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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들)'으로서 위장하는 시간 : 이장욱·김승일·박참새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1. 3. 16:34

[2025 신춘문예]

다시- '몸(들)'으로서 위장하는 시간 : 이장욱·김승일·박참새의 시

문학평론 당선작

김웅기
입력 2025.01.01. 00:35업데이트 2025.01.02. 16:33
 
 
 

 

1. 코르푸스로서 생존하는 비범(非凡)들

지금 여기 시적 주체가 들고 있는 슬로건은 적당한 생존방식, 즉 ‘잘 살아남는 법’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공적 가난이자, 스스로 애정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일종의 체념이다. 현실에서 잘 살아남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해지는 방법’과 동위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들은 사회 구조의 변화나 세대 갈등 해소와 같은 대의적 명분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잘 영위하기 위한 자기 고투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판단이 드는 것.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비범’해진 그들에게 있어 ‘평범’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에 대한 간절한 고민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되돌아갈 수 있지?’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재론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시에 나타난 산문성은 형식의 해체나 문학의 정치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육성이 아니라 일상성에 대한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변명을 시작하렴. 절단면으로. 생채기가 입이란다 말을 쏟으렴”(김승일, 「가장 좋은 목표」, ‘지옥보다 더 아래’, 아침달, 2024)이라는 권유 속에 고백을 털어놓는 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안정되고 고요한 풍경으로 위장하고 ‘나’의 역경을 ‘유년 신화’ 혹은 ‘친구 신화’로 대체한다. 이렇게 전시된 산문성은 기존의 틀과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경우울증이나 고도적응형 알코올 중독과 같은 정신적 질환을 보편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그것이 ‘팔자’나 ‘운명’으로 위장되는 문학적 서사는 우리에게 슬픔이나 분노가 얼마큼 보편화된 감정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집과 바깥을 왕복하며 나는 살아왔을 뿐”(이장욱, 「기도의 탄생」, ‘음악집’, 문학과지성사, 2024)이지만 (비)일상적 현실(“잠들고 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살인을 저지르면서”)에서 자라난 이들의 내력을 통해 펼쳐지는 보편적 슬픔은 마치 기도를 해야 할 신성한 대상으로 인식된다. 한 마디로 ‘기구한 삶’. 이 기구함이 보여주는 비일상적 일상의 아이러니가 오늘날 우리 세대가 거듭하고 있는 문제들을 아주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낸다.

예컨대 시 텍스트 이면에서 시의 의미를 찾는 독법은 종종 배신당하기 일쑤다. 우리가 마주한 시는 종잇장 같은 얇은 언어의 뒷면을 들춰보아도 아무것도 없을 때 당황스러운 독자의 표정을 즐기듯 더욱 얇아지고 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의미 없는 중얼거림의 향연’이라 치부하고 말지만 시의 피부는 이처럼 얇은 막이 겹겹이 쌓여 있는 슬픔과 분노의 형상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또 하나의 실재로서 자유에 종신하는 몸(들)으로 현현한다. ‘살아남음’으로써 쟁취하고자 하는 해방에의 욕망, 그것은 화자 뒤에 숨지 않아도 되는 디스토피아에서는 “당분간은 죽어서는 안 된다고” “23년짜리 연금보험을 들어 놨”다고 “그냥 먹고사는 인생이 될 거”라고 “신신당부”(박참새, 「수지」, ‘정신머리’, 민음사, 2023)하는 장면들을 용인한다. 이처럼 시로써 몸짓하는 분노들은 해소를 위한 행위보다는 잔존을 위한 행위를 통해 지속되고 보전된다. 잔존된 분노는 전면에 나설 수 없지만 괄호 속에 묶여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시간 위에 서서 시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성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끔찍한 진실을 속삭인다, 일상에서는 감시받고 처벌받는 이 분노가 문학세계에서는 군주”(엘렌 식수)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 세계에서 군주는 그러나 결코 스스로를 위시하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분노는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망명국가의 군주처럼 그 반대편에서 쏟아지는 소란을 마주하며 진정한 화해하기와 희망하기의 언어를 기다린다. 쉽게 슬퍼하지도 않고 쉽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다만 뒤에 서 있는 괄호의 존재, 코르푸스(corpus)로서의 다시 몸(들)(상탈 자케)을 전면화할 뿐이다.

