사라지고 없다면,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화사랑 안주인 역할을 하며 40여 년 동안 손님과 교분을 나눠온 김애자 씨에게서 화사랑의 정통성을 찾을 수는 없을까.
다시 찾아간 곳이 ‘그때의 화사랑’이 아니어서 실망했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질문을 돌려준다. 개발의 광풍이 지나간 수도권에 그만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건축과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 강산에가 오지 않은 이유는?
‘숲속의 섬’을 인수한 고양시는 새 단장을 마친 뒤 개관하면서 기념행사를 했다. 기념행사에는 ‘화사랑’과 인연이 있는 인사들을 초청했는데, 초청자 목록에 화사랑에서 노래했던 가수 강산에와 윤도현이 있었다. ‘노래 몇 곡’을 부탁하기 위해 먼저 강산에에게 연락했는데, 행정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출연료를 불러 초청이 무산됐단다. 높은 출연료에 놀란 고양시는 윤도현에게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화사랑의 정통성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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