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유물과의 대화

‘500년 실록’ 현대어로 옮기는 고전번역가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2. 12. 15:27

 

음탕한 관료 부인도 기록됐다, 조선왕조실록 ‘집요한 번역’

  • 카드 발행 일시2023.11.

 

⑧ ‘500년 실록’ 현대어로 옮기는 고전번역가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MBC 드라마 ‘연인’에는 병자호란(음력 1636년 12월∼1637년 1월) 직후 청에 끌려가 치욕을 겪고 돌아온 주인공 길채(안은진)가 남편 구원무(지승현)에게 이혼을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시청자가 이 대목에서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가능했나’ 갸웃거렸다. 결론만 말하면 가능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아내와 이혼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선조실록, 인조실록, 효종실록 등에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검색서비스(웹) 창에 ‘이혼’을 쳐보면 국역 415건이 검색된다(일부는 사람 이름 등 동음이의어). 물론 여성이 아니라 남성 쪽에서 주장하는 일이 절대다수였다. ‘연인’에서 길채를 향한 사회적 손가락질을 보여주는 이런 기사(기록)도 있다.

“역적의 딸도 이혼하게 하는 예가 있는데 지금 이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지 않습니까.”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6월 13일 갑진 두 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왼쪽부터 각각 세조혜장대왕실록, 선조소경대왕실록, 영종대왕실록, 철종대왕실록. 사진 문화재청(국가기록원 소장)

 

‘국역’이라는 검색 결과가 드러내듯, 실록 원문은 한자로 돼 있다. 달리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거대한 분량의 한문 기록유산이 국문으로 번역돼 있지 않다면 현대 한국인이 이를 참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때 번역이란 단지 한문을 우리말 어순과 문맥으로 옮기는 게 아니다. 당대 사회 정치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뿐 아니라 중국 주요 고전과 때로 풍수나 역술 같은 특수 분야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제대로 옮길 수 있다. 한문만 잘한다고, 역사를 전공했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얘기다.

 실록이란 게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완결체인데, 그 원문을 오늘날 어법에 맞게 번역함으로써 연구자나 일반 대중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게끔 돕는 작업을 합니다. 여느 나라에도 관찬(官撰, 기관에서 편찬) 사료가 있지만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되는 동안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 또한 시대의 정치·경제·문화를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실록의 가치는 무궁무진하죠. 

1993년 일차적으로 완역된 조선왕조실록을 ‘현대어’로 다시 옮기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 담당자들의 말이다. 올해는 실록 완역 30주년. 현대의 우리 삶이 조선왕조 기록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계속 읽히고 재번역되는 이유가 그 기록이 가진 의미와 가치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번역현대화 사업엔 외부 촉탁 위원을 비롯해 많은 인원이 관여하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김옥경(61)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책임연구원, 김현재(41)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35)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을 만났다. 분량 관계상 두 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윗 세대가 남긴 고어투 번역과 오류를 시정하고 개선해 한층 매끄러운 우리말로 풀이하고 있는 ‘신역 조선왕조실록’은 한국고전종합DB 내 신역 조선왕조실록에서 만날 수 있다. 현재 태조·정종·태종·정조실록이 신역으로 서비스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만난 김옥경 고전번역실 책임연구원, 김현재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왼쪽부터). 현재 성종실록 번역 작업을 진행 중이다. 김종호 기자

 

1960년대 국역 시작…북한에 한발 늦게 완역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니까 그런 제목의 기록물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요. 실록이란 전대 왕의 업적과 시대를 총괄한 편년체 기록물이라 실제론 『태조실록』 『세종실록』 『정조실록』식으로 나뉘어 기록됐습니다. 다 묶어서 후대의 한국인들이 임의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할 뿐이죠. 현재는 『성종실록』 새 번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하 발언을 인용할 때 발언자를 특정해야 할 경우에만 괄호 속에 밝힌다.)

📌 세종실록이라는 제목은 없다?! 실록 표지 제대로 읽기

엄밀히 말하면 태조실록도 실록 원본 제목이 아니다. 각 실록 표지에 나온 제목은 태조의 경우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 세종은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정조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이다. 성종은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이라 돼 있다.
원서의 표지에 적힌 방식은 1) ‘묘호·시호’가 기재된 경우, 2) ‘묘호·시호·존호’가 모두 기재된 경우, 3) ‘묘호’만 기재된 경우가 두루 있다. 태조·세종·성종은 1)이고, 정조는 2)의 경우다. 3) 묘호만 기록된 경우는『명종대왕실록(明宗大王實錄)』,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 『효종대왕실록(孝宗大王實錄)』 등이다.
폐위된 왕의 기록엔 실록이란 단어를 쓰지 않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로 각각 전해진다. 시호나 묘호 없이 군호(君號)로 제목을 썼다. 단종은 세조 때 노산군으로 강등돼 죽는 바람에 원래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편찬됐다가 숙종 대에 추존되면서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표지가 바뀌었다.

