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동백꽃 낙화음을 가슴 깊이 담으려
1,172번째 《나무편지》
시인 조용미는 “푸른빛과 섞이는 붉은빛 따라간 칠량에서 마량까지 늙고 오래된 푸조나무가 있는 당전마을을 지나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푸조나무가 있는 당전마을, 바다쪽으로 너른 들이 펼쳐진 참 풍요로운 마을입니다. 시인은 “밤나방처럼 가만히 붙어 몇백 년이라도 꽃살문을 떠메고 있으려는 커다란 나비경첩이 주는 무거움도 내려놓고 꽃살문 앞 떠난다 마량 간다 까막섬 간다”(조용미, ‘마량 간다’ 중에서)고 노래했습니다. 푸조나무가 있는 당전마을을 스쳐 지나야 하는 시인의 ‘마량’은 전남 강진군 마량면, 바닷가 마을입니다.
충남 서천 바닷가에도 마량이 있고, 마량포구가 있습니다. 푸조나무가 아니라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서천군 서면 마량리입니다. 한글은 같아도 한자는 서로 다릅니다. 서천의 마량은 ‘마량(馬梁)’이고, 강진의 마량은 ‘마량(馬良)’입니다. 서천 마량리는 조선 시대 때에 마량진(馬梁鎭)이 있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마량진은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수군 부대의 진영을 말합니다. 강진의 마량면은 예전에 배에 실려온 탐라(제주)의 말이 뭍에 처음 내려서 먹이를 먹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합니다.
동백나무 꽃 보러 충남 서천 마량리에 다녀왔습니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동백꽃”의 낙화음(洛花音)을 가슴에 담으려면 아무래도 사람의 소리가 덜 번잡한 때에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 꽃이 가장 좋을 때에는 항상 ‘서천 동백꽃 쭈꾸미 축제’가 벌어집니다. 엊그제인 18일 토요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마량리에서 열리는 축제가 그것입니다. 인파로 붐비기 전인 주중에 마량리 숲을 찾아갔습니다. 꽃은 활짝 피었지만 아직 낙화는 일러서 동백나무 꽃 감상에 따라붙는 ‘낙화음’을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축제 전이었습니다만, 순전히 동백나무 꽃을 느끼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바닷가 낮은 언덕인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육지에서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식물분포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그 이유로 1965년에 천연기념물에 지정했지요.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그때에는 80여 그루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었습니다만, 그 뒤로 80그루의 동백나무 곁에 새로 동백나무를 많이 심어 키웠습니다. 한눈에 봐도 오래 된 동백나무와 새로 심은 동백나무는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차이가 큽니다. 물론 오래된 동백나무 1,500그루로 이루어진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 비하면 작은 규모입니다만, 바닷가 언덕의 동백숲이라는 나름의 특징이 있는 곳이지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 수 없는 언덕이어서 동백나무는 위로 높지 않게 낮은 키로 자랐습니다. 바닷바람 맞으며 생명을 이어온 나무들인 덕에 그 줄기에 새겨진 생명의 신비는 여느 동백나무에 비해 장관입니다. 위로 뻗어오르지 않고, 바람을 피해 낮게 옆으로 나뭇가지를 펼치며 슬기롭게 자란 겁니다. 이 작은 언덕 맨 윗 자리에는 동백정(冬栢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정자이지만,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풍경이 어우러진 정자여서 남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이 낮은 언덕에 동백나무가 자라게 된 연유와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서천 마량리 지역의 관리 한 사람이 마랑리 앞 바다 위에 꽃다발이 떠 흘러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꽃다발의 인상을 잊지 못한 그는 꿈에서 깨어나 바닷가에 나가보니, 실제로 빨간 꽃이 활짝 핀 나무가 있었다는 거죠. 그 나무를 바다에서 건져와 바다가 내다보이는 지금의 이 언덕에 심은 게 이 숲의 시작이라는 전설입니다. 그 뒤로 마량리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에 날을 정해 이 숲에 모여서 풍어와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 꽃은 ‘서천 동백꽃 쭈꾸미 축제’ 기간 동안 가장 아름다울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꽃이 많이 피어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채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가 더 많았습니다. 게다가 며칠 더 지나면 숲길을 조용조용 천천히 걷다보면 곁에서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동백나무 꽃의 낙화음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찾아온 사람들이 많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동백나무 꽃 떨어지는 소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 숲을 찾으신다면 그저 꽃만 보지 마시고,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에서 보여드리는 나뭇가지 아래 쪽을 꼭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동백나무에게는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찬 바닷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몸을 위쪽으로 풀지 않고 땅 가까이로 비틀리며 펼친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그러려면 숲 가장자리에 잠시 쪼그리고 앉아야 합니다. 무성하게 펼친 나뭇가지 때문에 서있는 채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에서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은 나무에 깃든 생명의 지혜와 신비에 경배하는 일이 될 겁니다.
곳곳이 꽃천지입니다. 지금 서 있는 곳 어디라도 봄빛은 스며들고 있을 겁니다. 충남 서천 마량리가 아니라 해도 지금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길가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는 회양목의 작지만 향기로운 꽃, 개나리 노란 꽃, 산수유 환한 꽃을 찾아보세요. 찬란히 밝아오는 이 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3월 20일 아침에 띄우는 1,172번째 《나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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