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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궁예·왕건의 갈림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2. 2. 13:29

호족 품고 정치보복 멀리한 왕건, 민심은 그를 택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4.02.02 00:35

견훤·궁예·왕건의 갈림길

이익주 역사학자

우리 역사에는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왕이 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견훤, 궁예와 왕건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 중 두 사람은 2대를 채 가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후대인의 생각일 뿐, 당시로서는 자기 힘으로 나라를 세운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사주 관상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왕이 될 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같지 않았다. 견훤과 궁예는 실패했고, 왕건은 성공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견훤은 장군, 궁예는 도적 출신

철원의 태봉 도성터.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중앙을 관통한다. 내성(둘레7.7㎞)과 외성(둘레 12.5㎞)으로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견훤은 867년 상주 가은현(지금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고 했으니, 신라 말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 가운데 세력이 약한 중소호족이었다. 견훤이 젖먹이일 때 부모가 일하느라 수풀 속에 혼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전설이 있다. 장성해서는 체구가 컸고, 그에 어울리게 군인이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신라 진성여왕 치세로 전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농민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창끝을 돌려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했다고 하는데,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무진주(지금 광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892년의 일이었다.

백제·고구려 각각 계승 견훤·궁예
복수심 불탄 지역 맹주라는 한계

포악하지 않은 왕건 정치가다워
세금 3분의 1로 줄이는 위민정치

 

시대 과제 잘 풀어야 좋은 군주
역사의 승자로 평가받아 마땅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다른 데서는 확인되지 않고, 당시에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니, 궁예 혼자만의 주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삼국사기』에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불길하다는 예언이 있어 왕이 죽이라고 명했고, 유모가 극적으로 구해다 키웠고, 그 과정에서 눈을 찔려 한 눈이 멀게 되었다는, 상투적인 스토리가 이어진다. 10대에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가 마침 농민 반란의 혼란 속에 기훤의 부하가 되어 도적의 길로 들어섰다. 곧 기훤을 버리고 양길 휘하로 들어갔지만 얼마 뒤 양길마저 배신하고 자립했다. 그 뒤 세력을 키운 끝에 901년, 스스로 왕이 되어 견훤과 대결을 벌였다.

고려 국호에는 복수욕 안 드러나

논산 개태사 석조 삼존불입상. 후백제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고려군에 항복한 장소에 세워진 불상이다. 개태사는 936년 후백제 멸망 후 창건하기 시작해서 940년에 완성됐다. [사진 문화재청]

왕건은 송악군(지금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뒷날 고려 왕실에 용손(龍孫) 전설을 남겼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이야기는 왕건의 조상이 서해를 무대로 당나라를 오가며 무역을 했던 사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먼 조상부터 집안 형편을 얘기할 때는 언제나 부유했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신라 말 농민 반란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자 왕건의 아버지 용건은 궁예에게 귀부해서 멸문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었고, 그 아래에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실력을 키우다가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왕이 되는 과정이 견훤이나 궁예만큼 극적이지 않지만, 그 대신 안정적이었다.

세 사람은 왕이 되는 길이 서로 달랐다. 궁예는 도적에서 출발해서 왕이 되었고, 견훤은 도적을 진압하는 군인으로 시작해서 왕이 되었다. 왕건은 유력한 호족으로서 실력을 쌓아 왕이 되었다. 왕이 된 뒤에는 나라 이름을 새로 정했는데, 여기서도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지금 전주)에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정했다(※후백제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앞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후고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당과 신라가 함께 백제를 공격해서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완산에 도읍하고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어찌 씻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궁예도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해서 고구려를 깨트렸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당시에는 고구려·고려를 혼용했다).” 두 사람 모두 200년도 더 지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꺼내 들며 신라에 대한 복수를 선언했다. 아마 그 지역 사람들을 결집하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로는 다른 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없었다. 반면, 왕건의 국호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담고 있을 뿐 신라에 대한 복수 의지가 들어있지 않았다.

