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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히고 떠돈지 113년… 깎이고 부서진 뒤에야… 탑의 귀향이 허락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10. 15:47

뽑히고 떠돈지 113년… 깎이고 부서진 뒤에야… 탑의 귀향이 허락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12-05 09:36
  • 업데이트 2024-12-05 14:08

강원 원주 부론면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안에 세워진 지광국사탑. 창으로 환한 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자리에 11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탑이 서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애처로워 더 마음가는 남한강변 ‘폐사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일제때 무단반출 뒤 9곳 전전
거북이 등으로 짊어진 탑비
비누 다루듯 조각한 솜씨 압권

비워진 아름다움 절정 거돈사지
중앙엔 잘 생긴 삼층석탑 우뚝

이제야 발굴 시작한 흥법사지
탑비는 대장간서 쓰다 산산조각

고려 3대 사찰 여주 고달사지
용이 친친 감은 승탑 화려해

가는 길이 예쁜 충주 청룡사지
강변·오솔길 초록융단 깔린 듯해

원주·여주·충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망한 절집의 옛터를 ‘폐사지(廢寺址)’라 부른다. 무너지고 흩어져서 빈터가 된 곳. 시간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건 무너진 탑, 혹은 몇 개의 주춧돌로 남은 폐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곳에는 버려져 허물어졌거나 불타고 남은 것들이 있다. 흔적을 통해 사라진 것을 보는 자리. 옛 절터에서 긴 침묵으로 단단하게 완성된 ‘아름다운 폐허’를 본다. 무릇 모든 여행에는 가장 좋은 때가 있다. 신록이 어울리는 여행도 있고, 눈 쌓인 겨울에 더 운치 있는 여행도 있다. 그렇다면 폐사지 여행에 딱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다. 초겨울이 폐사지의 스산하고,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때다. 무성한 숲이 빈터를 가리지 않고, 초록의 들판이 눈길을 빼앗지 않는다. 욕심낼 것도, 그래서 기대할 것도 별로 없다. 좀 심심하다 해도 그다지 실망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폐사지의 조용한 공간을 보는 눈은, 이런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 발 없는 탑이 1975㎞를 떠돌다

1975㎞. 우여곡절 끝에 강원 원주 부론면의 옛 절터 법천사지로 돌아온 ‘지광국사탑’이 유랑했던 거리(距離)가 그만큼이라고 했다. 뿌리 뽑혀 112년을 떠돌다가 이제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떠돈 거리도 그렇지만, 입이 벌어지게 하는 건 시간이다. 탑이 세워진 건 지금으로부터 939년 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건 지난달이다.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1000년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 탑을, 지금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은 볕이 잘 드는 남향이다. 3면을 유리로 마감해 가장 환한 볕이 들어오는 자리에 탑을 세워놓았다. 유적전시관 공간은 편안하고 나른하다. ‘시련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푹 자고 맞이한 포근한 아침’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막 세수한 듯한 돌의 색감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환한 볕, 창에 길게 드리워진 순백의 블라인드, 여기다 화려한 손뜨개 레이스처럼 보이는 전시장 벽화까지 그런 느낌을 준다.

지광국사탑을 ‘석조예술의 걸작’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런 진부한 수사(修辭)로는 탑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다. 백 마디 말 대신, 가서 봐야 느낄 수 있다. 탑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순탄찮은 이력을 다 빼고도 그냥 미감만으로도 탑은 입이 딱 벌어진다. 불상과 봉황, 신선, 가릉빈가…. 온갖 화려한 장식과 무늬가 탑 전체를 채웠다. 네 귀퉁이 바닥에 땅을 움켜쥔 용의 발톱 형상을 둔 것도, 몸돌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사자상도, 지붕돌 처마와 상층 기단에 새긴 커튼 같은 장막도 화려하다. 식민 지배국가 변방의 아름다운 유물은 어쩌면 저주였을까. 지광국사탑이 일제강점기에 무단반출돼 이후에 아홉 곳을 전전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던 것도, 실은 이런 ‘비범한 아름다움’ 때문이었으니….

