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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악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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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국악]

왕산악 거문고 제작, 우륵 가야금 전파… 박연은 아악 정비

우리나라 3대 악성

이동희 경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입력 2024.07.04. 00:30업데이트 2024.07.04. 09:34
 
 
 
 
 

내년 9월 충북 영동에서 세계국악엑스포가 열려요. 영동세계국악엑스포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과 공연을 주제로 최초로 개최하는 엑스포입니다. 영동군은 국악 관련 활동이 굉장히 활발한 지자체인데, 영동군이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명인 박연(朴堧)의 고향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3대 악성’은 누구일까요? 악성은 악지성인(樂之聖人)의 줄인 말로, 음악에 있어서 성인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입니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 조선의 박연을 우리나라 3대 악성이라고 부르지요. 3대 악성의 업적을 자세히 살펴볼게요.

검은 학 춤추게 한 왕산악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든 사람이에요. 왕산악과 거문고에 대한 일화는 ‘삼국사기’에 소개돼 있어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이 줄이 7개 있는 칠현금(七絃琴)이라는 악기를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지만 소리를 내는 방법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구려 왕은 이 악기의 연주 방법을 알아내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당시 ‘제2상(第二相)’이라는 벼슬에 있던 왕산악이 그 악기를 뜯어 고쳐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새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100여 곡 지었다고 합니다. 물론 왕에게 후한 상도 받았겠죠.

                       1994년 정부가 지정한 왕산악의 표준 영정. 거문고를 연주하는 왕산악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어느 날, 왕산악이 자신이 만든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검은 학이 날아와 우아하게 춤을 췄다고 해요. 이것을 본 사람들은 아주 좋은 징조라고 기뻐했고, 그때부터 이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 줄여서 ‘현금(순우리말로 거문고)’이라 부르게 됐대요.

현금에서 ‘현(玄)’은 하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금은 ‘천금(天琴)’을 뜻하기도 하죠. 또 ‘거문’은 옛 언어로 신성함을 뜻한다고 하니 거문고가 당시에 얼마나 중요한 악기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검은 학이 날아와 우아하게 춤을 췄다는 얘기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정사(正史)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에 수록돼 있는 걸 보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는 고구려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지배층이 가장 사랑하는 악기로 자리 잡았어요.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이 취미나 자기 수양 목적으로 즐겨 연주했습니다.

신라 진흥왕 감동시킨 우륵

우륵은 신라에 멸망한 가야 사람으로, 가야금 연주자이자 작곡가예요. 신라에 망명해 가야의 악기인 가야금의 명맥이 신라에서 이어질 수 있게 한 인물입니다.

                                            1977년 정부가 지정한 우륵의 표준 영정. /국립현대미술관

 

우륵과 가야금에 대한 일화도 ‘삼국사기’에 소개돼 있어요. 신라가 가장 번창했을 때 영토를 크게 확장한 진흥왕은 각 지역을 돌며 국경을 확인하던 중 낭성(현재 충북 청주)이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한 신하가 가야에서 망명해온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금’이라는 악기를 매우 잘 연주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흥왕은 우륵과 이문을 불러 악기 연주를 부탁했고, 두 사람은 가야에 있을 때 작곡했던 곡들을 연주했어요.

 

12개 줄이 끊어질 듯이 옮겨지며 이어지는 가야금 소리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죠. 서라벌 궁으로 돌아온 진흥왕은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고, 신라인들도 빨리 그 아름다운 가락을 배우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륵을 불러 오늘날 충북 충주에 해당하는 국원이라는 곳에 집을 지어주고 계고, 법지, 만덕이라는 높은 신분의 세 사람을 보내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우륵의 음악을 ‘번잡하고 음란하다’ ‘우아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허락도 없이 편곡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우륵은 처음에 화를 냈지만, 결국 ‘즐겁지만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바른 음악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고 해요. 스승의 음악을 마음대로 바꾼 것도, 우륵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가 잘 안 되지요. 우륵은 망한 나라에서 망명한 사람이었고, 우륵의 음악은 가야의 음악이었으므로 신라 사람 입장에서는 이국적이면서도 어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진흥왕은 편곡된 음악을 신라 궁중 음악으로 삼았고, 그 후 가야금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악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무한 신뢰한 박연

처음에 소개했던 박연은 세종대왕의 어명을 받아 제사 음악인 ‘아악’을 완벽하게 정비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아닐까 합니다. 박연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접하는 수많은 전통 악기의 복원과 제작, 국악의 음높이 설정, 제사 음악의 정비가 모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박연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 /국립국악원

 

세종대왕은 즉위 후 아악을 바로잡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선 음악성이 뛰어난 신하가 필요했어요. 원래 박연은 음악 관련 일을 하던 관리가 아니었는데, 세종대왕에게 발탁돼 이 일을 맡게 됩니다. 박연은 먼저 율관(律管)을 제작했어요. 율관이란 음악에 쓰는 율, 즉 기본이 되는 12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원통형 대나무 관을 말해요. 박연은 율관에서 나는 음을 기반으로 편경, 편종 같은 중요한 아악기를 제작했어요. 그 외에도 고려 후기 이후 망가지거나 없어졌던 수많은 아악기들을 복원했죠. 세종대왕은 그런 박연을 무한 신뢰했다고 합니다.

영동에 가면 그의 호 ‘난계’를 딴 ‘난계국악박물관’ ‘난계국악축제’ ‘난계국악단’ ‘난계국악기제작촌’ ‘난계사’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듯이, 박연의 흔적은 영동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죠. 박연이 있었기에 국악이 존재할 수 있게 됐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이동희 경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