견훤·궁예 호족 지지 못 얻어 실패

강진 무위사 선각 대사비. 946년에 건립된 선각대사의 탑비다. 선각대사는 917년 궁예에 의해 처형당했다. 비문에 나오는 ‘대왕(大王)’이 궁예인지 왕건인지를 두고 논쟁이 진행 중인데, 궁예가 맞다면 궁예가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점령한 것으로 되어 기존의 통설이 바뀌게 된다. [사진 문화재청]

국왕으로서의 자세도 달랐다. 가장 정치가다운 모습을 보인 사람은 왕건이었다. 왕건은 후삼국의 경쟁이 각 지방의 독립 세력, 즉 호족들의 지지에 따라 판가름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즉위 직후부터 호족들에게 ‘중폐비사(重幣卑辭·후하게 대접하고 높히 대우함)’를 약속했고, 스물아홉 번이나 되는 정략결혼을 통해 호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견훤은 많은 것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실제로 견훤의 군사력은 왕건보다 강했고, 백제군은 930년 고창군(지금 안동) 전투에서 충격의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고려에 진 적이 거의 없었다. 궁예도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워 한때는 신라 영토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강성했다. 나라 이름을 마진, 태봉으로 고치면서 대동방국(大東方國)을 꿈꿨으며, 말년에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이상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다른 호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자신만의 꿈이었다. 왕건과 달리 견훤과 궁예는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고,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지난해 말 태봉의 연호 ‘정개(政開)’가 적힌 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 조각)이 발굴된 경기도 양주 대모 산성의 집수시설. 목간에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목간 중 가장 많은 글자(총 8행·123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후삼국의 분열은 신라 말의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한 민심 이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의 성패를 결정짓는 근본 요인은 민심의 향배였다. 왕건은 왕이 된 지 34일 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 토지 1경(頃, 1경은 100부)의 세금이 6석(石, 1석은 150승)에 이르니 백성들이 농사짓고 살기가 어렵다. 내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노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십일조의 법을 써서 토지 1부(負)의 세금이 3승(升)이 되도록 하라.” 이 말에 따르면 고려 농민들의 세금은 3분의 1로 경감될 것이었다. 전쟁 중에 세금을 줄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왕건은 민심을 택했고, 이 결정을 왕건의 ‘위민(爲民) 정치’ 즉 백성을 위하는 정치라고 평가한다. 견훤과 궁예에게서는 이런 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

난폭한 권력자의 끝 안 좋아

충남 논산의 견훤왕릉.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은진현조의 “후백제왕 견훤의 묘가 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무덤을 견훤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마지막으로, 견훤과 궁예에게는 왕건에게 없는 모습이 있었다. 포악함이다. 927년에 견훤이 신라 서울 금성(지금 경주)을 침략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군사들을 풀어 약탈하고, 신라왕을 잡아다가 보는 앞에서 죽였으며, 왕비를 능욕했다. 일국의 왕이 도적 두목이나 하는 짓을 했던 것이다. 궁예는 더했다. 직언하는 신하를 철퇴로 때려죽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미륵관심법을 터득했다면서 의심 가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 심지어는 자기 부인과 두 아들도 죽였는데, 부인을 죽일 때는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평소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기가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했을 때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난폭한 권력자의 끝은 언제나 좋지 못했다.

견훤과 궁예와 왕건 가운데 누가 좋은 사람인가? 당연히 왕건이다. 역사에서 좋은 사람이란 도덕적인 판단이 아니라 시대의 과제를 잘 해결한 사람을 말한다. 왕건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왕건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승리한 사람일 뿐이며, 승리했기 때문에 미화되었고 패배한 견훤과 궁예는 악마화된 것이란 주장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를 그렇게만 보면 성공한 사람에게서 승리의 비결을, 실패한 사람에게서 패배의 원인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역사란 결국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불신이 힘을 얻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기 어려운 세태를 반영한다.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