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어둠’의 ‘사막’에 음각된 ‘나팔꽃 문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4. 18. 13:42

 

 

어둠사막에 음각된 나팔꽃 문신

                                                                              고인환

 

 

1. 서정의 맨 얼굴

 

지난 계절 문예지에 마련된 시의 자리는 풍성했다. 원로, 중진, 신진 등이 고르게 작품을 발표했으며,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식은 시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했다. 봄을 맞이한 시들이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시는 우리 사회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일상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타진하고 있는 시에서부터, 소비사회의 황량함을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주조(鑄造)하고 있는 작품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현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포착하는 서정에 이르기까지 그 변주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문제는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은폐된 요소들을 탐색하고, 고통스럽지만 그 조건들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시적 긴장을 얼마만큼 감당하고 있느냐이다. 개인의 내밀한 욕망의 세계로 침잠하여 좀처럼 외부 세계로 길을 내려하지 않는 우리 시의 일면을 보며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노골적으로 침윤하는 현실에서, 시인들은 현실/환상, 이성/감성, 생성/소멸, 신념/의혹 등의 틈새에서 흔들리는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탐색은 전통 서정이 억압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환기하는 작업과 영상 이미지의 환유적 변주로 대변되는 욕망의 무한질주를 경계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서정의 운명을 건 야심 찬 모험의 도정에 있다. 이는 자아와 세계,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욕망과 결핍, 모방과 창조 등의 경계가 무너지는 미지의 영역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시의 존재조건을 함축하고 있으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응전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비판의 시선 또한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는 우리 시대 서정의 이중적 과제에 직면케 한다. 이러한 이중적 과제를 염두에 두고, ‘어둠’, ‘사막’, ‘나팔꽃 문신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우리 시의 내면 풍경을 엿보기로 하자.

 

 

2. 어둠의 변주

 

이덕규, 김사인, 이상국 등의 작품은 일상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시에 가까운데, 기존의 사실주의와는 변별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밥풀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에 주목하는 포개짐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보편적 삶의 진리를 길어 올리고 있는데, 이 구체성과 보편성 사이의 길항(拮抗)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포착하느냐가 시적 성취의 관건이다.

 

밥풀, 하면 밥이 안되고 풀이 되네

 

제 몸 하나 엎드려 쓰윽 문질러 뭉개지면

등짝에 와 붙는 것은 봉투가 되고

구멍난 봉창은 빈틈없이 때워지듯

어디든 떨어져 펄럭이는 것들 사이로

슬쩍슬쩍 끼어들면

끈적끈적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떨어질 줄 모르네

 

그렇게

형체도 없이 뭉개지고도

우리를 끈끈하게 버티게 하는 힘이

정녕 네 속엔 있다는 것인지, 밥풀

 

이제 막 그 뜨거운 옹솥에서

들끓고 잦혀지고

뜸들여지는 동안 함께 견디며 건너와

하나 하나 풀이된 너희들을

빈그릇에 꾹꾹 눌러 소복이 담아 놓으니

또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눈물이 나도록 부둥켜 안고

뜨끈뜨끈한 밥이 되네

그 앞에 앉으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네(이덕규,밥풀전문, <시선> 2004년 봄.)

 

사이의 틈과 차이에 대한 성찰이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 주지하듯, ‘은 생명과 삶의 원천이고, ‘은 대상들을 이어주는 매개의 기능을 한다. ‘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는 구체적인 대상과 일반적인 삶의 진리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경계를 허문다. “밥풀, 하면 밥이 안되고 풀이된다. 이러한 에서 로의 전이는 제 몸 하나 엎드려 쓰윽 문질러 뭉개지는 과정을 동반한다. ‘은 스스로의 형체를 허무는 운동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떨어질 줄 모르게 이어주는 이 된다. 시인은 /을 통해 생명력과 공동체 의식을 포개놓는다.

