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단 3점… 고종이 선물한 자개장 미국서 돌아왔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12-06 11:34
- 업데이트 2024-12-06 11:47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이 헐버트 가문이 보유해 온 3층 나전 자개장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장, 본보에 첫 실물 공개
황실서 만든 나전흑칠삼층장
독립위해 헌신 헐버트에 하사
1890~1900년에 만들어진듯
전통과 근대 어우러진 희귀품
보존상태 좋고 면무늬 등 독특
“고종이 외국인에게 선물로 준 나전칠기 자개장 3점 중 하나이니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재작년에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1858∼1902) 후손이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한국으로 돌아온 ‘나전흑칠삼층장(螺鈿黑漆三層欌)’과 양식이 비슷한데, 보존 상태는 더 좋습니다.”(김삼대자 전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부장·전통 목공예 연구가)
“조선조 말에 제작된 나전 자개장으로 남아 있는 게 드문데, 이 작품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전통 양식에 근대 감각의 표현이 더해져 수려합니다.”(이용희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고종이 자신을 돕고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 박사에게 선물로 줬을 개연성이 큰 작품입니다. 희귀성 측면에서도 참 좋은 자료입니다.”(김수정 서울공예박물관장)
세 사람의 전통 공예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우리나라 문화재로 지정받아야 할 작품이라는 것이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헐버트의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아 최근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온 ‘나전흑칠삼층장’에 대해서다. 높이 173㎝, 가로 107㎝, 세로 46㎝의 이 자개장은 미국 뉴욕주의 헐버트 가(家)에 내려온 것이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지난 2일 문화일보에 이 삼층장을 최초 공개하며, “헐버트 박사의 증손자 킴벌(Kimball Hulbert)이 3개월 전 전화를 해 온 것을 계기로 이 작품을 기증받아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미국 은행 케미컬 뱅크 아시아데스크 매니저로 있던 1989년에 헐버트 박사의 손자 리처드 헐버트(Richard Hulbert)를 우연히 만난 이후 헐버트 가와 교우해왔다.
“킴벌은 자신의 어머니(리처드 헐버트의 부인)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게 됐다며 그동안 어머니가 관리해 오던 이 자개장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헐버트 집에서 그걸 보고 아름답다며 감탄한 적이 있는데, 그 집안 것이니 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킴벌이 먼저 물어오니, 조심스럽게 기증 의사를 물었습니다. 소정의 사례를 하고, 운반 비용은 우리 쪽에서 대는 것으로 하겠다고요. 킴벌은 헐버트 후손답게 ‘어떻게 사례비를 받겠냐. 운반비만 부담해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운반비는 우리 문화유산 환수에 관심이 높은 손연호 한글누리 이사장(경동나비엔 회장)이 부담했다는 것이 김 회장 전언이다. 김 회장은 헐버트가 1907년 일제 강압에 의해 한국을 떠날 때 이 자개장도 함께 나갔을 것으로 봤다. 그는 이 작품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통해 김수정 관장과 김삼대자, 이용희 씨 등 권위 있는 전문가들에게 선보였다. 문화일보는 이들 전문가 의견을 각기 들어봤다.
김 관장은 고종이 아펜젤러에게 하사한 작품과 이 자개장의 양식, 크기가 비슷한 점에 주목했다. 고종이 아펜젤러보다 더 돈독했던 헐버트 박사에게 선물로 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 이렇게 작품성이 높은 대형 자개장을 제작할 곳은 황실밖에 없었지요. 그 시기의 3층 자개장이 국내에 남아 있는 게 없었는데, 아펜젤러 가에 이어 헐버트 가의 기증으로 2점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김 관장에 따르면, 고종이 외국인에게 선물한 자개장은 국내외에서 모두 3점이 확인됐다.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 축하 선물로 보낸 ‘흑칠나전이층농’이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은 어느 개인이 1906년 만주에서 구입했다는 3층 자개장을 수집해서 보유하고 있다. 조선조 말기의 대형 나전 자개장이 고종 관련 3점을 포함해 모두 4점 확인된 셈이다.
김 관장은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온 자개장 안에서 발견된 메모지와 관련,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도 있기 때문에 면밀하게 추가 조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헐버트 박사의 아들 윌리엄 헐버트(William Hulbert)의 이름으로 된 메모지엔 영어 필기체로 자개장의 크기와 함께 ‘중국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왕이 헐버트에게 선물했고, 오랜 기간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 있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삼대자 씨는 이 자개장이 189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제작된 통영 나전칠기일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 영향을 받은 192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조 말 나전 장은 희귀하지요. 고종이 외국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지방에서 장인을 찾아 제작을 맡겼는데, 이 작품은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의 할아버지인 엄성봉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측합니다. 당대 제일의 장인이었으니까요.”
이용희 씨는 이 자개장이 아펜젤러 가의 기증품과 양식이 비슷하면서도 면 무늬 등의 독특함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작 시기와 소장 연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작품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목칠공예 보존 전문가인 그는 “보존 상태가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빨리 안정화 처리를 하고 등록 문화재 지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글·사진 =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고종 침전서 불침번… 일제 만행 알리고 조선독립 호소한 밀사
■ 호머 헐버트 박사는 누구
“저는 젊은 시절부터 호머 헐버트 박사의 생애를 연구해왔는데, 알면 알수록 그분의 한국 사랑이 경탄스럽습니다. 동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을 오늘의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버몬트 주 출생인 헐버트(사진)는 만 23세였던 1886년 7월 4일 조선 땅에 첫발을 디뎠다.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교육만이 조선의 살길’이라며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놨고,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함으로써 주시경의 한글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採譜)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는 등 한국인의 정서를 소중히 여겼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헐버트는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1859∼1916) 선교사와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일제의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종이 1903년 중국 상하이의 독일계 은행에 예치했던 내탕금을 일본이 탈취해갔음을 알고 난 후 그걸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소재로 활용된 바 있다.
헐버트는 1905년 11월 고종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일본의 침략주의를 저지해야 한다고 미국 조야에 호소했다. 1907년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돼 각국 원수에게 고종의 밀서 전달을 시도하고, 한국인 특사들을 도와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고발했다.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서재필, 이승만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며 언론 회견, 기고, 강연 등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며 한글, 거북선, 기록문화 등을 이유로 들었다.
1949년 광복절에 우리 정부 초청으로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으나, 1주일 만에 타계했다. 86세 노구로 긴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생전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라고 말한 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모셔져 있다.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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