신역 작업이 시작된 건 2012년. 1960년대 착수 시점으로부터 반세기, 완역(1993년) 기준으로도 20년 남짓 지나면서 고어투 번역이 현대식 독해와 맞지 않게 됐다. 번역 당시 역사적 정보나 이해 부족으로 인해 오역했던 것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한자어와 전문용어에 대한 해설 보완 등 요구사항도 늘었다. 구(舊)번역은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국고전번역원(이하 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민추, 1965~2007)가 나눠 했지만 현재는 교육부 산하 학술연구기관인 번역원이 국책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실록 번역은 현대 영어나 일본어를 옮기는 일과 차원이 다른 내공과 탐색을 요한다. 한자어를 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간단한 예로 최소영 연구원은 성종실록 속 ‘금년생(今年生)’을 들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요즘도 올해 태어난 ‘금년생 송아지’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처음엔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금년에 태어났다는 뜻이구나 했어요. 구번역도 ‘금년에 낳은 딸’로 돼 있고요.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이미 10년 전에 죽었다고 나와요. 이후에도 누구의 아내가 금년생이라든가 어떤 남자가 두 살인데 금년생이라는 식으로 자꾸 나와서 다른 뜻이겠다 했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사건과 관련된 다른 기록물들, 예컨대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을 뒤져본다. 연관된 인물들의 문집도 확인해 본다. ‘금년생’은 최종적으로 노비 매매 문서로 확인됐다고 한다. 알고 보니 여기선 사람 이름이었다.

“노비 문서는 형식이 정해져 있거든요. 이름, 성별, 몇년생 이런 순인데 이름 쓰는 자리에 ‘今年生’이 딱 있고 10년 전에 태어났다고 돼 있어요. 결국 ‘금연생’이란 이름이 당시엔 흔했던 거죠. 실록의 해당 기사도 아버지가 역모에 몰려 죽은 인물인데 딸이 금연생이다, 이런 내용으로 풀이됐어요. 오늘날 쓰이는 한자가 오히려 오역을 부를 수 있는 경우죠.”

노비문서 등 뒤져가며 오류 고쳐 재번역 

이 같은 수정번역이 가능해진 것은 그새 다른 고전 자료들이 많이 국역된 데 크게 힘입고 있다.  『목민심서』 등 각종 저술·문집과 노비문서까지 번역되고 대개는 웹상에서 검색 가능하다. 덕분에 사료 교차 검증이 가능해졌고 “실록의 중심이 되는 위정자들 문제뿐 아니라 기층민들, 말단의 삶에도 좀 더 정확성을 기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고 한다.

똑같은 이유에서 신역의 고충이 커진 점도 있다. 웹상에 수많은 자료가 있고 누구라도 원문을 검색해 볼 수 있으니 때로는 앞선 번역, 혹은 기록 자체의 문제점까지도 문맥에 맞게 정비하거나 주석을 다는 등 부가적 업무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렸을 때부터 중국 고전을 달달 외우니 상소문 곳곳에도 옛 성현 말씀을 인용했죠. 그런데 찾아보면 일부 오류가 있어서 그대로 풀면 말이 안 되고 ‘원래 고문헌 원문은 이거다’ 이렇게 써줘야 하는 경우가 생겨요. 마찬가지로 어떤 사태나 인물에 대해서도 실록에 기록된 게 정확지 않아서 다시 찾아보면 다른 맥락이거나 추가 정보가 필요한 경우가 있고, 그걸 또 설명하면서 길어지고. 끈기 없으면 못하는 일이죠. 