2. 만료된 몸(들) - 등 뒤의 트라우마, 그 침묵

“날씨는 화창하고 신경정신과에는 고객이 많았는데 나는 결국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는 이미 만료된 몸(들)의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를 외칠수록 나의 죄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만 / 이곳에서 나가고 싶습니다만//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나의 불면과 나의 환각과 나의 약물 치료조차도 유신 시대를 기준으로/ 식민 지배의 산물로서/ 대한제국을 거쳐 드디어 / 위화도 회군까지

- 이장욱, 「신경정신과에서 살아남기」, '음악집' 부분

정신병원에 갇힌 몸의 속죄가 깊어질수록 병동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몸은 여죄를 찾다가 역사를 거슬러 최초의 ‘배신’ 장면에 당도하게 된다. 여기가 트라우마의 첫 시작일까. 몸은 쉽게 내던져진다. 만석이 된 지하철을 타려고 사람들이 물밀듯 밀고 열차 안으로 들어올 때 무표정으로 감각되는 트라우마. 이런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몸은 감각의 하나이자 감각의 강도를 이해집산한 정동의 하나이다. 현실에 내던져진 몸이 사회적 진실을 감각할 때, 그리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떠올릴 때 작동하는 것은 개개인의 ‘신’이다. 개개인의 ‘신’은 때로는 징크스이며 때로는 오컬트이다. 그런데 이는 모두 자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몸(들)은 신의 종합이자 영매의 종합이 된다. 다시 말해 몸의 감각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신성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몸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시에서 몸의 권위는 이처럼 신이자 신을 받아들이는 영매의 자격으로서 무언가에 의한 이끌림의 타자가 되어 왔다. 그리고 그 이끌림을 통해 바라보게 된 세계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방식으로 제시되는 삶의 문면을 읽는 작업이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뒤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 뒤의 세계.

- 이장욱, 「절규」, ‘내 잠속의 모래산’(민음사, 2002) 부분

이장욱의 시에서 몸(들)은 오래전부터 “등 뒤의 세계”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몸과 “주유소”, “편의점”과 같은 새로운 기표를 무의미하게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몸 사이에 낀 전리품으로 이를 통해 시적 화자는 새로운 시대가 불러일으키는 무기력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지대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뒤돌아보게 된다는 것이고, 또한 뒤돌아보는 행위에 대한 뚜렷한 목적성 없이 이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가늠하지도 못하는 최소화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어떤 ‘이끌림’으로 인해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감각을 무언가로부터 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적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저 로봇처럼, 어쩌면 귀신에 씐 영매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몸은 결국 ‘몸의 사라짐’이 뚜렷해지고 그것과 매개되는 신성(The scared)이 존재하는 장소로 환원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몸이 ‘이끌림’의 장소가 되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아가씨와 맥주와 양념치킨과 모자를 눌러쓴 배달원 그리고/등 뒤에 감춘 것”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우리가 매우 밀접해지는 군요”(「승강기」,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처럼 이 밀접한 이끌림은 친근감이 아닌 불안감에서 파생되는 감정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친절과 호의보다는 불안과 분노를 먼저 배우고 말았다는 것. 따라서 몸은 언제나 비명을 내장하고 “무한한 친구와 무한한 적이 동일”(「식물의 그림자처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한 세상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침묵한다.

