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군 700명 수장된 해변에 무심한 야생화 단지
중앙일보
입력 2024.08.09 00:23
서해 풍도의 야생화와 청일전쟁
김정탁 노장사상가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남쪽으로 1시간 반 정도 달리면 풍도(楓島)라는 조그만 섬을 만난다. 얼마 전만 해도 풍도(豊島)였는데 일본인이 지었다고 해 이 섬에 단풍나무가 많은 이유를 들어서 ‘단풍나무 풍(楓)’으로 바꾸었다. 풍도는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안산이지만, 아산만 입구에 있어 거리상으로는 충남 당진이나 서산에 훨씬 가깝다. 그래서 밤이 되면 서산 대산산업단지의 불빛에 눈이 부시다.
풍도가 우리 기억에 새로운 건 청일전쟁이 시작된 곳이어서다. 1894년 7월 일본 군함 세 척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순양함 제원호(濟遠號)와 포함 광을호(廣乙號)를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제원호와 광을호는 충남 아산에 상륙하려던 청군을 호위하기 위해 정박해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때 이루어진 기습공격은 청일전쟁 초반의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일본 해군은 그 후 이를 일반적 전술로 채택했다.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도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시작한 게 이래서다.
민비의 동학 진압 요청에 청 파병
풍도 앞바다서 일 기습, 전쟁 발발
양국 원로 말렸지만 젊은층 강행
일 천황 “내가 일으킨 싸움 아니다”
시모노세키 협정 청 피해 막심
동아시아 종주국 지위 완전 상실
풍도 최고봉인 후망산(해발 176m) 자락에서 바라본 풍도항 전경. [사진 김정탁]
기습공격이 있었어도 그때까지 청군 사상자 수는 많지 않았다. 제원호는 뤼순으로 도망가고, 광을호는 좌초해 나포돼서다. 그런데 영국서 빌린 고승호(高陞號)가 풍도 앞바다에 들어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 배에는 청군 950명이 승선했는데 일본 해군의 낭속함(浪速艦)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포격해 침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때 도고는 영국 선원만 구조하고, 청나라 선원과 병사는 바다에 그대로 내버려 뒀다. 다음날 프랑스 군함이 지나가다 구조했기에 그나마 200여 명은 살아났다.
국제법 말썽 피하기 위해 고의 수장
바다에서 본 풍도항 모습. [사진 김정탁]
도고는 러일전쟁 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쓰시마 앞바다에서 발트함대를 무너뜨리고 국민적 영웅이 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이런 비인도적 행위를 저질렀을까? 부하 히토미(入見) 대위를 고승호에 파견했을 때 이 배가 청나라 병사를 싣고 아산에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정선을 명령했는데 영국인 함장이 수용했음에도 청군 지휘관이 불응해 4시간을 기다린 끝에 포격했다. 영국 상선에 대한 포격이므로 국제법상 문제가 될 수 있어 유리한 증언을 할 거로 예상되는 영국인 선원만 구조하고, 청나라 병사는 해상에 죽게 놔뒀다.
청과 일본은 어째서 남의 나라 바다에서 이처럼 충돌했을까? 동학 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선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한 게 발단이 되었다. 처음에 조선은 관군으로 진압하려고 했는데 홍계훈이 이끄는 정예군이 동학군에게 패해 전주 감영까지 뺏기자 청에 도움을 청했다. 이때 민씨 정권이 앞장서고, 민씨 정권 핵심인물인 민영준(閔泳駿)이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에 나섰다. 동학군이 민씨 정권 타도를 부르짖고 봉기한 데다 민씨 일족과는 숙적인 대원군과 제휴하려고 들자 당황한 민씨 정권이 청의 힘을 빌려서라도 동학군을 제거하고 싶었다.
정근영 디자이너
당시 조정의 최고 원로인 영돈녕부사 김병시(金炳始)는 민란은 선량한 백성이 탐관오리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소란을 피운 건데 이들을 비도(匪徒)로 단정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청나라 군대까지 빌려서 토벌하려고 하니 엄청난 실책이라며 분개했다. 한편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통고해야 하는데 그러면 일본도 파병하므로 조선에서 양국 군대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갑신정변 타격, 일 10년간 별러
풍도 해안가 풍경. 130년 전 청나라 해군의 시신들이 이곳으로 밀려와 쌓였다고 한다. [사진 김정탁]
아니나 다를까 일본은 청군이 파병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사전에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갑신정변 이후 약 10년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청에 빼앗겨 일본은 이를 만회하고자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왔다. 사실상 일본군 책임자였던 가와가미 소로쿠(川上操六) 참모차장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조선에서 청군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했다. 이에 전략 단위의 일본군을 파견해 충돌 교전의 빌미만 생기면 단 한 차례의 공격으로 압승할 수 있게끔 철저히 준비했다.
