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머그잔- 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 출렁이는 물로 잘 비유 오늘 열심히 걸어서 자정에 당도하면 다시 오늘이 시작되듯이 시를 열심히 써서 어떤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많은 시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를 이해한다고 하면 시는 이해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면서 또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지난한 여정이 담긴 시들이 1300여 개의 층계를 이루고 심사자들의 눈앞에 조금은 긴장한 듯 당당하게 도착해 있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 한 편을 가리는 작업은 꽤 고통스런 일이었다. 한 실직자의 허무를 눈사람과 그림자로 풀어낸 ‘눈사람과 그의 그림자’는 조금 촘촘한 듯한 문장들의 보폭이 아픈 돌팔매질이 되었다가 스르르 중력을 잃고 길 가 어딘가로 굴러가버리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시적 인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서술어의 처리를 조금 더 고민해보면 아주 단단한 시가 될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물어 잇자국이 선명한 사과의 흔적으로 너와 나의 관계의 현상들을 그린 ‘사과의 저녁’에 묻은 흙이 오래 눈에 남았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저녁을 조금 더 들어가 보았다면 말 할 수 없는 깊이에 누구라도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고민 끝에 우리가 맨 위에 올린 작품은 ‘머그잔’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도 너무 많은 주체의 역할을 요구당하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을 출렁이는 물로 비유하고 있는 점에 마음이 갔다. 높이 치솟아오르거나 좀 더 따뜻해져야 하거나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는 세계의 요구를 한 컵에 담아 흔들어버리고 싶은 반항이 감각적 성과를 높이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손에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작품들을 아쉬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뻤고 좋은 시를 향해서 가끔은 에두르고 에두르다가도 그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다시 시작하기를 담담히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시의 층계들이 제각각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우선, 맨 앞에 놓인 ‘머그잔’에 주저없이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성윤석·조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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