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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20년 과선배 마광수, ‘즐거운 사라’ 쓰고 감방 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15. 15:34


세상과 함께 시대탐구 1990년대
한강 20년 과선배 마광수, ‘즐거운 사라’ 쓰고 감방 갔다
카드 발행 일시2024.10.15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왼쪽)과 고(故) 마광수 교수. 연세대 국문학과 동문이다. 중앙포토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1970년생으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습니다. 대학 측은 작가가 동의하면 명예박사 학위를 주거나 교수로 초빙할 계획입니다. 20년 일찍 같은 과를 다닌 이가 있습니다. 1951년생 고(故) 마광수 교수. 하지만 두 사람의 궤적은 판이합니다.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과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내용의 조합이 충격적”(가디언) 등의 해외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1992년 여대생 ‘나사라’의 섹스 라이프를 묘사한 소설『즐거운 사라』를 냈던 마 교수는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사라는 이제 자유로워졌을지, 마광수의 시대를 돌아봅니다.

1992년 10월 29일 대학 중간고사가 막 끝난 무렵 이른 아침. 연세대 국문학과 마광수 교수 집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로 딱딱한 말투가 들렸다.

 서울지검 특수2부입니다. 조사할 게 있으니 바로 출석하십시오.   

‘그 책 때문일 테지….’ 전년에 쓴 『즐거운 사라』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판매 불가 결정을 받고 전량 수거된 데 반발해 출판사를 옮겨 재출간할 참이었다. 윤리위도 발끈했는지, 곧바로 다시 판매 금지를 결정하고 검찰에 알렸다.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되뇌며 검찰청으로 향했다.

조사실엔 『즐거운 사라』를 재출간한 도서출판 청하의 장석주 대표가 이미 와 있었다. “새벽에 집으로 들이닥친 검찰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왔다”고 했다.

나름 모범생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연세대 국문학과에 수석 입학해 모든 과목을 A로 졸업했다. 26세에 등단한 뒤 2년 만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되자 ‘최연소 대학교수’로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윤동주 시의 핵심 정서를 ‘부끄러움’으로 정의하며 학문적 인정도 받았다. 그런 인생이 한순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후 4시, 두 사람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음란물 배포 및 제조 혐의. 불과 세 시간 뒤 법원의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즐거운 사라』의 음란성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게 이유였다. 책은 ‘금서’가 돼 독자로부터 격리됐다. 서울구치소에 갇힌 신세가 됐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시간 만에 진행됐다.

 민주화가 된 지 언제인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무서운 박정희 정권 때도 야하다고 잡아가진 않았는데…! 

울화가 치밀었지만, 오한이 몸을 감싸기도 했다. ‘설마 실형이 나오진 않겠지….’ 학자로만 살던 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시대탐구 1990년대 〈4화〉 목차

📌“변태 성행위 선동” 시대의 왕따
📌지금은 문학 음란성 심사 사라져
📌즐거운 사라 아직도 금서인 이유    
📌마광수에게 보내는 서갑숙의 편지
※ 다양한 시대탐구 1990년대 이야기를 보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③“난 포르노 주인공이고 싶다” 그 후 25년, 서갑숙의 지금

 

전 인간의 기본 욕구를 식욕과 성욕으로 나눈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해 문학 이론화하는 데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식욕에 탐닉하던 시대가 지나고 이젠 성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성 문제를 은폐하기보다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공론화시키기 위해, 또 제 문학 이론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화해 리얼하게 그렸습니다. 사법부에서 선처한다면 다시는 이런 류의 글을 안 쓰겠습니다. 

92년 12월 3일 1심 공판에서 마 교수는 작품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다시는 안 쓰겠다고까지 하며 선처를 구했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들을….” 

“변태적인 성행위 선동” 실형 선고

1992년 11월 서울 서초구 검찰청 앞에서 열린 마광수 교수 석방 및 예술 출판의 자유 보장 촉구 침묵시위. 중앙포토

마 교수는 실형을 받았다. 판결 요지는 이랬다. “때와 장소, 상대방을 가리지 않은 각종의 난잡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선동적인 필치로 노골적,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데다 (중략) 주로 독자의 호색적 흥미를 돋우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어 형법 제243조, 제244조에서 말하는 음란한 문서에 해당한다.”


