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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의 일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1. 23. 17:16

[뉴스 속의 한국사]

세 살부터 방학 없이 종일 경전 공부… 4개 등급 성적 받아

입력 : 2023.11.23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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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의 일상

 
 1817년(순조 17년) 3월 11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한 화첩 '왕세자입학도첩'. /문화재청
조선 시대 왕세자(王世子)의 집무 공간이었던 경복궁 계조당(繼照堂)이 110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고 관람객을 맞는다고 해요. 1443년(세종 25년) 왕세자(훗날 문종)를 위해 처음 건축된 이 건물은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지만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할 때 헐어 버렸다고 해요. 조선 시대의 왕세자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왕세자를 왜 '동궁'이라 불렀을까

'계조당'이란 '(왕위를) 계승해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이죠. 왕세자는 임금의 아들인 왕자들 중에서도 임금의 자리를 이을 사람으로 정해진 사람입니다. '세자'라고도 하고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국본(國本)'이라고도 하죠.

또 하나 별칭이 있습니다. 사극에서 보면 임금이나 왕비가 "동궁(東宮)은 어디 갔느냐?"는 대사를 하곤 하죠. 동궁이란 동쪽 궁궐이란 뜻인데, 무슨 말일까요. 건물이 어디로 움직일 리는 없잖아요? 세자가 거처하는 곳이 궁궐 동쪽에 있어서 '동궁'이라 불렀고, 이것이 '왕세자를 달리 이르는 말'이 됐던 것입니다. 계조당 역시 경복궁 내 동궁 권역에 있습니다.

맏아들이 반드시 세자가 됐던 것은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세자가 됐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은 원자(元子)라고 했어요. 왕자가 귀한 경우에는 아기 때 세자 책봉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보통 7~8세에 책봉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학문에 입문해 어느 정도 예(禮)를 행할 수 있는 나이라고 여겨서였답니다.

세자를 책봉하는 날, 즉 임금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날에는 가장 좋다는 날을 골라 왕실 종친과 문무백관이 한자리에 모였고, 왕은 새 왕세자에게 세 가지 물품을 내렸습니다. 책봉을 알리는 문서인 죽책(竹冊), 당부의 말을 적은 교명(敎命), 옥으로 만든 도장 옥인(玉印)이었어요.

무슨 말을 당부했을까요. 1651년(효종 2년) 임금은 세자(훗날 현종) 책봉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좋은 성품을 갖추고 학문에 힘써라!"

방학도 없이 매일 공부했어요

학문에 힘쓰라고요? 그랬습니다. 조선의 국왕들은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품을 길러 어진 정치를 펼치는 것을 이상적인 군주로 여겼습니다. 그럼 왕세자에겐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는 막연하게 '옛날 왕세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궁궐 안팎을 드나들며 남들은 못 하는 많은 걸 할 수 있었겠구나' 생각하기도 하는데, 천만에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왕자는 보통 세 살이 넘으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예절과 법도, 말타기와 활쏘기도 익혔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놀았다가는 바로 임금에게 보고가 올라가 꾸지람을 받아야 했죠.

왕세자가 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는 국가 기관의 교육을 받았어요. 임금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죠. 시강원 관원들이 바로 세자의 스승이었는데, 학문과 인품, 가정 환경까지 따져서 뽑았다고 합니다. 세자를 경호하고 무예를 가르치는 일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담당했죠.

세자의 하루 일과는 어땠을까요. 정해진 기상 시간부터 취침 시간까지 '꼭 요즘 사관학교 생도 같다'고 할 정도로 엄격한 일과 속에서 철저히 짜인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왕실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했어요. 이후 온종일 미래의 군주가 되기 위한 훈련으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아침·낮·저녁에 세 차례 유교 경전을 학습했고, 남는 시간에 무예를 연마했어요. 제대로 공부했는지 매일 시험을 치러 평가를 받았는데, 제비뽑기를 하듯 경서통에서 책 구절이 적힌 죽간 하나를 뽑아 글을 읽고 선생님의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성적이 좋으면 막힘 없이 통했다는 뜻의 '통(通)', 그다음은 대략 이해했다는 뜻으로 '약(略)', 성적이 좋지 않으면 거칠게 듬성듬성 알고 있다는 뜻으로 '조(粗)', 아예 낙제 수준이면 '불(不)'이라고 적힌 패를 받았습니다. 성적표였던 셈이죠.

방학은 거의 없었고 큰 재해가 일어나거나 무더위가 닥치지 않는 한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습니다. 종묘·사직 제사와 책봉 행사, 사신 영접 같은 국가 의례에 참석하는 것도 일상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세자 기간 길었던 이들, 왕 노릇 오래 못했죠

이런 빽빽한 일과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일탈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뒤주에 갇혀 죽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랜 기간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임금이 돼 그만큼 나라를 훌륭히 다스릴 수 있었을까요? 불행하게도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왕세자(황태자·왕세손 포함)였던 인물들 중, 세자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긴 순으로 순위를 매겨 봤습니다〈표 참조〉.

뜻밖에도 순종(세자·태자 기간 32년 5개월, 재위 3년 1개월), 경종, 문종, 인종처럼 임금 재위 기간이 1~4년에 불과했던 군주들이 앞 순위를 차지했습니다. 세자만 오래 하고 정작 임금 노릇은 길지 못했던 것이죠. 사도세자, 소현세자, 효명세자처럼 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눈에 띕니다. 반면 조선왕조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이 세자로 있던 기간은 단 2개월이었답니다.

 서울 종로구 경복궁 내 조선 시대 왕세자의 집무 공간 계조당(繼照堂) 복원 모습. /남강호 기자
 순종 왕세자 책봉 옥인. /연합뉴스
 지난 14일 경복궁 계조당에서 개막한 '왕세자의 공간, 경복궁 계조당'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왕세자 의장물인 기린기(왼쪽)와 백택기를 살펴보고 있어요. /뉴스1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