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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내리막길에 접어든 국가의 역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2. 16. 13:27

국가 앞세운 동서양의 근대, 문명의 종착점일까

중앙일보

입력 2024.02.16 00:53

업데이트 2024.02.16 09:40

 

내리막길에 접어든 국가의 역할

김기협 역사학자

 

문명 전파가 남북보다 동서 방향으로 쉽게 이뤄지는 경향을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 1997)에서 설명했다. 문명의 바탕이 농업에 있고, 농업 기술은 비슷한 기후대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가 동서축을 따라 동아시아권-인도권-이슬람권-기독교권으로 대략 구분되어 진행된 것도 이 까닭이다. 크게는 동양과 서양이 대비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끊임없이 동서 방향으로 밀고 당긴 데 비해 남북 방향의 교섭은 호흡이 길었다.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문명의 시간-사건의 시간’의 구별이 이런 차이를 말한 것 아닐까. 기본 특성을 공유하는 문명들 사이의 교섭이 일상적으로 이뤄진 반면 문명의 틀이 크게 다른 지역들 사이에는 규모가 큰 변화가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동서양 침입 전의 남방 해양문명이
북방 초원문명과 함께 새 길 암시

근대 이전 장거리 교역의 주도자
21세기 세계 모델로 검토할 가치

인류 위기 키우는 국가 간 대결
이념화된 국가주의 반성하는 길

농업문명의 변방, 남양과 북막

인도네시아 자바 선박의 1610년 그림. 자바 선박을 ‘종(jong)’이라 하는데, 중국 선박을 ‘정크(junk)’라 하는 것도 이 기술과 함께 넘겨 받은 이름이다. 근대 이전의 장거리 교역은 남방 해양문명이 이끌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일련의 농업문명이 자리 잡은 온대 지역의 남쪽과 북쪽에서 인간 활동에 꽤 적합한 조건을 동남아 도서 지역과 내륙 초원지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지역은 농업문명의 변방이라는 기본 조건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조건도 지녔다.

건조-한랭 기후의 초원지대는 농업과 상호보완 관계의 생산양식으로 유목을 발전시켰다. 이 상호보완 관계 때문에 유목민은 농경세력과 접촉과 충돌이 많았다. 반면 도서 지역 주민은 농경세력과 상호의존도가 낮아서 교섭이 적었다. 충돌도 적었다.

남양(南洋)과 북막(北漠) 사이의 이 차이가 언어의 분포에도 나타난다. 남양에서는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이 인도양에서 태평양에 걸쳐 압도적이다. 북방에도 이와 비슷한 광역 언어체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 위에 ‘우랄-알타이(Ural-Altaic) 어족’이 19세기 중엽부터 제안되었으나 치밀한 연구의 진행에 따라 학설로서 힘을 잃었다.

남양에 비해 북방 초원의 언어 분포가 복잡한 것은 여러 농경세력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이다. 유목세력들 사이보다 인근 농경세력과의 관계가 더 큰 작용을 하면서 초원지대의 문화 구성이 복잡해진 것이다. 기원전 9세기~2세기에 동유럽에서 시베리아까지 퍼졌던 스키타이 문화 이후로는 초원지대에 그만큼 널리 퍼져나간 문화현상이 다시 없었다.

유목민의 기마술, 남양인의 항해술

중국 난징조선소 유적에 세워진 명나라 정화함대 선박의 모형. 길이가 63m에 이른다. [사진 위키피디아]

 

생산력 발전이 빠른 농경세력 앞에 초원의 유목민과 동남아 주민이 자기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이 기동력이었다. 유목민의 기동력은 기마술로, 남양인의 기동력은 항해술로 나타났다.

유목이란 생산양식 자체가 기마술 덕분에 가능했다. 농경지대 확장에 따라 자연조건이 척박한 곳으로 밀려난 목축 활동이 기마술을 활용해 ‘규모의 경제’를 이룬 생산양식이 유목이다. 식물자원을 키우는 농업과 동물자원을 키우는 유목은 상호보완 관계이면서, 또한 자연자원을(토지) 놓고 다투는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접촉과 충돌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대륙인이 강과 호수, 해안을 겨우 항행할 때 남양인은 차원이 다른 항해술을 일상생활을 통해 발전시켰다. 10세기경까지는 남양인이 원양 항해를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장거리 교역이 자라남에 따라 대륙세력의 조선술과 항해술도 발전을 시작했으나 13세기까지도 남양인의 우위가 지켜진 사실을 쿠빌라이칸의 자바 원정(1293) 실패가 보여준다.

남양과 대륙 사이 교역은 문명 초기부터 조금씩 생겨났다. 처음에는 향료 등 남양의 원료와 도자기·금속제품 등 대륙의 공산품이 간간이 전달되며 서로에게 사치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역이 지속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고 교역량과 품목이 늘어났다. 교역의 수요는 시장 규모가 커진 대륙 쪽에서 더 빨리 자라났고, 그에 따라 대륙세력이 교역의 중심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다.