그러나 이 침묵은 회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장욱의 시를 살펴보면 ‘그것’이라는 3인칭 단수의 지시대명사가 종종 등장한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믿기 위해서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메커니즘.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관점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미지의 정체에 맞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개인에게 주어진 비극이 결코 사소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과 인간의 대결을 관장하고 마치 숙명처럼 그 관계를 장악하고 있는 신적인 영역에 대해 인간은 유다가 될 수도 있고 메시아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적인 영역을 결정적인 지형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수긍함으로써 일종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나는 이 겨울을 조금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움직이는 만큼만”(「아직 눈사람이 아닌」,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에서 “그것”은 “당근으로 긴 코”를 만들고 “앞니를 뽑고 겨울이 오면 백설기 같은 내장을” 뽑아내고 “심장은 연탄”이며 “다리는 영영 만들어지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는 단순히 보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눈사람을 형상화해놓은 것 같지만 실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오마주한 것이다. “빨간 피는 잘 감추어 두었다”는 고백을 통해 “꿈속에 있”는 “머리”와 분리되어 “굴러가기로” 한 “몸”이 보여주는 현실의 잔혹성은 다만 “소리 없이 쌓여야 하”는 눈을 통해 괄호화된다.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잘 감추고 침묵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조금씩 태어나”(「몽두」, ‘음악집’)는 이상세계에서 몸은 “늙음”과 “젊음”을 진자하면서 “조금씩 잃어가는 시간들”을 “평생 책을 읽어서 드디어 책에 흥미를 잃은” 노인과 그것이 “장래희망”이라 말하는 청년을 통해 가능해지는 몸들의 화해를 목도하고 비로소 회복되는 삶을 희망할 수 있게 된다.

3. 존재감 없는 몸(들) - 관계의 바깥

자기 몸을 하나의 객관적인 존재로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장소로 이해하는 것. 몸이라는 장소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 혹은 어떤 감정을 상기시키는 공간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몸은 자연히 분열을 상상한다. 몸의 다원화는 여러 장소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그것은 비주체 또는 탈주체로 보이는 다주체로서의 언어로 재전유된다. 마침내 몸의 해체라는 방점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개념은 와해된다. 몸의 해체는 성(性)을 지향하지 않는 형태로, 살갗이나 뼈와 같은 개념적인 물성에 반항하는 형태로, 그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함의할 수 있는 다차원의 형태로, 나아가면서 그 자체로 정치적인 형태로 수행된다. 이 과정에서 몸은 사이버 공간, 외계, 신비주의, 그리고 역사를 탐독한다. 몸은 더 이상 가시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투명한 질감이다.

워프는 나를 앞으로 끌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앞에 있다 앞에 있어서 정원은 뒤에 있다/ 돌아가려고 정원을 앞에다가 두었다 워프// 워프는// 철문이다 고풍스럽게 철문이 열고 싶게 생긴 바람에 나는 계속 철문 여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오늘 너무// 앞이다// (중략)// 너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도 누굴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김승일, 「장미정원」,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문학과지성사, 2019) 부분