한편, 시인은 이 되는 과정을 고립된 존재가 뜨거운 옹솥에서/들끓고 잦혀지고/뜸들여지, “함께 견디며” “하나 하나 풀이 되는 과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이 된 것들을 빈그릇에 꾹꾹 눌러 소복이 담아 놓으니” “서로가 서로를 눈물이 나도록 부둥켜 안고” ‘뜨끈뜨끈한 밥이 된다. ‘앞에 앉은 시인의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 하나라는 인식에서 발원한다.

 

이 시는 /이 지닌 평범하면서도 오묘한 원리를 삶에 대한 따스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음각하고 있다. ‘/생명의 근원/공동체 의식으로 변주되는데, 이는 이기적이고 각박한 우리 시대의 삶을 무언으로 질타하는 죽비소리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김사인의 노숙의식의 분리를 통해 시적 거리감을 확보하는 동시에 개성적인 진술 방식으로 이 분리를 접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덕규 시인이 노래한 /에서 소외된 을 절망적인 어조로 증언한다. ‘은 생존의 수단이자 욕망의 분출구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러나 근대 동일성 담론은 계몽 이성의 이름으로 을 의식에 종속시킴으로써 소외된 타자의 자리로 내몰았다. 이 작품은 의 괘락에 탐닉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대비되는, 하층민(노숙자)을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김사인, 노숙전문, <문학동네> 2004년 봄)

 

이 작품에서 그려진 노숙자의 은 사회에 의해 거세된 이다. 한때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지금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먹이’()’()을 잃고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누워있는 은 죽음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의식’(정신)’(육체)의 분리를 통해 확보된 거리감은 의 절박함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의식에게 진술하는 형식, 즉 자기가 자신에게 말하는 방식은 객관적 진술 너머의 절박한 떨림을 연주한다. 이러한 객관성과 주관성의 공명(共鳴)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어떤가 몸이여라는 대목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절박한 을 효과적으로 길어 올리고 있다. 노숙의식의 분리를 통해 을 만신창이로 만든 계몽 이성의 이분법을 넘어, 다시 몸과 의식의 심연을 응시함으로써 우리 시대 몸의 어둠을 정직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상국 시인은 어둠저녁의 집을 짓는다. 어둠과 놀다어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역사적 비전을 부드러운 순환의 상상력으로 구부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둠은 시대의 억압과 모순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지니거나,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삶의 심연 등을 표상한다. 시인은 어둠을 삶의 활력으로 치환하는 연금술을 통해 오히려 어둠과 친숙한 존재가 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골목길에서 누가 덥석 손목을 잡아끈다

새로 온 저녁이었다

자기네 집에서 쉬어 가라는 거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린다고 했지만

이런 날이 날마다 있는 건 아니라며

한사코 잡아끌었다

나는 새우깡 한 봉지와

소주를 받아 가지고

학교마당 나무 아래 저녁의 집에서

어둠과 놀았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가라는

새로운 어둠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이상국,어둠과 놀다전문, <문학수첩> 2004년 봄.)

 

이 작품은 반복되는 일상, 노동의 하루 속에서 어둠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탐색을 보여준다. ‘어둠은 부정하거나 청산해야할 대립적 실체가 아니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근한 대상이다. 어둠쉬어갈 수 있는 곳, 즉 휴식의 공간이며, “새우깡 한 봉지와/소주만으로도 넉넉해질 수 있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저녁의 집이다. ‘어둠은 화려함과 분주함으로 가득 찬 낮의 삶을 감싸주는 존재이며 삶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존재이다.

일상어둠일상의 순환 구조는 어둠과 일상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새로운 어둠과 어깨동무를 하고/노래를 부르며일상으로 귀환하는 화자의 모습은 어둠의 보금자리를 일상과 초월의 경계에 마련한다. 시인은 이러한 어둠을 통해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문학의 운명을 체현하고 있으며, 이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3. 머플러와 耳鳴 그리고 사막

 

