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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1. 9. 14:22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2번 등재…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죠

병산서원

입력 2025.01.09. 00:50
 
 

최근 KBS 드라마 제작팀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북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건물 일곱 군데에 무단으로 못질을 해 경찰에 고발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제작진은 당초 훼손 현장을 목격하고 항의하는 사람에게 ‘안동시의 허가를 받았으니 괜찮다’고 했는데, 촬영을 허가받았을 뿐 못질까지 허가받은 것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경북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 전경. 병산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도 평가받아요.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말을 듣는 곳입니다. 같은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과 함께 경북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이기도 하죠. ‘병산’은 근처 산의 이름에서 딴 것인데 이름처럼 병풍과도 같이 서원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한국 서원 중 최고의 건물, 병산서원

“그것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 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에서도 최고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병산서원을 이렇게 극찬한 뒤 “주변의 경관(자연이나 지역의 풍경)을 배경으로 해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고 했어요.

그런 병산서원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는 대표적 건물이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된 만대루(晩對樓)입니다. 이번에 KBS 드라마 제작팀이 못질한 7곳 중 6곳이 만대루에 있죠. 정면 7칸(1칸은 약 2.45m), 측면 2칸 규모의 누각으로 200명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루가 있는 공간이에요.

KBS 드라마 제작팀이 촬영 소품 설치를 위해 만대루 나무 기둥에 못질을 한 흔적(붉은 원 안). 너비 2~3㎜, 깊이 1㎝가량의 못 자국이 생겼다고 해요. /연합뉴스

 

만대루는 서원에서 중정(가운데 마당)이 갖는 기능을 누마루가 갖도록 지어졌다고 합니다. 건물도 시원하게 잘 지어졌지만, 여기서 앞을 내다보면 백사장 너머 병산의 그림자가 어리는 초록빛 낙동강이 눈에 들어옵니다. 만대루로 올라가는 통나무 계단 역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내죠.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대표적 서원

그런데 병산서원은 언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만든 건물일까요? 먼저 ‘서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조선 시대에 선비가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던 곳’이에요. 1543년(중종 38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고려 학자 안향을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일)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지금의 경북 영주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입니다.

병산서원의 중심 건물인 '만대루'의 누마루예요. 2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어요. 여기 서서 낙동강을 감상할 수 있답니다. /창비

 

이후 서원 건립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원래 안동 풍산읍에는 고려 시대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던 풍악서당이 있었어요. 이것을 1575년(선조 8년) 안동 풍천면으로 이전했습니다. 이때 풍악서당을 옮긴 사람이 바로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었어요. 이후 풍악서당은 ‘병산서원’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1613년(광해군 5년) 류성룡의 제자들이 그를 모신 사당인 ‘존덕사’를 병산서원에 지었습니다. 병산서원에는 1863년(철종 14년) 사액(賜額)이 이뤄졌습니다. ‘사액’은 임금이 서원이나 사당, 누문 같은 곳에 이름을 지어서 액자를 내리는 것, 또는 그 액자를 말합니다. 사액이 이뤄지면 서원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이죠. 병산서원은 지방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고 여러 학자를 배출했습니다.

조선 말로 갈수록 여러 서원이 백성을 괴롭히는 등 폐단이 커지자 흥선대원군은 1868년(고종 5년)부터 1871년까지 ‘서원 철폐’를 단행해 전국 600여 서원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병산서원은 멀쩡히 살아남았습니다. 그만큼 권위 있는 서원이었다는 얘기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된 드문 사례이기도 한데요. 2010년 하회마을에 포함돼 ‘한국의 역사 마을’로, 2019년엔 도산서원·소수서원 등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됐습니다.

국보가 된 책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

앞에서 본 것처럼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배향 인물 역시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입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영의정을 지내 ‘국난 극복의 명재상’이라 불린 인물입니다.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정치적으로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 남인의 영수(우두머리)였으며, 1590년(선조 23년) 우의정에 오른 뒤 이듬해인 1591년 좌의정이 됐습니다.

서애 류성룡의 국가표준영정. 병산서원은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전통 문화 포털

 

임진왜란 바로 한 해 전인 이 시점에 그가 조정에 천거한 두 인물이 누군지 알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바로 이순신과 권율이었으니까요. 아직 종6품이었던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시킨 ‘이순신의 후원자’가 류성룡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돼 군무를 총괄했고 영의정에 올라 선조 임금이 피란할 때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군을 지휘해 반격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가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다방면에 걸쳐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을 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조선에 불리한 강화 협정 움직임이 보이자 이를 반대했고, 군대 양성, 무기 제작, 성곽 개축에도 힘썼습니다. 새로운 군영인 훈련도감의 창설이라는 결실도 보게 됐습니다. 전란 중 굶주리는 백성을 위한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였죠.

그러나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북인 세력의 정치적 공격으로 영의정 자리를 내놓고 낙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영국 총리로서 전란 극복에 힘쓰다 종전 직전 총선에서 패해 물러난 윈스턴 처칠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엔 임진왜란의 상황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조정 관료들이 전란을 막지 못한 실책을 반성한 책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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