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에 관하여
고영민
책장의 책을 빼내 읽고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고 하니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다
빽빽한 책 사이,
있던 자리가 없어져버렸다
한쪽 모서리를 걸치고
열심히 디밀어도 제자리를 못찾는다
한 권의 틈을 주지 않는다
옆의 책을 조금 빼내
함께 밀어보니
가까스로 들어간다
내가 네 안에 반듯이 앉도록
조금만 그렇게 미궁을 들썩여다오
없던 틈으로 당겨져
내가 들어간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요
든 자리는 표시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표시 나는 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빼낸 누구라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그런 틈을 시간은 서서히 메워 갑니다. 그것이 잡히지도, 멈추지도, 담을 수도 없는 시간의 힘이라고들 하더군요. 하여 시간이 오래 지나면 빠져나온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이 많이 흐르기 전에 용서하고 양보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늦으면 늦을수록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더라도 돌아가고자 한다면, 빠져나온 자리를 찾아가고자 한다면 그 틈이 덧나지 않아야 합니다. "한쪽 모서리를 걸치고 / 열심히 디밀어도 제자리를 못 찾는" 떠나온 자리는 "내가 네 안에 반듯이 앉도록 / 조금만 그렇게 미궁을 들썩여"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많이 쓰라리겠지만 힘들게 메워진 틈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다시 품어줘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겨울은 상처가 곪지 않는 계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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