김승일의 시에 나타난 투명한 몸은 이장욱의 ‘만들어져 가는 몸’과 다른 방면에서 잘 살아남는 법을 제시한다. 예컨대 「장미정원」에서 보여주는 타임워프라는 SF적 요소는 시간의 생리를 어기고 과거와 미래로 통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인간에게 갱생 혹은 미지 탐험이라는 초월적 경험을 선사해준다. 이로써 인간은 상상이 아닌 ‘자기 시간’ 위에서 현실과 과거, 미래를 비교할 수 있는 위치를 점유하게 되고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인식론적 구조의 산물이 된다. 김승일의 시 「장미정원」에서 타임워프는 “워프”로 호명되며 마치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것은 실상 이름 모를 장미정원에 설치되어 있는 “철문”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철문 여는 사람”으로서 “앞”이 될 뿐 되돌아갈 수 없는 비주체적 존재이다. 여기서 계속 앞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미래 이전의 삶의 최초이자 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미정원」에서 주목해야 할 장치는 SF적 요소인 워프가 아닌 ‘워프’로 인해 강제적으로 맨 앞이 되고 마는 존재인 ‘나’의 기구한 숙명이다. 이 순리를 이해하고 있는 ‘나’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그 누군가는 바로 스스로를 이끄는 신성시된 무기명의 존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도 결국 주체는 “워프”라는 대상에 의해 이끌려 다니는 존재에 불과하고 장미정원이라는 이 공간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문을 열고 시간의 ‘맨 앞’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어쩌면 시인의 첫 시집 ‘에듀케이션’(문학과지성사, 2012)의 첫 번째 시 「조합원」을 통과하여 밀고 들어오는 과거의 “징그러움”은 아닐까. 시적 주체에게 “영원한 협력자”이며 한때 “비린내” 나는 “도롱뇽”이 되어 “어딘가 당도하려”했던 친구들은 아닐까. “삼총사라고 알려진 우리 네 명”(「같은 과 친구들」)처럼 부재가 아닌 투명한 몸으로 존재하는 시적 주체의 “유년시절”이 정원을 맴돌고 있는 것은 다만 몸의 투명성이 몸이 없는 경지에서 몸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위한 가설로만 마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몸은 역사적 진실이다. 우리는 불온한 말과 불화의 말이 적층된 가장 몸적이었던 존재로부터 비몸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시인은 시간성을 탈피한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시간 바깥의 시간은 결코 비시간일 수 없는 과거나 미래이며 몸은 불온하지 않았던―불온이 재미가 되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워프를 통과하는 실체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몸이 시로 말하여질 때 시는 어느 순간부터 이미 우리 정신을 결정짓는 하나로 깊숙이 들어와 버린 심장이 된다. “지진계를 좋아해서 펜을 잡았다. 펜은 지진계의 바늘이니까. 펜은 자꾸 떨고 있다. 심장을 통해. 지진계는 여진도 적어두니까. 심장아, 이제 무엇을 쓸까.”(「펜은 심장의 지진계」)처럼 시는 몸을 작동시키면서도 작동을 확인하는 타자가 된다. 시간을 거듭할수록 비일상적이며 비이성적인 언어로 된 슬픔과 분노가 축적된다. 그리고 이 같은 언어의 숲속에서는 “꽃을 말”해도 “꽃 대신 숲이 떠오르고 숲은 젖어 있다 비 맞고 죄 엎드려 있다”(「빗속의 식물」).

이 같은 슬픔의 “밀림”이나 “정원”을 헤매는 투명한 몸은 배제와 소외의 산물이다. 우울의 신자이자 슬픔의 메시아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다소 난처한 얼굴이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듯한 기이한 자세와 행색을 한 그 몸 앞에서 우리는 불편한 기시감을 느낀다. 그런데 비로소 무의식에 깊이 내장되어 있던 자기 슬픔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나는 현재 정상인가요?’라는 질문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이끌려 다시금 다락방 문을 열고 ‘그’를 유년과 함께 봉인해버리기로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제 조금 들춰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이 진정 우리에게 밥을 내어줄 거란 착각을 해도 좋다는 생각. 그 순간부터 우리가 스스로 해방시켜야 할 것은 사회가 아닌 우리 스스로 위장해버린 슬픔과 분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슬픔과 분노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화가 필요하다는 것. 이것은 확실히 다른 차원이다. 어떤 행위를 반복한다는 것은 존재의 정체성을 탑 쌓듯 견고히 하는 것보다는 균열과 불안을 만들고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시간성의 ‘차이’를 통해 인간을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일이다. 김승일의 시는 바로 이처럼 슬픔이 일상이 된 디스토피아에 나타난 균열적 운명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존재감도 없고 중얼거리는 시적 화자로 비칠지 모르나 ‘그들’은 슬픔을 위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본다. 대적할 수 있는 ‘한 개의 호명’이 필요했던 순간에서 그 적(敵)이 이미 스스로 오래 적을 두었던 비일상적 세계로 확장되며 슬픔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악수를 건네는 장소가 마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며 몸을 일으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보는 것을 말이다.