번역현대화 사업은 『정조실록』(48책)부터 시작됐다. 당시 또 다른 사료인 『일성록』 번역이 완료된 터라 조선 후기 제도나 정치·경제·사회 이해가 좀 더 쉬울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후 정조의 선대 왕인 영조부터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 결국 태조부터 차례로 하는 쪽으로 결정됐다. 이렇게 『태조실록』 (3책), 『정종실록』(1책), 『태종실록』(15책)이 완간됐다. 『세종실록』등은 번역 완료 후 출간 및 웹서비스 준비 중이다. 1차 완역 때와 마찬가지로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태조부터 철종까지 총 25대 472년 간의 기록이 사업 대상이다(고종·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구분해서 취급).

올해는 성종 재위 3~10년이 번역되고 있다. 연간 작업은 16책 정도라고 한다. 철종까지 완료 시 총 600책 분량으로 예상된다. 대부분은 외부 번역위원들에게 위촉하고 내부에선 지침 및 평가, 자문을 주로 한다. 대체로 집체번역(다함께 번역함)이다 보니 신입 직원들의 번역을 감수하는 일도 내부 숙련자들 몫이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왼쪽부터 명종대왕실록, 선조소경대왕실록,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 광해군일기. 사진 문화재청(국가기록원 소장)

한국학 진흥 목적…1차 완역되자 관련 논문 급증

“번역할 땐 일단 문리(文理) 파악부터 하죠. 한자로 된 문장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이 있으면 그걸 공부하고 주석을 단다든지, 관련 사건을 정리한다든지 하면서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 번역문 작성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추 시절 구번역이나 북한에서 나온 『리조실록』 도 참고합니다.”

『리조실록』(이조실록)은 1990년 말 완간된 북한의 실록 번역본이다.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장남인 국어학자 홍기문(사회과학연구원 민족고전연구소장)이 지휘해 1975년 본격 착수한지 15년 만에 총 400책으로 마무리됐다. 이미 1960년대부터 번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남한에서도 196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세종실록』 2책을 내놓은 걸 시작으로 1976년 10월 30책까지 펴냈다. 이후 민추까지 가세해 실록 번역 분담을 했지만 작업은 더뎠다. 민간 기관이 국가 지원에 힘입어 진행하던 사업인 만큼 나라 재정이 쪼들리면 지원이 팍 줄어드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북한에 선수를 뺏기자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1994년 3월 2일자 중앙일보가 실록 완간 후일담을 전하면서 12면에 게재한 사진.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의 국역실에서 조선왕조실록 색인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국역전문가들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북한도 하는 걸 남한에서 못 하느냐 그러면서 지원이 확 늘었어요. 당시에 민추에선 실록뿐 아니라 정도전의 『삼봉집』 같은 문집도 번역 중이었는데, 갑자기 ‘실록 올인’ 체제로 바뀌었죠. 80년대 중반부터 속도가 붙어 93년말 총 413책으로 완료됐습니다.”(김옥경)

26년간 연인원 2500명 이상이 참여한 대역사였다. 당시만 해도 손글씨나 타이프라이터로 원고 작업할 때다. 결과물이 200자 원고지 100만 장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1세대 번역자들은 문리에 밝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현재 신역은 구역을 참고하되 당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정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완역된 게 있으니 수정 번역은 쉬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고 한다.

 당시엔 번역자가 원문 텍스트만 갖고 작업했으니, 아무리 당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도 구체적인 사안이나 제도를 옮길 때 오역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웹에 온갖 자료와 사료에다 실록 번역본도 올라와 있으니 해당 원고 전후의 맥락이 광범위하게 파악됩니다. 예컨대 성종 3년 6월 1일의 원문이 모호하게 30년 전 사건을 언급하면 지금은 그게 어떤 사건인지, 왜 언급하는지 밝혀낼 수 있죠. 이렇게 주석을 달고 교감하다보니 훨씬 세밀한 번역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 ‘여성 음행’ 꼼꼼히 기록

아무래도 고전번역은 한문학, 국문학, 고전문학 전공자들이 많이 한다. 실록 같은 사료 번역엔 한자만큼이나 역사 지식도 필요하다. 김현재 팀장은 한문학을 전공했지만 김옥경·최소영 연구원은 사학을 전공하다 고전 공부로 넓혀간 케이스다. 사료를 들여다보기 위해선 고전의 문리를 익히는 게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모두 번역원 내 고전번역교육원 과정에서 7년 이상 수련을 거쳐 입사했다. 1세대 번역자 상당수도 교육원에서 후진 양성에 기여했다.