문정희와 이경림의 작품은 발랄함과 풍요로운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문정희 시인의 머플러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소재에서 시적 상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돋보이는 시이다. ‘머플러1차적 기능과 심미적 기능을 넘어서 한 여자의 심리와 내면을 꿰뚫어보는 점이 이 시의 매력이자 재미라 할 수 있다. ‘머플러의 발화로 시상이 전개되는 점 또한 그녀의 내면과 길항하며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머플러는 내면과 대상의 전도 혹은 포개짐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긴장된 떨림을 포착하고 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물푸레나무처럼 늘 당당한 그녀에게도

간혹 아랍 여자의 부르카 같은

보호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처음엔 보호이지만

결국엔 감옥

어쩌면 어서 벗어던져도 좋을

허울인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바람 부는 날이 아니라도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미친 황소 앞에 펄럭이는

투우사의 망토처럼

나는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거는

그녀의 깃발입니다

기억처럼 내려앉은 따스한 노을

잊지 못할 어떤 체온입니다(문정희,머플러전문, <시인세계> 2004년 봄.)

 

머플러보호벽감옥/허울깃발등으로 몸을 바꾼다. 이러한 머플러의 전이과정은 그녀의 내면의 변이과정과 짝패를 이룬다. ‘보호벽으로서의 머플러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이자,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는 상처쓰라린 불구를 덮는 보호벽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덧나 고름이 흐르는 장면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이 보호벽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감옥/허울이 된 보호벽을 벗어던짐으로써, ‘머플러세상을 향해 싸움을 거는” ‘그녀의당당한 깃발이 된다. ‘머플러그녀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긴장된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에서 의 다른 이름이다. ‘머플러기억처럼 내려앉은 따스한 노을/잊지 못할 어떤 체온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경림의 耳鳴, 눈꼽만한 낙타를 타고 창백한 밤의 사막을 건너는 하루살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이하 耳鳴,…」)은 시 공간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빼어난 작품이다. 마이크로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이 일상적 삶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耳鳴이다. 耳鳴,…」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경쾌한 상상력을 통해 폐허와도 같은 삶을 소환하고 있다.

 

, 수은등에서 수은이 쏟아진다

뿌연 수은의 말들이 밑의 어둠을 둥그렇게 구부린다

어둠의 몸에 박힌 수은의 말들이 환하다

 

그 속에서, 하루살이 떼

꽁무니마다 실같이 가는 길을 달고 잉잉거린다

가만히 보니 그 것들 눈꼽만한 낙타를 타고

저 창백한 밤의 사막을 건너는 중이다

보이지 않는 모래의 길을

타박……

가는 중이다

 

거기, 어떤 청춘 한 쌍이 잠시 낙타에서 내려 키스하고 있다

낙타처럼 구부러져 한 아비가 지나가고

등에 육봉 같은 아이를 업은 아낙이 지나간다

 

(도둑 고양이 같은 것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수은등 밑은 여전히 수은의 말들로 창백하고

그 사이로 간간히 !

처럼,

하루살이들이 타고 가는 낙타 발자국소리

낭자하다(이경림,耳鳴, 눈꼽만한 낙타를 타고 창백한 밤의 사막을 건너는 하루살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전문, <시작>, 2004년 봄.)

 

시인은 , 수은등아래, “수은의 말들로 창백한 풍경을 응시한다. 그 등불 아래의 풍경 속에서 하루살이들이 타고 가는” ‘낭자낙타 발자국소리를 듣는 시인의 촉수가 놀랍다. 이러한 상상력은 도시인의 일상적 삶을 수은등아래의 공간으로 축소한다. ‘낙타’, ‘모래’, ‘사막의 이미지는 현대인의 황량한 삶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데 기여한다.