 

4. 히키코모리의 무릎 – 몸(들)의 리트윗

파도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바다는 정체성을 통째로 잃어버린다. 여기 스스로 무릎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한 세대를 본다. 이들에게 인간이라는 형상을 결정짓는 것은 ‘뼈’다. 이것은 어떤 정신적 고양이나 정동과 같은 추상적 세계와는 달리 확실히 구체적이고 뚜렷하지만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는, 과학적 기술이 없었다면 살아 있는 내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것들의 작용이 어떻게 이뤄져 몸들을 움직이게 하는지 그 방법조차 알 수 없는 최초의 신성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통상 ‘몸’이라고 칭해왔던 물성은 어쩌면 ‘뼈’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하얗게 빛나는 뼈가 없으면 ‘몸’은 장소가 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이다.

뼈는 벌써 30년도 더 된 시에서도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있는데, 기형도의 「소리의 뼈」(‘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에서 “김교수님”은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한다. 이것은 속담을 인용한 언어유희이기 때문에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비웃는다. 하지만 ‘김 교수’는 굴하지 않고 이 논의에 대한 강의를 개설한다. 학교의 규정으로 상징되는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은 그러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새로운 기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고집을 보여준다. 이는 학교 교육의 보편성을 충실히 따르는 기존의 교수들과는 이질적인 논리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질문을 발생시키는 이방인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 강의를 통해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와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리의 뼈」는 보편적 행동에서 벗어나는 비일상적 행동을 통해 고정관념이나 일상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환기하면서도, ‘아이들’, ‘학생들’과 같이 기성세대가 아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있는 세대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본질적 관점에서 반복되는 비정상적 시간의 효용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 시에 내장된 뼈의 상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는 학생들의 소회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세계에 위장되어 있는 수많은 죽음의 소음과 학생들이 주파수를 맞추는 데까지 ‘소리의 뼈’라는 불가해한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뼈의 힘은 2020년 이후 다시 새로운 형태로 발견된다.

눈먼 노인이 오래된 서점으로 들어온다// 이곳에 완벽한 지하실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 그곳에서/ 그림 한 점 그려도 되겠소/ 지상에서의 시야가 나를 너무나 괴롭히오 눈이 부셔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소/ 내가 구겨지는 것만 같소// 어둠에 어둠을 더한다고 해서 더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보이는 걸 더 본다고 해서 더 잘 보게 되지 않는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는 말/ 참 참인 말/ 나도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돌아누워도 선명한/ 뼛자국 같은/ 그런 이야기// 틀어진 내 갈비뼈 만지는/ 미래에만 존재하는 나의 동물/ 말한다// 하강하고 있구나// 빛 새지 않는 아래/ 눈 감으면 들려오는/ 땅의 피부결/ 진동한다// 종이를 떠나는 순간 내 손안의 펜 죽는다/ 멈추는 순간 내 마음의 이야기 마른다// 조용히 그린다 요동치는 동공으로/ 끊이지 않는 사과 껍질처럼/ 완성되는 실루엣// 우리/ 눈 마주친다/ 잠에서 깬다