# 지광국사탑이 팔려나간 사연

지광국사탑을 세운 얘기와 탑이 겪은 긴 유랑을 더 말해보자. 지광국사탑은 고려 때 승려 지광국사 해린을 기리기 위해 사리와 유골을 봉안해 세운 탑이다. 1000년 전의 인물 해린은 왕의 스승이자 나라의 스승, 그러니까 ‘왕사(王師)’이자 ‘국사(國師)’였다. 984년에 나서 1070년에 죽었다. 탑은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1085년에 세워졌다. 왜 15년이나 걸렸을까. 탑의 화려한 장식과 정교한 조각을 보면, 거기 깃들어 있는 시간과 정성이 보인다. 이 정도면 한두 해에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더불어 모든 이의 스승이었던 해린의 죽음도 오래 기려졌을 것이었다.

지광국사탑의 유랑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 풍상 속에서도 1000년을 서 있던 석탑이 식민지 시절 일본인 골동품상에 의해 무단반출됐다. 한 일본인 기업가의 손으로 넘어간 탑은 서울 명동의 한 병원에 정원석처럼 세워졌다가 일본 오사카(大阪)로 팔려나갔다. 불법적 약탈 사실이 문제가 되면서 탑은 4년 만에 고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고향 땅으로는 오지 못했다. 기증 형태로 탑을 돌려받은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던 경복궁 박람회장 한가운데에 이 탑을 자랑스럽게 세웠다. 역사를 공유할 수 없었던 일본인에게는, 이 탑은 그저 장식품이었을 따름이다. 탑은 그 뒤로도 여러 번 더 옮겨 다녔다.

지광국사탑은 6·25전쟁 때 포탄을 맞기까지 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작전의 와중이었다. 박격포탄을 맞아 탑신석과 옥개석을 비롯한 탑 윗부분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걸 다 세 보았을까. ‘부서진 조각이 1만2000개’라는 기록이 있으니 가루가 된 셈이었다. 부서진 탑은 1957년 시멘트와 모래를 이겨 바르는 땜질식 복구로 다시 세워지긴 했으나, 이런 복구가 오래갈 리 없었다. 탑의 표면은 부식됐고 장식조각은 떨어져 나갔다.

지광국사탑은 일찌감치 국보로 지정됐지만, 2005년 용산국립박물관 개관으로 모든 유물이 그곳으로 다 옮겨갔을 때 따라가지 못했다. 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훼손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6년 탑을 대전으로 옮겨가 전면해체 수리에 들어갔다. 진작부터 문화재 환수를 요구해 온 원주시민들은, 해체 수리를 계기로 ‘지광국사탑을 제자리로 돌려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해에 걸친 긴 논쟁 끝에 귀향이 결정됐다. 허물어지고 쓰러지고 나서야 탑의 귀향이 허락된 셈이었다. 다만, 보수된 탑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있던 자리’가 아니라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113년 만에 법천사 유적전시관으로 돌아온 지광국사탑의 사연이다.

# 남한강 일대의 승탑이 화려한 까닭

지광국사탑 앞에서 드는 의문 하나. 부처님 사리탑도 아닌 스님의 탑과 탑비가 왜 이렇게 화려할까. 이유가 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선종(禪宗)이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난해한 불교 교리를 배우고 익혀야 성불할 수 있다’는 교종(敎宗)이 득세했다. 가진 자들의 논리. 귀족만이 부처가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에 맞서 선종은 ‘누구나 참선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부패한 귀족에 불만을 가졌던 지방의 호족과 평민들은 열광했다. 자신들도 얼마든지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었으니까.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절을 자주 드나들었고, 호족들은 언제 부처가 될지 모르는 뛰어난 고승과 그들이 머문 사찰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 무렵에 불상이나 불탑 대신, 승탑과 탑비에 불교계의 최고 공력이 집중되면서 걸작들이 연거푸 쏟아져 나왔다. 봇물 터지듯 나온 걸작 중에서 가장 높은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었다.

