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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의 평온한 풍경에 스민 한 나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3. 14. 15:02

[나무편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의 평온한 풍경에 스민 한 나절

  1,171번째 《나무편지》

  나무가 아름다운 고을, 전남 순천의 가만한 봄 소식, 꽃 소식 전해 올리면서, 선암사도 순천만도 낙안읍성도 찾지 못하고 아쉽게 그냥 돌아왔다고 지난 번 1,170번째 《나무편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그 날, 오후 한나절은 순천을 대표할 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 곁에 머무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만 말씀드렸지요. 오늘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리는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가 바로 그 나무입니다. 이팝나무 종류를 이야기할 때마다 늘 첫손에 꼽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고속도로 승주나들목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굳이 순천을 다녀가는 길이 아니라 해도 이 부근에 가까이 가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라도 들러 안부를 확인하곤 하는 나무입니다. 아직은 이른 봄이어서, 꽃은 물론이고 잎도 나지 않은 앙상한 상태의 나목(裸木)입니다. 그런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돌아본다 쳐도 이 아름다운 이팝나무가 부쩍 쇠약해진 듯한 느낌입니다. 돌아와 옛 사진과 비교해 살펴보니 맨 위쪽으로 뻗었던 가늣한 가지 하나의 일부가 부러졌지만, 그밖에는 특별히 큰 상처를 입은 건 아닙니다. 그저 늙어가는 중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을 어귀에 서서 마을의 상징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고 늠름히 잘 서 있습니다. 순천에서의 프로그램은 늦은 저녁에 마련돼 있어서 굳이 서둘러 출발할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라도 있을까봐 일찌감치 출발하고 보니,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가 지키고 있는 평지마을 어귀에 도착한 건 해가 살짝 서쪽으로 기운 시간 즈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해 지는 저녁이 올 때까지 머무를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은 여유로웠지만, 저녁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다른 나무는 보고 싶어도 참기로 한 거죠.

  잎 하나 돋지 않은 이른봄의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아무래도 쓸쓸해 보였습니다. 바람이 아직은 차가워 나무 앞의 정자에 나오는 마을 사람도 하나 없었고, 겨우 나무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오가는 경운기와 작은 트럭이 있었을 뿐입니다. 서너 시간쯤 됐을 겁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던 이십 년 전쯤에 비하면 분명 생명의 기운이 덜하다는 느낌으로 하냥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 곁의 정자에 홀로 주저앉았다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나무 꼭대를 바라보기도 하고, 또 나무 아래로 넓게 펼쳐진 논 안쪽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멀리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이팝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잎떨어지는 넓은잎 큰키나무라고 식물도감에는 풀이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중부지방에서도 가로수로 많이 심어 키웁니다만, 그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다보니, 따뜻한 남부 지방의 예전 기후가 지금의 중부지방 기후와 비슷해진 것이겠지요. 이팝나무를 이야기하면서 중부지방, 특히 서울이나 경기 지역에서 아름답게 꽃 피우며 잘 자라는 이팝나무를 본다는 건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중요한 시그널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농촌에서 즐겨 심어 키운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나무가 모두 여덟 그루나 됩니다. 그건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향나무 다음으로 많은 겁니다.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에 지정한 나무로, 이팝나무 가운데에는 맨 먼저이지요.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천연기념물로 보호하던 나무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표 이팝나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나무가 서있는 자리는 마을 앞으로 신작로가 나기 전인 오래 전에는 낮은 언덕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을 앞 신작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약간의 비탈이기는 합니다만, 그때보다는 평평해졌다는 거지요. 신작로를 내고, 마을 입구 도로를 정비하면서 나무가 서 있는 자리가 조금 높아지자, 나무 주위로 2미터 정도 높이의 축대를 쌓고, 나무 바로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정자를 지어 풍치를 돋웠습니다. 정자도 다른 곳의 옹색한 정자에 비해 규모가 큰 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이 나무의 나무나이를 500년으로 추정하고, 우리나라의 이팝나무 가운데에 가장 큰 나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때에 나무나이를 다시 추정하면서 400년으로 조정했습니다. 나무 앞으로는 너른 논이 펼쳐지고 그 논 사이로 신작로고 나 있습니다. 이 논에는 봄이면 자운영 꽃이 무성하게 피어난다는 기억은 있는데, 올 봄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의 나무높이는 18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4.6m 로 측정돼 있습니다.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는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뿌리는 바위를 감싸며 한데 뒤엉켜 자라고 있는데, 줄기는 땅에서부터 둘로 갈라졌습니다. 두 개의 줄기 중 하나는 곧게 서고, 다른 하나는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는 듯 비스듬히 오르다 다시 곧게 오르며 두 개의 굵은 줄기가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줄기 중간 쯤에서 뻗은 굵은 가지가 오래 전에 부러진 것이 아쉽습니다만,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린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줄기의 주요 부분이 썩으며 생긴 큰 구멍이 있는데, 이 부분을 전에는 외과 수술에 의해 충전재로 메웠다가 최근에는 새로운 공법에 따라 텅 빈 상태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게 나무를 더 쇠잔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처럼 이팝나무의 꽃이 활짝 피어나면 그해 농사에 풍년이 들고, 꽃이 제대로 피어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하는 믿음은 이 마을에서도 오래 전부터 믿어왔습니다. 너른 논밭을 거느리고 서 있는 이팝나무는 그래서 더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크고 아름다운 그늘에 정성껏 세워놓은 정자까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도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의 운치를 더해 줍니다. 평화와 풍요를 갖춘 우리네 농촌의 전형적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무 곁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며, 나도 풍경의 하나가 되어 이 큰 이팝나무가 온 가지에 풍년을 예감하는 하얀 꽃을 풍성하게 피웠을 때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그날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봄 풍경을 그려보는 마음은 어느 곳 어느 나무에서의 그것 못지않게 따뜻하고 풍성했습니다.

  주말에 낮 기온이 20도까지 오르더니 어제는 낮에 봄비가 흩뿌리고, 다시 바람 쌀쌀해집니다. 특별하달 것 없는 우리네 봄 날씨의 전형적인 흐름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 봄에 우리 건강에 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 2023년 3월 13일 아침에 띄우는 1,171번째 《나무편지》였습니다. - 고규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