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에 나오는 꽃들
[김민철의 꽃이야기]
<223회>
<그는 화단에 가까이 서더니 개나리꽃 줄기를 따다가 자기 셔츠 앞주머니에 꽂았다. (중략) 별것도 아닌 걸로 토라진 나는 그와 세발짝쯤 떨어져 걸었다. 그는 다가와 자기 앞주머니의 개나리를 내 귀에 슬쩍 꽂아놓고는 아이폰으로 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진을 보는 척하며 장난으로 그를 안았고, 그는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상심하다가 귀여워하다가 짜증이 나다가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했다.>
박상영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랑싸움 하는 듯한 두 사람은 남녀가 아니라 남남 커플이다.
◇개나리꽃으로 사랑싸움하는 두 남자
이 소설집엔 모두 4편의 중·단편이 나오는데 화자가 동일하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암 투병 중인 엄마를 간병하면서 지내는 화자 ‘영’은 5년 전 사귄 형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화자에게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학생운동을 한 과거에 사로잡힌 채 화자가 미국을 좋아한다며 꾸짖고 자신이 게이임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했다. 위 인용문도 화자가 공원에서 애정 표현을 하자 사람들이 볼까봐 질색하는 장면이다.
소설에서 엄마는 ‘40년차 기독교인’이다. 엄마는 화자가 고1때 놀이터에서 두살 위 형과 키스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 과정에서 의사가 내린 결론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엄마의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라는 것이었지만 엄마는 아직도 그때 아들을 잘 보살펴주지(치료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화자는 그 일에 대해 꼭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만, 말기 암환자여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소설은 동성애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고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라는 생각을 반복해 드러내고 있다. 또 ‘언제나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꽃배추가 그걸 드러내는 소재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엄마는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화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 이런 게 있네. 엄마가 허리를 숙이고 주의 깊게 보는 건 꽃배추였다. 생긴 건 배추 모양인데 보라색이며 붉은빛을 띠는 게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중략. 엄마가 대학 떨어지고 처음 본 게 꽃배추여서 엄청 싫어했다는 내용)
-그 시절에도 꽃배추가 있었구나.
-있지. 요즘 있는 건 그때도 다 있었지.
나는 언제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부축해 병원으로 돌아갔다.>
이 소설집은 2021년 신동엽문학상을 받았고, 2022년엔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후보, 2023년엔 국제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 소설이 동성애 관련 얘기 말고도 끝없이 자기소개서를 쓰는 청년의 일상, 말기암 엄마와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특히 멀어지고 싶은 엄마와 화자인 ‘나’가 자꾸 겹치지는 것을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어릴 적) 너를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라는 엄마와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라는 화자 마음이 겹치고 있다.
◇겨울 화단의 퀸, 꽃양배추
소설집 맨 앞에 있는 단편 ‘재희’는 게이 남성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대학 동기 재희라는 여성과 동거하는 독특한 이야기다. 두 사람이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다보면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X같다는 것’에,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상영 중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 단편 ‘재희’를 중심으로 만든 영화였다. 재희 역할을 맡은 김고은 등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인지 영화가 재미있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잘 드러나 있었다. 박상영이 극본을 써서 8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티빙에서 상영하고 있다.
재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아님 말고’다. 결혼도 ‘하자고 하니까 한번 해보는 거’고 ‘아님 말고’다. 단편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주인공의 상대남인 규호가 자주 하는 ‘그러거나 말거나’와 비슷한 말이다.
소설에 나오는 꽃양배추는 늦가을이면 도심 화단에 어김없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식물이다. 알록달록한 잎이 꽃처럼 보여 꽃이 없는 겨울에 꽃을 대신한다. 잎의 색은 진분홍색, 분홍색, 적색, 유백색 등 다양한데 온도가 낮아지면서 색깔이 나타난다고 한다. 꽃배추라고도 하는데,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꽃양배추로 올라 있다.
꽃양배추 학명은 ‘Brassica oleracea L. var. sabellica L.’이다. 양배추와 속명·종소명은 같고 ‘var’이라는 표시가 있는 것은 양배추의 변종으로 취급한다는 표시다. 속명인 브라시카(Brassica)는 우리말로 ‘배추속’이다.
꽃양배추는 다른 일년초보다 추위를 잘 견딘다. 그러나 내한성이 강할 뿐 생육에 적당한 온도는 10~20도라고 한다. 5도 이하에서는 생육이 멈추고 영하 10도 이하에서는 동해(凍害)를 입는다. 꽃양배추에 대한 글을 보면 ‘영하의 날씨에도 얼지 않는 게 신기하다’, ‘추위에도 끄떡없는 식물’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겨울에 길거리 꽃을 대표하는 식물이라 추위를 견디는 특별한 비법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그런 비법은 없는 것 같았다.
꽃양배추도 조건이 맞으면 당연히 꽃이 핀다. 어느 해 4월 중순 꽃양배추 꽃을 보았다. 40~50㎝정도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반 배추의 꽃과 같은 노란색 꽃이었다. 꽃양배추가 잎이 아닌 본연의 기관(꽃)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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