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본주의 양쪽 경험이 예술적 자산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자
獨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 인터뷰
‘그녀가 그를 향해 말했다. 벌써 문을 닫았네요. 그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커피 한잔할까요? 그녀가 말했다. 네. 그게 전부였다. 모든 것이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 1986년 7월 11일이었다.’
21세기 독일어권의 대표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57)의 소설 ‘카이로스’ 도입부. 열아홉 여성 카타리나와 쉰셋의 유부남 한스가 길에서 만난다. 마치 운명처럼, 둘은 불가항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린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 동베를린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파괴적인 사랑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설렘과 희망으로 시작한 관계는 빠르게 곪아 간다. 실망, 고통, 혐오, 죄책감 등으로 뒤엉켜버린다. 둘의 관계는 동독의 몰락을 거울처럼 비춘다.
2021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 소설이 지난해 영어로 번역·출간되면서 지난 5월 부커상 인터내셔널을 거머쥐었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아름다우면서 불편하고,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라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소설의 내면에는 독일의 정치·역사·문화의 기억이 깔렸다. 그녀가 미래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며 추켜세웠다.
‘카이로스’(한길사) 국내 출간을 계기로 독일 베를린에 사는 에르펜베크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2021년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을 위해 방한한 이후 한국 언론과의 첫 단독 인터뷰다. “베를린의 제 서재에서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보냅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두 연인이 살아가는 사적인 세계와 정치적인 세계 모두 진실과 거짓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두 영역 모두에서 우리는 선한 의도와 나쁜 결과를, 시작할 때의 크나큰 희망과 끝의 깊은 절망을 봅니다. 또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독한 치정(癡情) 소설이자 독일 현대사를 아우르는 ‘박물관’ 같은 역사소설. 거장 에르펜베크는 이를 치밀하게 조응시킨다.
서른 살이 넘는 카타리나와 한스의 나이 차이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지만, 일종의 서사적 장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의 대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분단, 통일…. 다른 세대가 연인으로 만나 독일의 굴곡진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도피성 일탈인 면도 있다. 작가는 “둘의 강렬한 사랑은 정치적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했다.
작품 전반부와 후반부의 변화도 흥미롭다. 동독 엘리트로 그려지는 작가 한스는 사회에 갓 발을 내디딘 카타리나에 대한 압도적인 통제권을 갖는다. 동독 체제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한스는 연애 관계의 주도권을 잃는다. 그는 질투와 열패감에 휩싸여 어린 연인을 가학하는 인물로 바뀐다. 에르펜베크는 “한스는 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권력을 잃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에르펜베크는 작중 인물 카타리나와 나이가 같다. 그도 동독 출신이다. 소설에 묘사된 통일 전후의 혼란을 작가도 몸소 겪었다. “1700만 동독 주민 중 400만명이 불과 2~3년 새 직장을 잃었습니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가족의 예금은 절반으로 줄었고, 부모님 세대는 생존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갑자기 자기 부모를 패배자로 여기게 됐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겪은 경험이 작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이 된다. 그는 “시스템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지는지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두 체제의 장단점을 모두 알게 되면서, 아무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늘 돈에 대해서 이야기할까요? 이리저리 휘둘리는 양떼가 되지 않고 연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에르펜베크는 “격변을 겪고 모든 사회로부터 이방인이 된 것 같다”며 “세상의 변화 가능성은 믿지만, 영원한 행복은 믿지 않게 됐다”고 고백했다. “물론 글을 쓰기에 딱 맞는 위치입니다.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요.”
☞예니 에르펜베크(57)
독일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훔볼트대에서 연극학을 공부하고, 한스 아이슬러 음악학교에서 오페라 연출을 전공했다. 연출가로 활동하다가 1999년 소설 ‘늙은 아이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소설은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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