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벗겨내자 나체 드러났다, 2만8000원에 산 고물의 비밀
강혜란
“모든 볼거리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고 아쉬워한 적이 있나요. 아무래도 인구 1000만 명의 국제도시인 서울을 중심으로 볼 만한 공연·전시 등아 몰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찾아보기에 따라 우리 동네 근처까지 온 ‘주말의 비타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선 우리 문화유산 ‘대표 주자’들이 순회전시 중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각 시·도 지자체 및 지역 공립박물관과의 협력하에 ‘국보순회전: 모두의 곁으로’를 오는 12월까지 이어갑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국보·보물 등 중요 문화유산 6종(총 22건 29점)을 주제별로 3~7점씩 묶었어요. 상반기엔 당진·보령·합천·상주·강진·남원 등 6곳, 하반기엔 증평·장수·고령·해남·함안·양구 등 6곳에서 선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전국 12개 공립박물관이 협업하는 전시 '국보 순회전: 모두의 곁으로'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국보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금관총 금제 허리띠'. 연합뉴스
일제강점기(1921년) 최초로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 방패를 든 갑옷차림 무사 모양의 기마인물형 토기, 활짝 핀 모란꽃을 곱게 새긴 청자상감 모란무늬 항아리…. 이번 기회가 아니면 ‘우리 동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문화유산들입니다.
이 중엔 한눈에 보기 좋고 신기한 것도 있지만 왜 이게 국보이고 보물인지 알쏭달쏭한 것도 있지요. 이번 주 ‘문화비타민’은 국보순회전에 나오는 유물 5종을 골라서 ‘이게 왜 각별한지’를 들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의 허형욱 학예연구관, 이동관 학예연구사가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해설해 주셨습니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보러가실 때 유물에 붙어 있는 설명 이상의 ‘썰’을 풀어주시죠.
검푸른 녹 제거하자 수천년 전 한반도 생활상
농경문 청동기. 보물 제1823호. 초기 철기. 청동. 길이 13.6cm. 국유: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을 확대해서 보시라. 가운데 있는 세로 방향의 무늬 띠로 인해 좌우로 나뉜 공간에 자세히 보면 그림들이 있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것을 꽂고 발가벗은 채로 밭을 일구는 남자, 괭이를 치켜든 사람,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밭을 가꾸어 수확에 이르는 과정을 표현한 듯싶다. 뒷면엔 둥근 고리가 달려 있는데, 여기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은 그림이 있다.
길이 13.5㎝에 불과한 이 청동유물은 기원전 4세기 청동기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문화를 표현한 그림이 있다고 해서 ‘농경문청동기’로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수된 것은 1969년 8월 5일. 대전의 상인이 고물상에게 구입했던 게 서울 상인을 거쳐 당시 돈 2만8000원에 넘어왔다. 정확한 출토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전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작은 크기에 아랫부분은 없어졌고 전체적으로 녹이 심해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가는 기하학적인 무늬 일부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보존처리 과정에서 겉면 녹을 하나둘 제거하자 앞면과 뒷면에서 나뭇가지 위의 새, 농경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여기 묘사된 밭이나 격자무늬 토기 등은 실제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현재까지 당대의 생업과 신앙을 사실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청동기다. 출토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한계에도 2014년 보물로 지정된 이유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합금(合金)이다. 구리는 비교적 자연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고 매장량도 풍부한 반면, 성질이 물러 형태가 쉽게 변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주석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인 게 청동이다.
청동의 제련(製鍊)은 당시로선 쉽지 않은 기술이었고, 그 때문에 이를 거푸집에 붓고 식혀 다듬어 만드는 청동기는 귀한 재물이었다. 오랜 세월 탓에 녹슬어 검푸른 빛을 띠지만 갓 만들어진 청동기는 광택이 있는 금색에 가깝다. 햇빛 아래 반짝반짝 황금빛을 뿜었을 청동기들은 당대 지배자에게 위엄과 권위를 더해줬을 것이다. ‘문명’이란 게 막 시작하던 시기의 생활과 신앙이 수천년을 건너뛴 이 작은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농경문청동기 등 3건 5점(국보 3점, 보물 1점)을 한데 만나는 전시는 충남 당진 합덕수리민속박물관(6.21~8.11)과 충북 증평 민속체험박물관(9.6~12.8)에서 열린다.