어디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탑뿐일까. 남한강을 끼고 있는 원주와 경기 여주, 충북 충주 일대에는 비슷한 시기에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 줄줄이 나왔고 그들이 전성기를 누렸던 옛 절터가 있다. 그곳에 미감 넘치는 승탑과 비석이 앞다퉈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폐사지를 건너다니며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원주의 법천사지와 함께 거돈사지, 흥법사지, 여주의 고달사지, 충주의 청룡사지까지 일대 폐사지를 한 줄로 이으면 흥미진진한 ‘폐사지 여행’이 된다.

지광국사탑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다른 폐사지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물들이 적잖다. 폐사지를 일상의 눈으로 읽으면 허망하고 쓸쓸하다. 너무 쓸쓸해서 ‘부재(不在)’가 더 사무친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무너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곳에는 한때 충만했던 마음이 있었다. 빈 절터에 낙엽처럼 쌓인 쓸쓸함 위를 걷다 문득 궁금해졌다. 두 손 모은 기도는 고난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법. 이곳에 쌓인 눈물과 한숨은 과연 기도로 평안해졌을까.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의 귀부(龜趺). 귀부란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을 말한다. 단단한 돌을 마치 비누 조각하듯 정교하게 새긴 솜씨가 1000년 전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 탑보다 더 눈부신 비석 이야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법천사는 신라 말부터 고려까지 이 지역을 대표한 거대한 절집이었다. 네 번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자그마치 47동(棟)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전남 순천의 내로라하는 절집 송광사 경내 건물이 50개쯤이니 그와 비슷하다. ‘법(法·진리)이 샘물(泉)처럼 솟는다’는 이름에 걸맞은 규모다.

법천사는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명맥을 이었다. 적어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말이다. 내로라하는 거대한 절이 사라져버린 사실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여행기로 확인된다. 허균은 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동안 머물렀다는 지관 스님으로부터 절 얘기를 들었다. 스님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 허균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법천사에 가보고 싶어졌다. ‘유흥(遊興)이 솟아난’ 그는 스님을 앞세워서 새벽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허균이 도착했을 때는 절집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허균의 기행문에 그 허망함을 얘기한 대목이 있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다만 빈터와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법천사에는 지광국사탑 말고 탑비도 있다. 지광국사 해린의 행적을 검은색 점판암에 적은 비석인데, 돌아온 탑과 짝을 이루는 유물이다. 귀향에 대한 감회 때문에 탑에 먼저 눈이 가긴 하지만, 1000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는 탑을 능가하는 걸작이다.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의 조형미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빗돌에 새긴 능수능란한 조각 솜씨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빗돌을 무른 비누처럼 자유자재로 깎았다.

# 탑만 가져가고 탑비는 남겨둔 까닭

그런데 왜 일본인은 탑만 가져가고 탑비는 남겨뒀을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 골동품상이 지광국사탑을 실어 내가면서 탑비도 함께 가져가려 했으나 탑비의 조각이 워낙 섬세하고 자칫 파손할 우려가 있어 뜻을 접었다는 것. 확인된 얘기는 아니지만, 탑비를 찬찬히 보고 나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탑비의 비석 양쪽 모서리에 돋을새김한, 여의주를 물고 구름 속을 나는 두 마리 용(龍)은 신기에 가깝다. 1000년 전에 새긴 것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비늘 하나하나까지 선명하다. 비석 위쪽에다 그린 도솔천의 모습은 더 압권이다. 미래 세상에 도래한다는 미륵이 그 아래서 설법한다는 나무, 용화수(龍華樹)를 비롯해 9개의 바다와 8개의 산, 세 발 달린 새 삼족오, 보름달 속 토끼를 도솔천 안에다 새겨넣었다.

탑비에 조각한 세밀한 묘사는 육안으로는 잘 안 보인다. 비석 높이가 5.5m에 달하는 데다 빗돌이 검은색이어서 그림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적전시관에 상주하는 해설사에게 탑비의 탁본을 보여달라 청해보자. 탑비를 먹으로 찍어 낸 탁본이 보여주는 건 ‘용화세상’의 화려한 꿈이다.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내부의 한쪽 벽면이 탁본 속 그림으로 채워졌다.