- 박참새, 「이야기서점이야기」, ‘정신머리’전문

박참새의 첫 시집 ‘정신머리’는 신체의 물질성과 추상성이 횬효된 현실세계가 다름 아닌 ‘혼란’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제목이다.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냐?’와 같은 어른들의 꾸지람을 들으며 자라온 세대에게 ‘정신머리’란 가방처럼 잘 챙겨 다녀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또 그들의 또래들에게서는 정신머리를 놓아버리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처럼 여겨지는데, 이 두 개의 관습이 벌려놓은 격차 속에 시인은 “어둠에 어둠을 더한다고 해서 더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이성적인 교량을 마련해두고 있다. 「이야기서점이야기」에서 시적 화자는 “눈먼 노인”의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더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측은지심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는 걸 더 본다고 해서 더 잘 보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시각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 “참 참인 말” 다음으로 이야기서점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이 시적 주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도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돌아누워도 선명한/뼛자국 같은” 이야기를 말이다. 여기서 뼈는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영원성으로 환기되며 ‘나’의 “틀어진 갈비뼈”를 만지게 될 미래의 어느 “동물”을 위한 일종의 증거가 된다. 선사시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의 뼈로부터 거대한 빙하를 추출해내는 것처럼 “멈추는 순간 내 마음의 이야기 마른다”는 언술은 결국 멈추지 않는 쓰기의 ‘반복’을 통해 자신의 뼈를 멀리 있는 미지의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보존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깬다. “눈”을 마주치고 머쓱한 사이, 꿈을 꾼 것 같이 희미해져 버린 이 뉴프런티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곧잘 먹고, 곧잘 입고, 곧잘 살아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언제나 시의 효용보다 앞서는(“그런데 괜찮아요/이렇게 쓰지 않아도//쓰지 않아도 된답니다”(「이렇게 쓰세요」) 이 산문성의 세계가 조직해놓은 합리 속에 엄폐된 불리의 구조성을 우리는 곧잘 이해해야 한다. 불리의 구조성을 비유와 상징으로 전유하며 숙고의 영역을 줄곧 지켜왔던 시는 ‘곧잘’ 생각나지 않는 듯하다. 정말 뉴프런티어에 온 것일까? 실로 우리의 책장엔 시집과 소설집만큼의 비중으로 산문집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곧잘 이야기할 수 있는 형식이 중요해진 시대이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읽은 누군가’들’이 이야기를 전도하고, 그리하여 이야기로 물든 우리에게 중요해진 하나의 ‘물질―혹은 촉감’을 기억한 채 살아가는 이 과정 속에서 시는 마침내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는 있다. 뼈처럼 말이다. 시인은 바로 이런 정체성을 반복하는 존재를 강조한다.

류와 영은 나의 친구다. 류는 사진을 찍고 영은 시를 쓴다. 우리는 약속하지 않고 자주 만나는 사이다 가끔 지나친다. 우리는 담배를 같이 피운다. (중략) 우리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햇빛 아래에서 서 있었다. 갑자기 앉는 류가// 나는 지금 너희 둘을 올려다보고 있어// 그래, 올려다보며 말하는 너의 얼굴이 얼마나 빛났는지 말해 주고 싶다/ 햇빛이 수직으로 우리를 감싼다// (중략)// 내가 제일 무서운 건 가난도 아니고 공중화장실도 아니고 니네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 못 말하고 죽을까 봐 그게 제일로 무섭다

ㄴ 이 트윗 너무 좋아요 대박임……

-박참새, 「사랑의 신-등장인물에게」, ‘정신머리’(민음사, 2023) 부분

자기 주체에 대한 집착에서 빚어진 탈주체로서의 몸은 집 안에 숨어 집이 없다고 부르짖는 위장으로써 삶을 모색한다. 잘 살아간다는 것에 생기를 주는 일도 ‘희망하지 않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작당모의를 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쓸모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어떤 일도 마찬가지로 처음엔 치열하고 의욕이 넘칠 수 있으나 일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은 타인의 관심과 자기의 뚝심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데 이 ‘균형’에 대해 내색하지 않는 어느 정도의 의연함을 터득한 자들만이 포기하지 않는 형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내색하지 않기란 ‘얇은 가면을 쓰고 간판을 칠하는 일’이 아닌가. 이는 어쩌면 철면피를 쓰고 점차로 퉁명해지는 ‘요즘 것들’의 뉘앙스와도 연관이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사랑의 신-등장인물에게」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제일 무서운 건 가난도 아니”라면서 진술하는 사실적 고백에 “이 트윗 너무 좋아요 대박임”이라는 댓글이 가감없이 달리는 데 있다. 지금까지의 일기 같았던 기록은 담화의 문면으로 올려지고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자리를 바꾸는 텍스트의 물리력은 뼈의 위장술이다. “뼛자리만 보며/만지작”(「수면의 신-모래인간에게」)거리는 손으로 “모두를 /조금씩 만지느라/바쁜” “무언의 얼굴”을 통해 개인의 관계를 공동체의 관계로 돌려놓는 이면에 숱한 애도와 기도의 밤이 놓이듯 우리는 개인의 서사를 ‘리트윗’(SNS에서 다른 사람의 게시물을 공유하는 행위)하며 공동체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5. 빈 몸(들)의 위장하는 시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때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근본기분으로 현현한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인해 존재가 흔들리고 균열을 일으키는 미세한 작용들 가운데 습득하게 되는 의심은 역설적으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건너 불안하니까 살아간다는 말은 슬픔과 분노 이후에 무엇이 올지 모르는 자리에 차라리 절망을 가져다 놓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도파민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종의 ‘놓아버림’이 일시적인 안도(감)을 준다는 점에서 더 절망적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장욱·김승일·박참새의 시세계가 보여준 자리는 항상 트라우마의 자리였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몸(들), 그러나 선언과 진술이 사라진 자리에 마치 환청 같은 중얼거림으로 가득 메워진 시는 근본기분으로서의 잠식된 슬픔과 분노를 표상함으로써 운동이 일어난 뒤 괄호로 묶여 있는 부연으로서의 비어 있지 않은 존재―생명을 인식시킨다.