일제시대 최초 발굴된 신라 금관의 주인공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냥 척 봐도 국보다. 휘황찬란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테두리 위에 한자 날 출(出)자처럼 생긴 장식을 세웠다. 양쪽으로 사슴뿔 같은 장식도 있다. 이 장식에 굽은 옥(곡옥, 曲玉)과 동글납작한 금판 구슬(영락, 瓔珞)을 규칙적으로 배열했다. 테두리 앞면에 길게 늘어뜨린 두 금줄이 있는데 이 장식 끝에 달린 초록색 옥엔 금빛 모자까지 씌웠다. 형태건, 색상의 조화건 신라 금관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이 금관은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발견됐다. 어린 아이들이 작은 구슬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본 일본 경찰은 그 구슬들이 나온 곳으로 갔다가 주택 확장공사 현장에서 나뒹구는 ‘왕릉급’ 유물들을 목격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정식 조사에 착수한 결과 거대한 고분에서 순금 제품과 토기류, 청동기류, 옥류, 무기류 등 약 1만여 점이 출토됐다.
그중 하나가 신라 금관이었다. 훗날 이 무덤은 신라 금관의 최초 발견을 기념해 금관총으로 이름 붙여졌다. 경주 고분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여섯 개의 순금제 금관이 발굴되었는데, 이 금관이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다. 신라 왕(마립간)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던 5~6세기로 추정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대한 무덤과 금관, 금 장신구들을 통해 신라 왕실은 저승에서도 살아 생전의 지위와 권력를 누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금관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금관총 발굴 90여 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은 같은 무덤에서 나온 칼을 보존처리하다가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찾아냈다. 그동안 금관총으로 불렸던 무덤에 이사지왕이 묻혔던 것으로 해석됐다.
문제는 신라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이사지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름만 다를 뿐 역사 기록에 전하는 신라 왕 56명 중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금관총이 만들어진 시기 신라에선 절대권력자뿐 아니라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화려한 황금 장신구를 지닌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는 금관총 발견 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학계의 흥미로운 논점으로 남아 있다.
금관총 금관 등 3건 3점(국보 2점)을 한데 만나는 전시는 충남 보령 석탄박물관(6.6~9.1)과 전북 장수 장수역사전시관(9.13~12.1)에서 열린다.
말 탄 두 사람, 어린 왕족 사후세계 길잡이였나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교과서에서 만났을 국보다. 기마인물형(말 탄 사람 모양) 토기 2점은 쌍으로 출토됐는데, 사람과 말의 차림새에서 신분 차이가 보여 각각 주인상과 하인상으로 이해됐다.
주인상은 머리에 관모(冠帽)를 쓰고 갑옷을 걸친 게 귀족으로 보인다. 오른쪽 허리춤에 칼을 차고 늠름하게 말을 타고 있다. 말에도 안장, 재갈, 발걸이 등이 완벽하게 표현됐고 말띠꾸미개[운주(雲珠)]와 말띠드리개[행엽(杏葉)]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인상은 머리에 상투를 틀어올려 건(巾)을 썼고, 입은 옷도 장식 없이 소박하다. 올라탄 말은 크기가 작고, 말갖춤은 주인상의 것과 비슷하지만 말띠드리개 같은 장식이 없이 단순하다. 출토 당시엔 하인상이 앞에 있고 주인상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처럼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인상이 오른손에 둥근 방울을 들고 있어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금령총에서 나왔다. 금령총의 금관과 금허리띠는 다른 무덤의 것들보다 유독 작은 편이라 신라의 어린 왕족 무덤으로 추정된다. 살았으면 제왕이 됐을지 모를 주인공을 묻으며 신라인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을 것이다. 금령총에선 뱃사공까지 표현된 2점의 배 모양 토기도 나왔는데 모두 완성도가 높다.
말과 배를 타는 모습은 죽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수단이자 죽은 이를 보호하고 안내하려는 역할의 의미를 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기마인물형 토기는 편평한 판을 아래에 받쳐서 세우기 쉽게 만들었다. 말 엉덩이 위쪽에 있는 깔때기에 액체를 부어넣어 앞에 달린 대롱으로 따르는 주전자로 활용할 수 있어 제의용 토기로 추정된다. 무덤의 어린 주인에게 지극정성을 다한 신라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등 5건 6점(국보 2점)을 한데 만나는 전시는 경북 상주 상주박물관(6.10~9.1)과 전남 해남 공룡박물관(10.2~12.8)에서 열린다.