       거돈사지의 원공국사탑비. 고려 현종 때의 왕사(王師·왕의 스승)를 지낸 고승 지종을 기리는 탑비다.



# 비워진 아름다움의 절정…거돈사지

법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돈사지가 있다. 거돈사지는 폐사지 가운데 ‘비워진 아름다움’이 가장 빛나는 곳이다. 거돈사지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주춧돌을 단서로, 절집의 빈터에 석축을 쌓아 오래전에 사라진 절집 건물을 구획해놓았다. 그 구획을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절을 지어볼 수 있다. 자취는 분명하다. 여기에 금당이, 저기에는 회랑이 있었으리라.

거돈사지의 중심에는 잘생긴 삼층석탑이 서 있다. 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작은 석탑 하나로 빈 공간이 꽉 채워진 느낌이 드는 건 적절한 비례와 조화에 힘입은 것이리라. 탑 뒤쪽의 금당 구역에는 본존불이 앉은 대좌로 쓰였던 큰 돌이 있다. 저만한 대좌 위에 앉은 부처라면, 그 크기도 자못 당당했을 터. 부처를 모신 법당이 2층 혹은 3층의 웅장한 목탑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거돈사지 한쪽에는 원공국사탑비가 있다. 고려 현종 때 왕사를 지낸 원공 지종을 기리는 탑비다. 말년에 그는 이곳 거돈사지로 와서 머물다가 입적했다. 그의 탑비가 이곳에 서게 된 이유다.

# 선종(禪宗)의 숲이 공산(空山)이 되더라도…

원공국사 탑비는 미감이나 돌을 새긴 솜씨는 법천사지 탑비에 한참 모자란다는 평가다. 하지만 원공국사 탑비에 새긴 문장만큼은 눈길을 붙잡는다. 원공국사의 이력을 장황하게 나열하고서 덧붙여 놓은 비석의 명(銘)은 이렇게 끝맺는다.

“…/ 멸(滅)할 것이 아니건만 멸하여 지고 / 종말이 없건만 종말이 있네 / 교종(敎宗)은 쇠잔해 멸망에 가깝고 / 선종(禪宗)의 숲은 말라 공산(空山)이 되고 / 귀비(龜碑)가 파손되어 없어질지라도 / 이 탑만은 영원히 남아있어 /…/ 스님의 높은 바람 널리 퍼지소서.”

원공국사 탑비는 법천사지 탑비보다 60년 먼저 세워졌다. 탑비를 세운 해는 1025년. 내년이 꼭 1000년이 되는 해다. 탑비가 ‘영원히 남을 것’을 기원한 비석의 글은, 고려 문종 때 대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린 최충이 썼다. 원공국사의 승탑은 법천사지 탑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의해 무단반출돼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1000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가 글로 남긴 기원처럼 ‘영원히 남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파손돼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던 탑비는, 아직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사이에는 오솔길이 있었다. 폐사지 기행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길이어서 아는 이들만 아껴 걷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사라졌다. 잘려나간 길 위에서 골프 코스 건설이 한창이다. 두 폐사지를 골프장이 가로막아서는 바람에 두 폐사지를 걸어서 건너다닐 수 없게 됐다.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흥법사지의 진공대사탑비. 굵고 힘찬 선으로 거북 형상과 용을 새겼다.



# 흥법사지 탑비가 대장간에 간 까닭은

남한강변의 폐사지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흥법사지다. 흥법사지는 남한강과 합류하기 직전의 섬강변의 밭 한가운데 있다. 이곳은 사유지여서 그동안 발굴이 이뤄지지 않다가 이제야 원주시가 매입해 막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이곳에는 국보 하나와 보물 세 점이 있었는데, 국보와 보물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갔고, 보물 두 점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탑비와 3층 석탑이다.

흥법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종교적 공간이었으되 다분히 ‘정치적’인 절이었다는 얘기다. 전쟁에서 승자 편을 들었던 사찰이었으니 승전 이후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까. 고려 태조로 등극한 왕건은 자기가 스승으로 삼았던 진공대사를 흥법사에 내려보냈다. 그 진공대사가 흥법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세워진 것이 바로 진공대사탑비다.