 실록 번역 시작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 연구, 즉 한국학 진흥에 있었죠. 그런데 중국의 사서삼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옛날 글은 읽을 수가 없어요. 조선시대 사람들이 유교적 세계관에 따라 중국 고전을 체화해서 논리를 펴고 글을 썼기 때문이에요. 한자 세대와 단절되면서 연구자들이 애먹고 있을 때 실록이 국문 번역되니 학계 논문 수가 확 늘었어요. (김옥경) 

당대 기록을 보면 그 시대가 읽힌다. 최 연구원은 “조선 전기에 여성의 음행(淫行)에 대해 집요하게 기록한 정황들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가 언급한 건 예종실록에 나온 단양 군사(丹陽郡事) 아내의 졸기다. 졸기란 “아무개 졸(卒)”이라고 쓴 후에 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의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것이다.

아무래도 출세한 인물 위주고, 특히 여성은 왕가 출신이나 공신의 부인 정도 돼야 쓰였는데 비교적 말단직 관료의 아내란 것부터 이례적이다. 내용도 얼마나 ‘음탕한 여자’인지 강조하는 관점에서 구구절절 기록했다고 한다.

“예종실록 6권에 등장하는 단양군사 남의(南儀)의 아내 이야기예요. 평생 아들을 10명 낳았는데 첫 남편 남의가 죽은 뒤 재혼 상대를 찾았어요. 어떤 이가 정력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 엿보고선 건장한 체격이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혼인했는데요. 남들에게 늘 ‘아공진남자(我公眞男子)’라고 했대요. 요새 ‘찐남자’ 이런 말처럼 내 남편이 진짜 남자라고 자랑한 거죠. 수년 후에 이 남자도 죽었는데, 여자가 슬퍼하기는커녕 새로 시집갈 뜻을 보였다는 내용이 깨알같이 나와요.”

왜 그렇게 집요하게 기록했을까. “간통 들키자 남편 음낭을…” 한 여자만 50년 쓴 실록 속내에서 계속〉

조선왕조실록 사초 이미지. 국가기록원

6·25 때 적상산사고본 인민군 손에…90년『리조실록』 완역

한국고전번역원의 실록 번역은 1차 완역 때와 마찬가지로 태백산본으로 이뤄진다. 누락된 책이나 오탈자가 있으면 정족산본으로 대조한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낙장이 많은 판본) 21책 등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북한의 『리조실록』(이조실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가져간 적상산(전북 무주) 사고본을 옮겼다. 이 경위에 대해 출판저널 1991년 3월 5일자 기사 〈북한판 국역 『리조실록』 어떤 책인가〉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1978년에 간행된 「력사과학」 86호에서 북한사회과학원의 홍기문 원장이 “50년 7월 서울을 점령했을 때 한 도서관에 소장된 실록 원본을 평양으로 옮겨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까지 보도된 바에 의하면 6·25 때 부산으로 소개시켰다가 보관 창고의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고 추정해왔던 적상산본 실록 원본이 북한의 국가귀중문서서고에 보관돼 있으며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일제 때 간행된 영인본으로 ‘李王家圖書之章(이왕가도서지장)’이란 붉은 인장이 찍혀 있어 서울 장서각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과 고서를 6·25 때 가져간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2000년 6월29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사진. 갤러리아 백화점 압구정점이 북한에서 발행한 원본 '리조실록'을 전시·판매하는 '남북평화통일 염원 북한판 리조실록전'을 열고 있다는 내용이다. 중앙포토

 

북한의 국역 작업엔 당시 원로 한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6·25 때 월북하거나 잔류한 학자들이 상당수로 실록 원문 맥락을 두루 꿰고 있으면서 유려한 우리말 문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리조실록』은 한자를 배제하고 우리말 위주로 풀이한 것이 특징이다.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풀어 썼다는 점에서 처음 소개됐을 땐 국내 학자들의 번역본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인민 대중을 위한다는 목적”하에 풀어쓰기에 치중하는 바람에 사료로서 실록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평가도 있다. 예컨대 명종대에 활동한 ‘이익’이란 인물은 동명이인이 모두 다섯이나 되는데 순한글로 표기하는 바람에 혼동을 준다. 궁중용어 등 각종 전문용어까지 한글로 풀어 쓴 탓에 전문적인 연구작업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국내에선 1990년대 초 남북 해빙기를 타고 북한 측과 직접 계약하에 영인본 복제본을 출판하는 식으로 소개됐다. 당시 북한 저작물이라는 이유로 이 계약을 무시한 복제품 출판이 이뤄지면서 저작권 분쟁이 일기도 했다.

더 헤리티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