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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받아들이되, 딱 그만큼만 아파하세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7. 11:15

[마음을 찾는 사람들]

고통은 받아들이되, 딱 그만큼만 아파하세요

정신의학과 명상 접목 앞장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교수

입력 2024.08.07. 00:30
 
채정호 교수는 "틈 날 때마다 병원 곳곳을 걸으며 스스로 자연과 연결된 것을 느낀다"며 "사람이나 반려동식물 혹은 반려석(돌)이라도 정해서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우리는 흔히 ‘잘 산다’라면 ‘부자’를 생각하지요. 제가 만나는 환자분 중에는 부자가 많아요. 그분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어졌기에 저를 만나러 옵니다. 통장에 있는 숫자는 ‘나’가 아닙니다. ‘잘 산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라 ‘잘 있다’ ‘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잘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잘 있는 것입니다. 잘 존재하기 위한 훈련이 명상입니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63) 교수는 38년간 환자 4만명을 진료한 전문가이다. 그는 2017년 대한명상의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정신의학과 명상을 학문적으로 접목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환자 진료와 연구 논문 작성, 회의 등으로 바쁜 일과 중에도 유튜브와 기업체를 비롯한 각종 강연을 통해 명상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 펴낸 저서 ‘진정한 행복의 7가지 조건’(인플루엔셜)에선 ‘수용’ ‘변화’ ‘연결’ ‘강점’ ‘지혜’ ‘몸’ ‘영성’을 행복의 키워드로 꼽았다. 이 책의 바탕에도 명상 수행이 깔려있다.

그의 연구실엔 ‘나는 죽고 예수로 살다’라는 작은 액자가 있었다. 그는 개신교 장로이다. 명상이라면 불교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환자 치료 방법을 연구하던 중 명상을 접하게 됐고 이제는 매일 명상으로 일과를 시작한다”며 “명상과 기독교 신앙은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수님이 창립하거나 관여한 학회의 명칭을 보면 한국인들의 아픈 마음이 보입니다. ‘불안의학회’ ‘직무스트레스학회’ ‘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등이 그렇습니다.

“제가 38년차 정신과 의사인데, 최근 들어 환자가 폭증한다는 느낌입니다. 영역, 연령, 성별,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요. 너무너무 아프고, 그 아픔이 일찍 시작되고 있어요.”

-최근 트렌드 변화가 느껴지나요?

“젊은 친구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총체적입니다. 잘 해온 친구들은 완벽주의 때문에 힘들어 해요.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잘 해야 하고, 더 달려야 할 것 같은데 힘이 소진됐다는 겁니다. 그러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요. 반대로 이루지 못한 친구들은 이러다 굶어 죽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요.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브레이크 없이 액셀만 있는 자동차로 폭주하는 운전자들이 많다는 느낌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요?

“자동차 운전으로 치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면서도 운전 기술이 좋아 요리조리 잘 피해서 겨우 사고 없이 달려온 사람과 여기저기 들이받아서 너덜너덜해진 차를 모는 운전자이지요. 소위 성공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운전자 모두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차를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는 것이죠. 빠른 차는 빠르게, 천천히 갈 차는 천천히 가도록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운전 기술을 더 익히자, 부딪혀도 잘 견디는 철판을 만들자’고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멈춰서 살펴보자’는 것이 명상이지요. 명상은 어떻게 만나시게 됐나요?

“정신과 의사는 자살이라는 총알이 난무하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들고 총알을 막아야 합니다. 이걸로도 막아보고, 저걸로도 막아보는 과정에서 명상도 만났지요. 10년 좀 넘었는데 한동안 열심히 ‘도장 깨기’ 하듯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고, 2017년엔 같이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대한명상의학회’도 창립했지요. 모든 환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약물이나 물리적 화학적 치료로도 효과가 없던 분들이 명상을 통해 회복하고 다른 분들에게 명상을 지도하는 경우도 있어요.”

-선생님은 ‘웰빙(well-being)’에 대해 오해가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흔히 ‘웰빙’을 ‘공기 좋은 곳에서 유기농 식품 먹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잘 존재하는 것’ ‘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있는 것(being)’보다는 ‘하는 것(doing)’과 ‘갖는 것(having)’에 집중했어요. ‘잘 있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죠.”

-환자 치료의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수용’이 첫 단추라고요?

“‘수용’ 혹은 ‘긍정’은 ‘무조건 좋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삶 자체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삶을 대하는 부정적 태도가 있을 뿐이죠. 공황, 우울증 같은 증상은 삶이 보내는 표현입니다. 그럴 때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사람을 기적의 물질로 불리는 ‘초전도체’에 비유합니다.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제로(0)여서 모든 전류가 손실 없이 흐르지요. 사람의 경우도 웬만한 고통은 지켜보기만 하면 다 지나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경험과 자아에 의해 ‘좋다, 싫다’ 같은 판단이 개입하게 되면 지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이 생기게 되죠. 이게 병이 되는 것이죠.”

-’고통은 딱 그만큼만 겪자’고 하셨죠?