특기할 점은 일본의 조선 현지 책임자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군 파병에 반대하는 등 온건한 태도를 보인 데 반해 본국 수뇌부인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상은 강경해 군 파병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중국의 조선 현지 책임자 위안스카이는 파병을 촉구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인 데 반해 본국 톈진의 리훙장(李鴻章)은 가능한 파병을 피하려고 온건한 태도를 보여 일본과는 반대였다.
풍도 해안가 풍경. 130년 전 청나라 해군의 시신들이 이곳으로 밀려와 쌓였다고 한다. [사진 김정탁]
그래서 청이나 일본이나 리훙장과 오토리 같은 늙은이는 온건했고, 무쓰와 위안스카이 같은 젊은이는 강경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을 가리켜 양국의 젊은이들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말한다. 일본 정계 최고 원로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군 최고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조차 파병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으니 이런 소리도 나올만했다. 메이지 천황도 “이 싸움은 대신들이 일으킨 싸움이지 짐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다”라며 못마땅해했다.
풍도에 핀 다양한 야생화. 130년 전 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을 유혹한다. 복수초. [사진 김정탁]
이토 수상은 천황의 이런 뜻을 알아차리고 참모본부에 아산만에서 청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청하고, 오토리에게는 위안스카이와 협의해 사태를 평화적으로 종결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도 무쓰 외상은 오토리 공사에게 일본이 조선에서 우세를 점해야 하니 이를 위해 노력하다가 평화가 깨져서 전쟁이 터지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전적으로 질 테니 소신껏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청과 일본은 결국 풍도 앞바다에서 충돌했고,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풍도에 핀 다양한 야생화. 130년 전 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을 유혹한다. 풍도바람꽃. [사진 김정탁]
풍도 앞바다에서 해전의 승리는 성환과 평양에서 육전의 승리로 이어지고, 황해해전에서도 청의 북양함대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만주로 거침없이 향했다. 진격이 이처럼 신속히 이뤄진 건 평양전투에서 청군이 자멸에 가까운 패배를 해서다. 평양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180명인데 반해 청군 전사자는 2000명을 넘었고, 또 대부분 패주하면서 죽었다. 청군이 버리고 간 포가 40문, 소총이 1만 정이었는데 이것도 패주하면서 버려졌다. 게다가 지휘관의 것으로 보이는 상자 12개에는 금괴 67개, 금 촛대 61개가 있었다. 사금도 14상자나 되었고, 군자금으로 보이는 10만 냥의 은화도 있었다.
풍도에 핀 다양한 야생화. 130년 전 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을 유혹한다. 풍도대극. [사진 김정탁]
평양전투에서 청군의 손실이 아무리 커도 시모노세키 종전 협상에서 청이 일본에 배상한 것에 비하면 약과다.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이 일본의 영토가 된 데다 2억 3000만 냥의 전쟁 배상금까지 물게 돼서다. 이 금액은 당시 청나라 1년 세수의 3배, 일본 1년 세수의 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배상금 중 상당액이 야하타 제철소 건설에 쓰였는데 이 제철소가 완성되면서 일본은 자력으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치를 능력도 갖추었다. 그렇더라도 청에 가장 뼈아픈 손실은 동아시아 종주국의 지위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조선에 불어온 전쟁의 후폭풍
풍도에 핀 다양한 야생화. 130년 전 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을 유혹한다. 붉은 대극. [사진 김정탁]
조선에도 당연히 후폭풍이 불어왔다. 한반도가 일본과 청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으로 변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을사보호조약이란 강압적 절차를 거쳐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서 제압하고, 갑신정변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조선으로선 당연한 업보라 할 수 있다. 이때 고종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일본군을 설득해 이들에게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요청했다고 하니 이 대목에선 말문이 막힌다.
풍도는 야생화의 천국이라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들로 제법 붐빈다. 이 야생화를 보고 있으면 130년 전 풍도 앞바다에서 말없이 죽어간 청나라 병사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1995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 장안의 화제가 됐던 TV 연속극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으로 나와 우리 귀에도 익숙한 ‘백학’에선 고국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은 러시아 병사들이 하얀 학이 돼 하늘로 올라갔다고 노래한다. 풍도 앞바다에서 죽은 청나라 병사들도 풍도의 야생화로 다시 태어난 건 아닌지. 이들의 시신이 쌓인 해안가와 야생화 단지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9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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