 

시인의 감수성의 촉수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꼽만한 낙타를 타고 저 창백한 밤의 사막을 건너는” ‘하루살이가 되며, 잠시 낙타에서 내려 키스하는 청춘 한 쌍이 되었다가 어느새 낙타처럼 구부러한 아비육봉 같은 아이를 업은 아낙이 되어 모래의 길을 지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작품에서 /耳鳴은 시인의 일용할 양식에 비유할 수 있다. 시인은 짐짓 도둑 고양이 같은 것들이 빠르게 지나간다라는 표현으로 이를 괄호 안에 묶어 놓았지만, 괄호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뿌리라는 점을 수용한다면, 이렇게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耳鳴/도둑 고양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무한한 공급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섬세한 교직은 현실과 환상의 넘나듦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데 기여한다. “수은등에서, 수은이 쏟아진다에서 어둠을 둥그렇게 구부린다를 거쳐 어둠의 몸에 박힌 수은의 말들이 환하다라는 감각적인 시구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시각적 이미지의 극대화를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耳鳴의 세계로의 진입을 예비한다. 반면, “하루살이들이 타고 가는 낙타 발자국 소리낭자하다와 교차되며 구체적인 이미지를 부여받는데, 이는 환상에서 현실로의 귀환을 암시한다. 상상력의 공급원이기도 한 /耳鳴/도둑 고양이밤의 사막같이 창백한 일상적 삶을 소환하는데 성공한 수작(秀作)이다.

 

 

4. 하늘의 두께와 나팔꽃 문신

 

오규원과 정병근의 시는 자아와 세계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전통 서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인간에게 배제당한 자연이 다시 인간을 배제하는 역설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불행한 시인의 운명을 직조하고 있다.

오규원의 하늘과 두께는 서술자의 주관이 철저하게 배제된 객관적인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이 더 이상 인간에게 위안을 주거나 안식을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오규원, 하늘과 두께전문, <창작과 비평> 2004년 봄)

 

서정은 자아와 세계, 천상과 지상의 화해를 추구한다. 이 작품에서 는 화자와 하늘을 연결해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한다.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있던 새가 갑자기 허공위로 솟구친다. 하강이미지(햇살)와 상승이미지(비상)의 교차를 통해 현실/초월의 긴장을 표출하고 있다. 필자는 4 5행의 하늘을 열고 들어가/뚫고 들어가라는 대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통 서정에서는 초월의 상징인 하늘을 통과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인간의 초월 의지를 표상하는 가 어떻게 천상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속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라니.

 

이러한 당혹감에 이어 오늘 생긴/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열고 들어가 하늘이 된 ’(초월의지)가 오히려 하늘의 두께가 되었다면, 하늘은 그만큼 더 우리와 멀어진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하늘에 닿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초월 의지의 과잉 혹은 과속을 노래한 시가 아닌가. 우리는 너무 쉽게 현실을 넘어서려고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하는 시이다. 이 작품에서 새가 뚫고 들어간 하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하늘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시뮬라크르된 자연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 닿을 수 있고, 또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화된 자연과의 가상적 화해는 살아 있는 자연또다른 두께를 만들 뿐이다.

정병근의 나팔꽃 씨는 자연과 하나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 문신을 통해 보여준다.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철 환할 것이다(정병근, 나팔꽃 씨전문, <실천문학> 2004년 봄)

 

말라 죽은 나팔꽃” ‘씨방까만 씨를 응시하며 시인은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나팔꽃의 길을 본다. 죽음에 깃들어 있는 삶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 까만 씨들이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으로 보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광택의 암흑물질이 시인의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는 죽음이 삶을 소환하는 장면이며, 삶과 죽음이 뒤엉킨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장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즉 시에 담아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시인은 살아서 기어오르라는,/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환약 같은 나팔꽃 씨입 속에 털어넣고 물을마신다. 시인은 죽음 속에 똬리 틀고 있는 삶, 혹은 삶 속에 내재한 죽음을 삼킨 셈이다. 이는 죽음을 거슬러, 아니 죽음과 삶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의지이며, ‘죽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온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나는 한철 환할 것이다라는 진술이 언어()새기기불가능한 /죽음의 비의를 몸의 언어로 포착하려는 시인의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어둠사막에 음각된 나팔꽃 문신이라 부르면 어떨까?

 

- 계간 시와 정신 비평

 

고인환, 문학평론가, 경북 문경 출생, 경희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1<중앙일보> 평론 당선, 경희대 강사, 저서로 결핍, 글쓰기의 기원,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등이 있음. 계간 <문학과 경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