“가령, 암에 걸렸다면 우리는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암에 걸렸나’ ‘자식들은 어떡하나’ 같은 후회와 걱정을 하면서 고통을 키웁니다. 그런 후회와 걱정이 또 ‘저항’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고통과 부정적 생각이 겹칠 때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됩니다. 그것도 반추(反芻), 계속 도돌이로요. 이럴 때 저항을 줄여서 ‘그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이 명상입니다.”

 

-책에 언급한 ‘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경험과 결과들에서 다른 행위자가 베푼 선의를 알아차리고 긍정적 감점으로 반응하는 일반화된 경향성’이란 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감사는 ‘나’가 아닌 무엇인가로부터 주어진 것에 대해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그저 ‘좋다’ ‘행복하다’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감사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의학과 채정호 교수가 '감사 일기'를 적은 다이어리를 보여주고 있다. 채 교수는 20년 동안 매일 '감사한 일' 5가지와 '어제보다 나아진 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매일 다이어리에 ‘감사 기록’을 하고 계시다고요?

“저는 매일 감사한 일 다섯 가지, 어제보다 나아진 점, 제가 친절하게 대한 사람 이름,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회개할 일, 그리고 제가 기도해줄 사람 3명 이름을 적습니다. 매일 저녁 혹은 아침에 정리합니다. 이건 참 중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거든요. 제가 한 20년 동안 이렇게 했으니 매일 5개씩, 적어도 3만개의 ‘감사’가 제 인생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 감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행복도는 다르지 않겠어요? 저는 그 밖에도 ‘아무 이유 없이 감사 편지를 쓰고, 감사 방문을 하자’고 권합니다.”

-’음미’의 중요성도 강조하시죠?

“삶의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집중해 향유하는 능력이 음미입니다. 우리는 귀신같이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찾아서 후회하고, 미래의 안 좋을 결과를 찾아서 걱정합니다. 과거의 좋은 기억을 찾아서 리마인드하고 음미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 경우는 스마트폰에 ‘아름다운 순간’이란 폴더를 만들어 좋은 기억의 사진을 저장해두고 시간 날 때 봅니다. 옛날 할아버지·할머니가 가족들의 백일, 돌, 졸업, 결혼 사진을 액자에 넣어 두고 보셨던 것과 비슷하지요. 좋은 기억을 리마인드하는 것이죠. 명상이 비우는 것이라면 음미는 채우는 것입니다.”

-한국 교육 시스템은 ‘잘 못하는 것을 잘하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래서는 행복할 수 없다. 강점을 찾는 것은 ‘나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요.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면 경제적으론 어려울지 몰라도 모두 표정이 좋아요. 자존감도 높고요. 우리 교육은 어중 띄기를 만드는 것이에요. 원이 있다고 쳐보죠. 중심에서 한 방향으로 달리면 일직선으로 어쩔 수 없이 순위가 매겨져요. 그러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원이 되지요. 저는 최고(best)보다는 조금씩 나아지는 베터 앤 베터(better and better)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씩 나아지면 언젠가 베스트에 가깝게 되지 않겠어요?”

-환자에게 ‘마음에서 빠져나와 몸으로 살아가라’고 권하시지요? 강연에서 ‘5만+한 가지 생각’이라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인간의 뇌는 아주 잠깐이라도 뭔가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그 생각까지 더 한다는 것이죠. 생각을 줄이기 위해선 몸으로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환자들에겐 좌선(坐禪)보다는 움직임 명상을 권합니다.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생각이 생기기 쉽거든요. 환자들과 ‘파란색 5가지 찾기’ ‘오각형 찾기’ 같은 감각 훈련도 많이 합니다. 마음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지금 여기’로 주의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죠. 주머니에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물건을 넣고 수시로 만지면서 기분을 회복하는 것도 권합니다.”

-매우 바쁘신데 명상은 언제 하시나요?

“출근 후 30분 정도합니다. 때론 책상 위에 앉기도 합니다. 진료 시간에는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분들과 만나야 합니다. 자칫 오토 파일럿(자동 조종) 모드처럼 진행할 수도 있고, 지루하거나 번아웃이 올 수도 있어요.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끌고 가는 거지요. 그렇지만 저는 30분 명상을 통해 매일매일 ‘제로(0) 베이스’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존재로 돌아와 현주소를 살피는 시간입니다. 바쁠 때는 분초가 아깝지요. 그렇지만 제가 삶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합니다. 그러니 매일 명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환자들에게도 ‘매일 0.1초라도 해보자. 그리고 조금씩 늘려보자’고 권합니다.”

[채정호 교수의 ‘진정한 행복의 7가지 조건’ 중에서]

”우리는 존재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무엇을 더 가지려(having) 애쓰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다(doing). 미래를 위해 지나치게 오늘을 희생하도록 훈련받아 온 탓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에게도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때 삶은 나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릴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 불필요한 기억을 지워서 공간을 확보하거나 오래된 기억을 활성화해 여러 종류의 생각을 다시 조합하는 등의 생산적인 일이 바로 그 순간에 이뤄진다.“

”감사 훈련을 꾸준히 하면 감사라는 근력이 생기고, 감사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 선순환에 이르게 된다. 감사 근력이 생기면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세만 바로잡아도 우울이나 불안감이 상당 부분 좋아지는데, 감정 자체와만 싸울 뿐 몸을 움직여볼 생각을 못 하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