유럽인의 ‘정복’과 중국인의 ‘침투’

말의 사역에 필수적 요소인 재갈. 기원전 3500~3000년께 중앙아시아 보타이문화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갈을 물린 자리가 말의 두개골 이빨 사이에 남아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5세기에 이르러 대륙세력의 해상활동 능력이 남양인을 압도하게 된 상황을 정화(鄭和) 함대가(1405~1433) 보여주었다. 남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운 위에 대륙의 경제력과 조직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그리고 16세기 들어서는 포르투갈을 필두로 전투력을 앞세운 유럽세력이 인도양을 휘젓기 시작했다.

내가 본 책 중 동남아 역사를 가장 넓고 깊게 다룬 것이 앤서니 리드의 『통상(通商)시대의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 2책, 1988·1993)였다. 리드가 말하는 ‘통상시대’란 대륙세력이 남양 해역에 대거 진입한 시대였다.

이 시기 남양에 진입한 대륙세력에 중국인과 유럽인의 두 갈래가 있었다. 중국인의 진출이 본국의 해금(海禁)정책 때문에 살금살금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반면 유럽인의 진출은 본국의 지원 아래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럽인이 공식적 권력을 장악하는 ‘정복’과 중국인이 실질적 중간권력을 형성하는 ‘침투’가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동남아 근대사에서 유럽세력의 정복 활동만큼 주목받지 못하던 중국인의 침투 현상에 최근 연구자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멜리사 매콜리는 『머나먼 바닷길』(Distant Shores: Colonial Encounters on China’s Maritine Frontier, 2021)에서 중국 동남해안 차오저우(潮州) 사람들의 동남아 활동 영역을 ‘차오저우 해상왕국(Maritime Chaozhou)’이라 부른다. 공식적 식민지는 아니라도 실질적인 식민활동의 의미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를 넘어

농업전파도. 농업의 발생 지역과 초기의 전파 방향. 태평양 뉴기니에서 농업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사실은 최근에 밝혀졌다.

 

‘차오저우 해상왕국’의 구성에 매콜리가 접착제로 쓰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통-공간성(trans-localism)’과 ‘통-시간성(trans-temporalism)’이다.

통-공간성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빠른 근대세계에서 널리 나타난 개념이다. 차오저우에서 벌어진 상황이 홍콩·상하이와 동남아 각지에 파장을 일으키는 일, 그리고 각지의 차오저우인 디아스포라에서 일어난 변화가 고향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계속된 것을 저자는 확인한다.

이에 비해 통-시간성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1869~1873년 기간의 참혹한 ‘청향(淸鄕)’ 사태가 그 후 차오저우 지역과 타지 차오저우인 집단의 폭력성과 이어지는 원리를 저자는 ‘통-시간성’으로 설명한다. 여러 곳에서 ‘차오저우방(潮州幇)’이 폭력조직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상황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주는 ‘심증’은 되지만, 역사학도에게는 ‘물증’이 아쉽다.

남양의 역사, 특히 남중국과 동남아의 관계를 살핌에 있어서 매콜리의 ‘통-시간성’이 중요한 문제로 계속 떠오를 것 같다. 물증이 심증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는 종래 역사기록의 편향성에서 흔히 파생된다. 기록자의 의식을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후세 연구자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근대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기록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큰 기준이 국가에 있었다. 국가의 존재가 역사기록 생산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이 대륙보다 취약했던 남양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는 물증 아닌 심증이라도 중시할 필요가 있겠다. 적어도 고찰의 출발점을 찾아내는 데는 꼭 필요할 것이다.

‘남양사’ 새 연재, 중앙일보 온라인에 계속됩니다

‘근대화 뒤집기’ 연재를 이번 28회로 마칩니다. ‘근대’라는 시대의 의미를 힘닿는 대로 뒤집어가며 살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과연 근대가 역사의 종착역인지 확인하는 일을 50년 역사 공부의 마무리로 삼은 것은 ‘역사의 종말’을 믿지 않는 제 역사관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제도인데, 근대에 이르러 다른 모든 제도를 압도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국가 중심의 도덕관이 근대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국가의 역할 퇴조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주의 도덕관이 아직 버티고 있어서 인류사회를 안정보다 불안정으로 몰고 가는 위험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가 이후’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 이후’의 전망에 ‘국가 이전’이 참고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남양사’를 공부하려 합니다. 국가 중심의 동양사·서양사가 지배해 온 역사의 무대에 국가의 역할이 작았던 남양사를 함께 올려놓음으로써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역사관의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새 연재는 다음달 2일부터 매주 토요일 중앙일보 온라인 콘텐트로 선보입니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