슬픔과 분노를 차라리 신기(神氣)라고 하자. 우리의 주위를 온통 틀어쥐고 앉은 채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하고, 희한하게 이론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몸짓으로 다가와 고분고분 말을 거는 애증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이 감정들에 대한 해석에 덧붙이는 사변일 뿐, 우리가 메타적으로 이해하려 하고 방법의 차원에서 동원하려 들 때 이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으로 위장해버린다. 일시정지된 시간 속에서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 몸들로 숨는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몸은 간신히 현실 앞에 선다. 시를 쓰는 시인과 그 시를 묵독하는 독자 사이에 불청객처럼 엄습해 있는 무수한 괄호들은 이제 ‘시간’ 혹은 ‘역사’라는 것을 상속하기 위해 사용해온 침묵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슬픔과 분노를 숨겨주고 그 안에서 희망이 회복될 때까지 현실을 지연시키는 정당한 방법이다. 잘 살아남는 법이다.

시는 망막 끝에 맺힌 기호로 현현하는 듯하나, 평면이었던 기호를 소화체계에 맞추어 융용시킬수록 쓰디쓴 기분으로 우리를 이끈다. 현상이 아니라 형상으로 존재하는 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어느새 사실보다는 기분에 먼저 도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당당하게 서 있는 이 근본기분으로서의 슬픔과 분노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사해주는가? 근육이라는 위장을 벗고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뼈처럼 서 있는 시. 그 앞에 마주 선 우리는 이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시는 오래도록 인간 지성이 만들어낸 굴지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텍스트 이면에 놓인 수많은 기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와 지성사·철학사적 사유 체계는 인간의 생활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탈영토화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의 지정학적 텍스트성은 오늘날 범언어권 이미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영역이 축소되는 듯했다. 다시 말해 인터넷이라는 장소가 만들어진 이후에 쏟아지는 ‘이미지’로 변환된 수많은 데이터는 텍스트의 이면을 지우고 직관적인 형태의 미학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말초주의적 문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보다 훨씬 더 많은 도파민에 노출되고 시의 비유와 상징은 점점 희박해지고 서사만이 가득찬 텍스트 예술이 성행하고 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을 위시한 여러 텍스트 형태의 예술은 이제 인간이 교묘하게 위장해놓은 세계를 고발하는 ‘쾌감’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시는 여전히 실재한다. 다름 아닌 몸으로 말이다. 인간을 대체할 창작 주체로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현재는 미래에 간단히 요약되어 나열될 것입니다”(김승일, 「절단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료되어 가고 소멸되어 가고 뼈밖에 남지 않은 몸(들)은 이제 자기 내면의 슬픔을 견디는 방법, 사회체계로부터 이방인을 자처한 족속으로 살아감으로써 잔존한 분노를 신성시하는 방법을 아는 까닭이다. 삼엄한 경계를 교란하고 훼손시켜 조그마한 자유라도 탈출시키는 방법을 아는 까닭이다. 우리의 몸(들)은 오래된 슬픔이 아닐 수 없고 분노의 위장하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이토록 중얼거리는 몸적 순간(들)을 안아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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