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상복 두고 싸운 '소모적 정쟁'일까… 조선 정치철학 논쟁이기도
예송 논쟁
정치권에서 국정과 별 상관없는 문제를 둘러싸고 치고받는 싸움을 할 때마다 언론에서 나오곤 하는 말이 있죠. “21세기판 ‘예송(禮訟) 논쟁’이다!”
국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송 논쟁이나 하고 있느냐는 말부터, 사실 예송 논쟁은 예법 문제를 빌미로 벌인 당파 간의 지배권 싸움이라는 해석까지 여러 말들이 나옵니다. 모두 예송 논쟁이 ‘민생과 무관하게 쓸데없는 걸 가지고 벌였던 정쟁’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그랬을까요? 아니, 예송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18대 임금이 누군지 아세요?
잠깐 퀴즈 하나 내 볼게요. 조선 왕조엔 초대 태조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모두 27명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드라마에 가장 적게 등장한 임금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18대 왕 현종(재위 1659~1674)일 겁니다. 효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아버지로, 재위 기간이 그렇게 짧지도 않은데 인지도 자체가 낮습니다. 오히려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 현종, 양귀비의 남편이었던 당나라 현종이 더 유명하죠. 조승우가 수의사 역으로 주연을 맡았던 ‘마의’가 현종 시대를 다룬 매우 예외적인 드라마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추측건대 현종 때 일어난 두 가지 큰 사건이 모두 극으로 만들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는 ‘경신 대기근’입니다. 경술년인 1670년에서 신해년인 1671년까지 이어진 이 대기근은 세계적인 ‘소(小)빙하기’라 불리는 시기에 발생했어요. 이상 기후의 여파로 전염병이 돌고 식량난이 발생하며 조선 전역에서 약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예송 논쟁이었습니다. ‘예송’의 ‘송(訟)’ 자엔 ‘다투다’ ‘논쟁하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실 ‘예송 논쟁’은 동어반복이 됩니다. 하도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내용이라 드라마에서 제대로 다룬다면 시청률이 뚝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도 있어요.
둘째 아들인 임금이 승하하면 무슨 상복을 입나?
예송의 시작은 1659년 효종이 승하(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죽음)하면서였어요.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왕비 인열왕후가 죽자 장렬왕후를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가서 맞은 아내)로 삼았는데,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시집간 장렬왕후는 의붓아들인 효종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습니다. 인조의 장남은 인열왕후가 낳은 소현세자였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인열왕후의 차남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죠. 그런데 효종이 죽자 문제가 생겼던 겁니다.
‘효종의 계모 장렬왕후는 과연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 건가?’
아뿔싸, 이게 논쟁거리가 됐던 건, 조선 성종 때 마련된 공식 예법서 ‘국조오례의’에 이 경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허목 등 남인은 장남에 대한 예로서 3년 기간의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은 중자(衆子·장남이 아닌 아들)에 대한 예로서 1년 기간의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국통(임금의 혈통)을 이은 장남이 된 것”이라 해석했으나, 서인은 “왕이 됐어도 차남은 차남”이라고 맞섰습니다. 이것이 제1차 예송 또는 기해예송이라 하는 논쟁으로 일단 서인 측의 승리로 끝났죠. 그런데 사실 서인의 주장에는 ‘현 임금인 현종은 인조의 차남인 효종의 아들이므로 정통 혈통이 아니다’라는 위험한 논리가 숨어 있었던 셈이고, 이 점을 건드린 사람이 남인이자 ‘어부사시사’의 작가로 유명한 윤선도였으나 서인의 역공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1674년(현종 15년) 갑인예송이라 불리는 제2차 예송이 일어납니다. 효종의 왕비(현 임금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시어머니(현 임금의 할머니) 장렬왕후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시열 등 서인은 “‘주자가례’에 따라 차남인 효종의 왕비이므로 대왕대비(장렬왕후)는 9개월 입는 상복인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과 일부 서인 세력은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장자부(큰며느리)든 차자부(둘째 며느리)든 모두 1년 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번 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기울었고, 남인은 숙종 초까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불필요하고 공허한 논쟁이었을까
지금까지 예송의 전개 과정을 보면 민생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허망한 명분 싸움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작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는 걸로 물고 뜯으며 허송세월하니 조선이 망했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조선 왕조 멸망은 제2차 예송 236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옷을 입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왕위 계승의 정통성, 그리고 예법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에 초점을 둔 논쟁이었습니다. ‘나라와 사회에서 어떤 가치관을 우위에 놓아야 하는가’ ‘왕가의 예법이 일반 사대부와 같은가 다른가’ ‘예법이 같다면 조선은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인가’란 무거운 주제를 두고 벌인 철학적·정치학적 논쟁이기도 했습니다.
임금인 현종은 자신의 정통성 부족을 암시한 주장을 펼치는 신하들 앞에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해결된 정쟁이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18세기 유럽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숱한 인명이 살상된 것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당시의 ‘예법’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중차대한 가치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고(故)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예송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존폐와 직결되는 중대사였고, 생명을 걸고라도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미래 후손들이 ‘그깟 민주주의가 뭐라고 20세기 조상들은 그렇게 애써 투쟁을 했을까’ 한다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했습니다. 최소한 예송이라는 정쟁은 그래도 정치인들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본 기사의 예송논쟁이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반 백성들의 민생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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