은은한 비취색, 불과 흙의 조화 ‘상감청자’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 10세기 무렵이다. 초기의 가마들은 고려 수도 개경(오늘날의 개성)에 가까운 중서부 지역에 있었지만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두 지역을 중심으로 청자를 생산했고, 제작 기술도 더욱 정교해졌다.
11세기 중엽부터 눈에 띄게 발전한 고려자기는 12세기에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급 기물은 다양한 무늬로 아름답게 꾸몄고, 그릇과 같은 일상용품과 기와·타일 같은 건축자재도 청자로 만들게 됐다. 특히 유약이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翡色) 청자’를 완성하고 표면에 서로 다른 흙을 집어넣어 무늬를 표현하는 ‘상감(象嵌)’ 기법을 개발함으로써 도자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달리 고려청자가 시대·국적을 불문하고 칭송받는 게 아니다.
상감청자는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부분을 흰 흙이나 붉은 흙으로 메워서 청자 유약을 입혀 굽는다. 이렇게 하면 흰 흙은 백색 무늬로, 붉은 흙은 검은색 무늬로 나타난다. 본바탕에 다른 재료를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청자의 상감 기법은 같은 시대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入絲)기법과 기술적으로 비슷하다. 고려 공예 기술의 독창성과 일관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국보)는 높이 19.7㎝다. 양쪽에 달린 동물 모양의 손잡이기 있는데, 이전 시대에 만들어졌던 동기(銅器,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기물) 형태를 따랐다. 표면 무늬는 선상감으로 윤곽선을 만들고 그 안에 모란꽃잎을 세밀하게 상감했다. 상감된 모란무늬는 크고 시원스러운 그릇 모양과 잘 어울린다.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모란을 대상으로 시 짓기를 즐겼다고 한다. 문신 이규보(1168~1241)도 궁궐 안 산호정에 모란이 피면 시를 읊는 사람이 많다고 기록을 남겼다. 모란무늬가 돋보이는 이 항아리는 안정감 있는 형태와 차분한 광택이 도는 유색이 조화를 이뤄 품격을 자아낸다.
청자상감모란무늬 항아리 등 4건 4점(국보 1점)을 한데 만나는 전시는 전남 강진 고려청자박물관(6.11~9.8)과 경남 함안 함안박물관(9.30~12.15)에서 열린다.
어딘가 어색해서 더 끌리네, 순백 달항아리
백자 달항아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청자는 조선 초기가 되면 표면에 백토를 발라 만드는 분청사기로 바뀌면서 전국적으로 생산됐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더 높은 온도(1200도 이상)에서 구워낸 희고 단단한 백자가 조선시대를 특징짓는 자기가 됐다.
조선 백자는 단아하고 잘생긴 형태와 담백하고 너그러운 곡선을 지녔다. 같은 흰색이라도 순백, 유백, 회백, 설백, 청백 등으로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조선은 백자를 왕실 도자기로 선택하고, 유교적 이상을 담은 백자를 만들기 위해 1467~1469년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세웠다. 그릇 굽 안바닥에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좌(左)’ ‘우(右)’ 등의 글씨를 새겨 관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수준 높은 순백의 백자를 제작하게 됐다. 숙종(재위 1674~1720) 대에 이르면 관요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일부 백자를 구워 팔 수도 있었다. 양반 가문에선 제사를 위한 제기 용도로, 문인들에겐 문방구로도 백자의 인기가 높았다.
전시에선 백자 달항아리가 선보인다. 달항아리는 조선 17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되기 시작해 주로 18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사리 가마는 18세기 최상급의 순백자와 청화백자를 생산한 가마로 손꼽힌다.
일반적으로 달항아리라 하면 높이 40㎝가 넘고 몸체 위와 아래를 각각 따로 만든 뒤 이어 붙인 백자를 통칭한다. 이 때문에 좌우가 대칭되지 않고 약간 이지러진 모습을 보인다. 굽의 지름이 입구의 지름보다 좁아 다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면면이 실제 달을 연상시키는 매력이 있다. 예전엔 ‘백자대호(白磁大壺)’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20세기 들어 붙여진 달항아리가 표준 용어로 정착했다. 우람한 형태와 풍만한 곡선, 표면의 부드러운 흰색이 어우러져 현대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며 사랑받는다.
높이 46.0㎝의 달항아리 등 4건 7점(국보 4점)을 한데 만나는 전시는 전북 남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6.18~8.25)과 강원도 양구 백자박물관(9.12~12.8)에서 열린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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