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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불탄 뒤 새로 지어… 조선 후기 ‘제2 궁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18. 14:09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경복궁 불탄 뒤 새로 지어… 조선 후기 ‘제2 궁궐’

일부 복원되는 경희궁

기획·구성=장근욱 기자
입력 2024.01.17. 03:00
 
 
 

서울시가 종로구 정동사거리 일대 새문안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돈의문(서대문)을 복원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어요. 1915년 일제가 철거한 서대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문입니다.

 경희궁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그린 송규태 화가의 '서궐도'.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궁중 기록화 '서궐도안'에 낡아서 빛바랜 부분을 새로 채색한 그림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이와 함께 가까운 경희궁(慶熙宮)의 정문 흥화문(興化門)을 원래 자리인 구세군회관 근처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밝혔어요. 서울교육청 정문 자리에 있던 숭의문(崇義門)을 복원한다는 것도 이 계획에 들어 있는데, 숭의문은 경희궁의 서쪽 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서대문은 알겠는데 경희궁은 도대체 무슨 궁일까요?

 

‘5대 궁’ 중에서 가장 생소한 궁궐

 

우리는 서울의 ‘5대(大) 궁(宮)’이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지금의 서울, 즉 조선시대 도읍 한양에 있던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궁궐 다섯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5대 궁이 어디 어디인지 아느냐’는 퀴즈를 내면 많은 사람은 우선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음은? 이쯤 해서 “아, 창경궁!”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1909년부터 1983년까지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운영돼 아직도 많은 시민의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겠죠.

그러면 5대 궁 중 나머지 궁궐 한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바로 경희궁입니다.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 서쪽에 있죠. 그런데 왜 이렇게 생소할까요? 경희궁은 나머지 4대 궁과는 달리 옛 건물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경희궁지(경희궁터)’라 불릴 정도입니다. 현재 경희궁에 있는 전각은 1980~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을 거친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다른 4대 궁과는 달리 경희궁만은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심한 훼손을 겪었고 오랜 기간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00년대 초 서울 서대문 고갯마루에서 광화문 방면을 바라보니 덕수궁(경운궁)에서 경희궁을 잇는 하얀 구름다리가 보여요.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궁을 오가려고 만든 다리예요. /고지도 수집가 이돈수

 

‘5대 궁’의 성격을 정리해 보죠. 조선왕조의 창업과 함께 가장 먼저 지어진 정궁(正宮·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은 경복궁입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뒤 1868년 경복궁 중건이 끝날 때까지 조선 후기 사실상 정궁 역할을 한 궁궐은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의 동쪽에 있으면서 창덕궁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 창경궁이고요. 덕수궁(경운궁)은 조선 말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무렵 본격적으로 건물이 들어선 ‘대한제국의 궁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 경희궁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후기 창덕궁 다음가는 ‘제2의 궁전’

“궁전 세 곳을 새로 지으라! 내 그곳에 들어가 살겠노라.”

나라가 겨우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에서 벗어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전란 중 불탔고, 새로 왕이 된 광해군(재위 1608~1623)은 그나마 급하게 새로 지은 창덕궁을 ‘흉한 궁전’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나라 살림과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인왕산 남동쪽에 인경궁, 지금의 옥인동 일대에 자수궁, 돈의문 근처에 경덕궁을 짓게 했습니다. 그 명분은 인왕산의 왕기(王氣·임금이 날 조짐)를 누르는 것이었다고 합니

 
 1992년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에요.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심하게 훼손됐다가 1980년대 발굴 조사를 거치면서 현재는 일부 복원된 상태예요. /조선일보DB

 

이때, 그러니까 1617년에 공사를 시작해 1623년에 완공된 궁전이 경덕궁이었습니다. 경덕궁은 1760년(영조 36년)에 현재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경희궁이라 부르겠습니다. 경희궁이 완공된 1623년은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난 해입니다. 광해군은 짓기만 했을 뿐 정작 이 궁궐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던 셈이죠. 경희궁 자리는 새 임금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옛집이 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거치며 창덕궁이 또 불타버리자 인조는 창덕궁을 다시 짓는 동안 자연스럽게 경희궁에 머무르고 정사를 돌보게 됐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당시 건물 규모가 1500칸(1칸은 약 2.45m)이었고 면적은 경복궁의 3분의 2가 넘었을 정도로 큰 규모였으니까요. 조선 후기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할 동안 경희궁은 ‘제2의 궁궐’이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고 경희궁을 ‘서궐’이라 부를 정도였어요.

경희궁은 당시 중요한 역사의 무대였습니다. 19대 숙종 임금은 경희궁에서 태어나고 승하(임금이 세상을 떠남)했고, 20대 경종이 태어난 장소와 21대 영조가 승하한 장소 역시 경희궁이었습니다. 22대 정조는 여기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엔 임금이 주로 창덕궁에 머물면서 사용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3월 경희궁에서 조선 시대 왕에게 차(茶)를 진상하던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 모습이에요. /남강호 기자

 

경복궁 중건 위해 대부분 헐려

그런데 이렇게 크고 중요한 궁궐이던 경희궁이 왜 훼손됐던 걸까요? 오랫동안 ‘일제가 궁궐을 훼철(헐어서 치워 버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말이 아주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100% 들어맞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시작할 때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을 이미 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경복궁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 전각 100여 채 중에서 주요 전각 5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을 짓기 위한 자재로 재활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경희궁의 궁궐 기능은 끝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 ‘5대 궁’이 사실상 동시에 모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경희궁은 경복궁이 불탄 뒤에 만들어졌고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해체된 셈이니까요. 다만 대한제국 때 경운궁(덕수궁)을 확장하면서 경희궁과 연결하는 운교(구름다리)를 놓은 적이 있는데, 허허벌판인 경희궁에서 행사를 개최하기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경희궁에 남아있던 전각 5채는 1930년대 초까지 일제에 의해 모두 사라졌습니다. 1980년대부터 발굴과 복원 작업이 이뤄져 장충동의 일본식 절 입구로 옮겨졌던 경희궁 정문 흥화문은 원래 자리 근처로 이전됐고, 경희궁의 전각 숭정전·자정전·태령전 등이 복원된 상태입니다. 1943년 일제가 만든 지하 전신국인 방공호 시설도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