1990년 2~7월 월간지 『여성자신』에 연재한 소설로 1991년 서울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지향하는 여대생 ‘나사라’가 대학교수 ‘한지섭’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성관계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하던 끝에 연애와 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 마 교수가 책 서문에 밝힌 소설을 쓴 이유.

“우리는 인간이 〈사회적 자아〉뿐 아니라 〈개인적 자아〉 역시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개인적 자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성 문제에 대해 툭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한시바삐 마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성 문제는 마치 〈쓰레기통에 뚜껑만 덮어 놓고 있는 양상〉과도 같아서, 은폐될 대로 은폐된 채 해결책을 전혀 찾지 못하고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설사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일체의 성 문제를 사상과 토론의 자유시장에 상장시키고 싶어서 주로 성 문제에 치중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천재에서 ‘문단과 학계의 왕따’로

                                             마광수 교수 구속 다음 날 중앙일보.

마 교수는 참담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의 음란성을 문제 삼아 작가를 구속, 실형까지 선고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각 항소했지만 기각됐고, 1995년 최종심에서 형이 확정됐다.

이후 그는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1998년 복직했지만 2000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연세대 학생들이 마 교수의 재임용 탈락에 반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다시 복직한 뒤 2016년 정년퇴직했다. 이 기간 그는 전공과목을 거의 맡지 못했다고 여러 번 토로했다.

 문단과 학계 모두 왕따예요. 제게 강의를 안 줬어요. 배정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국문과) 정교수인데. 요즘은 야한 게 욕이 아니잖아요. 야한 여자를 썼단 이유 하나만으로 강의권을 빼앗았어요. 지금은 야한 것을 다 좋아하면서도 이중적이지. 

(2009년 8월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 인터뷰)

스스로 생을 마감하다 

                                                               생전의 마광수 교수. 중앙포토

정년퇴직 1년이 막 지났을 무렵 그는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때부터 마 교수의 제자이자 후배였던 고운기(한양대 교수)시인은 그가 숨지기 직전의 만남을 떠올렸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이었나. 평소처럼 선생님 댁 주변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서 맥주 한잔을 했어요. 그때 이미 술은 거의 못 하시게 됐고 위장병도 심했어요. 수면장애와 우울증도 컸고요. 넋두리처럼 ‘야 요즘 내가 쓰는 건 누가 야하다고도 안 해’ 하시기도 하고. 시절이 변한 것에서 오는 소외감 같은 것들…. 이제는 제자들이 옆에서 말이나 들어주고 같이 밥이나 먹어주면 그냥 겨우 위안받는 정도인데 그런 게 성에 차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그분이 끝까지 버틸 수 있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어요. 그 책임감으로 버텼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책임감 같은 게 없어진 거죠. 그분 굉장히 깔끔한 성격이거든요. 이렇게 아프고 남한테 신세지고, 그 책 이후로 스스로 검열을 많이 하느라 글도 제대로 못 쓰고. 그런 내가 구질구질하게 오래 산다, 그냥 목숨만 유지한다? 그걸 아마 견디지 못하셨을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깔끔하게 정리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 

30년 지났지만 여전히 ‘금서’

                                                                   마광수 교수. 중앙포토

『즐거운 사라』는 2024년 현재까지도 유통이 금지된 ‘금서’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유해 간행물로 지정하면 책의 유통이 금지되는데, 이 책이 그렇다. 혹은 여성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청소년 유해 간행물이 되면 19금 띠지를 붙여 판매한다.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와 같은 경우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는 “지금은 이런 소설, 문학 작품의 음란성은 아예 심사 대상에 두지도 않는다. 일본 등에서 넘어온 실제 포르노급의 신체 노출이 있는 경우에만 음란성을 따져서 19금으로 지정하거나, 친자 간의 관계처럼 범죄적 요소가 있을 때에만 유통 금지를 심의한다”고 설명했다.

                                                                  고 마광수 교수의 그림

웹툰·만화·영상·웹소설 등 『즐거운 사라』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노골적인 성관계 묘사가 있는 콘텐트가 넘치는 시대, 『즐거운 사라』는 왜 금서 딱지를 아직도 떼지 못한 걸까.