비석은 사라지고 거북받침돌과 비석 머리만 남은 탑인데, 비석 머리에 깊게 새긴 여덟 마리 용의 입체감이 인상적이다.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의 기운이 보통이 아니다. 없어진 비석의 글씨는 더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비문을 읽은 옛 선비들은 ‘(글의) 기운이 형상을 삼켰으니 천하의 보배’라고 찬탄했다.

옛 기록에 남아 있는, 비석이 사라진 사연이 이렇다. 탑비 비문의 글씨가 명필이라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앞다퉈 탁본을 뜨러 중앙의 선비들이 몰려들어서, 이것저것 접대를 요구했던 모양인데, 지방의 관료들은 그게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던 모양. 지방의 수령이 아예 비석을 뽑아다가 관청 안에 뒀는데, 그걸 대장간에서 모르고 모루로 쓰는 바람에 조각이 났다는 얘기다.

# 고달사지에서 승탑을 보는 순서

법천사지와 흥법사지, 그리고 거돈사지. 이렇게 원주의 폐사지 세 곳에다가 폐사지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여주의 고달사지와 충주의 청룡사지를 끼워 넣는다. 여주 고달사지의 주연은 두 개의 승탑이다. 이곳의 승탑은 흔히 부도라 부르는, 요즘도 절집에서 흔히 보는 팔각원당형의 형태. 그런데 돌을 깎아 새긴 솜씨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돋을새김으로 쪼아 만든 장식은 화려하면서도 장엄하다.

절터 뒤편의 언덕 아래에는 원종대사 승탑이 있고, 그 옆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고달사지 승탑이 있다. 아래에 있는 것이 28년 동안 고달사에 머물면서 고려의 3대 사찰로 키워냈다는 고려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는 승탑이다. 위쪽의 승탑은 탑비가 사라져서 누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보물인 원종대사 승탑보다 더 귀하게 치는 ‘국보’다. 고달사지에서 천만다행인 건 동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아래쪽 승탑부터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승탑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위쪽 고달사지 승탑 앞에 서면 아예 말을 잊게 된다.

고달사지 승탑은 화려하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이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나 비천상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습까지 새겼다. 무엇보다 특별해 보이는 건 승탑 아랫부분에 부조의 형태로 깎아놓은 용 머리다. 승탑을 친친 감은 용이, 마주 선 사람에게 정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상이다. 이걸 보고 나면 언덕 아래 원종대사 승탑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원종대사 승탑 먼저, 고달사지 승탑은 나중에 봐야 한다는 얘기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폐사지 여행에서 초겨울의 강변 풍경은 훌륭한 부록이다. 충북 충주 청룡사지에서 나오는 길에서 만난 물억새 만발한 여우섬 일대의 모습.



충주의 청룡사지는 아직 발굴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네 곳의 폐사지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해서 발길이 뜸하다. 빈 절터는 청계산 아래 들머리쯤에 있는데 숲 속에 있어서 절터라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이곳에는 국보인 보각국사탑과 보물인 탑비, 사자석등 등이 남아 있다. 굵게 돋을새김한 구름과 용의 질감이 돋보이는 보각국사탑은 국보의 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청룡사지를 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거기까지 가는 길’ 때문이기도 하다. 청룡사지를 찾아가는 강변길에서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과 함께 억새꽃 눈부시게 피어난 여우섬과 비내섬을 건너다볼 수 있다. 청룡사지로 오르는 짧은 오솔길도 좋다. 깔아놓은 야자 매트에 온통 이끼가 자라서 마치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 북카페가 되려다 만 공간

거돈사지 앞에는 폐교된 정산분교에 차린 ‘거돈사지 유적센터’가 있다. 절터에서 발굴된 유적과 함께 이런저런 설명을 전시해 놓은 곳인데, 교실을 개조한 북카페도 있다. 준비만 하다가 손님이 없어 개업이 유야무야됐다는데, 당시 모아놓은 문화재나 역사 관련 책이 제법 많다. 커피를 팔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놓아둔 책상에서 누구든 자유롭게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느긋한 여정이라면 쉬어가기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