심의 결과에 대해 저자나 출판사가 재심의를 요구해야 하는데, 마 교수는 이를 요청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 교수가 남긴 조용한 항거의 표지가 아닐까.

마광수에게 서갑숙이 보내는 편지

마 교수의 쓸쓸한 부고는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줬다. 그중 한 명이 배우 서갑숙이다. 그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책『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주인공이고 싶다』를 떠올렸다. 『즐거운 사라』가 나온 1991년,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가 나온 1999년. 90년대의 시작과 끝에서 대학교수와 여성 탤런트가 ‘야한 책’으로 단죄를 당했던 셈이다.

지난 7월 말 제주도 해변가에서 서갑숙은 마 교수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교수님께 한마디를 전한다면…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의 친구였다면 외로움을 조금 같이 등 다독여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리고 원망스럽습니다. 좀 더 사셨어야죠…. 

                                              제주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는 서갑숙. 장진영 기자

그는 책을 썼을 때 마 교수 사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마 교수님의 일을 떠올리면서 책을 내는 게 무섭기도 했어요.『즐거운 사라』를 보고 ‘아, 제대로 마음먹고 쓰셨구나’ 정도 생각만 했죠. 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런 거로도 구속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책을 쓸 때는 마 교수님 이후 10년 가까이 지났으니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일이 펼쳐진 거죠. 

                                            본격적인 성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 넷플릭스

음란은 유죄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영화 '래리 플린트' 포스터.

198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사주인 래리 플랜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플랜트는 음란 사진과 픽션으로 보수주의 목사 제리 폴웰을 풍자한 사건으로 5년 동안 법정 다툼을 벌였다.
당시 플랜트는 수정헌법 1조를 무기로 공인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대법원도 자유로운 토론 끝에 진리가 표출된다는 ‘사상의 자유시장’(존 밀턴, 아레오파지티카) 이론을 근거로 플린트의 손을 들어줬다. 성에 관한 묘사가 예술적이냐, 외설적이냐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고 판결했다.

“낮에는 신사, 밤에는 야수” 

세상은 바뀐 듯 바뀌지 않았다. 서갑숙은 아직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를 쓴 배우라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고인이 된 마 교수 역시 『즐거운 사라』의 해금이 풀리지 않을 만큼 그때의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 교수의 메시지는 단 하나였을 뿐인데 말이다.

 내숭 떨지 말고 솔직하자 이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가장 고쳐야 할 점이 이중성이에요. 쉽게 말하면 낮에는 신사, 밤에는 야수예요. 모두 나처럼 되라는 게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도 봐주라 이거죠. 이 세상에 성이 사회적으로 화두가 된다면 소설은 세상의 반영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나 같은 작가도 한 명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의 굳건했던 신념도 투옥과 실형 선고, 사회적 매장 이후 자꾸 눈치를 보게 됐다. 그는 엄혹한 시대 분위기가 ‘문학의 기계’ 하나를 망쳐놨다고 표현했다.

 기계 하나를 망친 거예요. 나는 문학의 기계인데 글을 쓸 때마다 자기 검열을 해요. 판사마다 마음이 달라요. 기준을 알 수 없는 거야. 막연히 ‘음란하면 안 된다’야. 지금도 글을 쓸 때 손에서 쥐가 날 수밖에 없어요. 

(2009년 8월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 인터뷰)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공간 열어준 소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한국의 현재 표현의 자유 수준은 굉장히 높다. 선진국 수준에 있다고 본다. 명예훼손 소송처럼 대부분 민사로 해결하고, 검찰이 수사한다거나 국가 권력이 나서 통제하는 일은 이제 없다. 일반적으로 미국 문화권, 일반적 자유 진영에 들어와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 같은 경우 예외적으로 정권이 ‘정신을 못 차린’ 사건이었다고 본다.

이런 표현의 자유 수준에 상당히 기여한 것이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논란이다. 당시 아직 1980년대 유산이 남은 때라 진보라 불리는 집단에도 성 개방, 섹슈얼리티, 젠더 같은 건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주변적인 거였다. 하지만 마광수 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국가 권력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진보 세력이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여성운동과 성 소수자 등에게 공간이 확보됐다. 마광수 교수는 진보 세력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4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