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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긴 겨울의 끝, 봄의 첫 자리에서 나무와 땅을 물들이는 붉은 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7. 15:03

[나무편지]

긴 겨울의 끝, 봄의 첫 자리에서 나무와 땅을 물들이는 붉은 꽃

  남녘에선 복수초 매화 개화 소식이 빠르게 한 무더기씩 다가옵니다. 매화 피어나는 이 즈음에 함께 피어나는 붉은 꽃이 있습니다. 동백나무 꽃입니다. 동백나무의 개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 시기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는 크고 작은 동백나무들은 벌써 꽃을 피웠고, 싱그러운 채로 땅 위에 떨어진 꽃송이까지 다 시들어 스러졌을 겁니다. 그러나 동백나무 꽃의 명소라 할 수 있는 곳들에서는 삼월 들어서, 그것도 삼월 중순 넘어야 겨우 피어납니다. 개화시기를 한 마디로 모아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축제 준비 소식도 있습니다.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도 삼월 중순 되면 붉은 꽃을 볼 수 있는 숲입니다. 그러나 숲의 규모나 숲 안의 동백나무 그루 수는 그리 대단하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육지에서의 가장 북쪽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라는 점에서는 귀중한 숲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유이지요. 동백나무 꽃의 명소로는 언제나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이 첫 손에 꼽힙니다. 그와 함께 광양 옥룡사터 동백나무 숲도 강진의 그곳처럼 숲 안에 들어서 소리내지 않고 숨죽여 걸으며 동백나무 꽃의 낙화음(落花音)을 또렷이 느낄 수 있는 숲입니다.

  무리를 이뤄 자라는 동백나무 숲으로는 그밖에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도 널리 알려졌지만 그 숲은 철저한 보호를 위해 숲 안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어쨌든 동백나무 숲으로 명소라고 꼽을 곳은 여러 곳이 있습니다만, 독립해 서 있는 큰 나무로 동백나무는 많지 않습니다. 독립 노거수로서 대표적인 나무는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무일 뿐 아니라,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에 관계된 선비들의 사연을 품은 나무라는 인문학적 가치까지 가지고 있는 자연유산입니다. 숲이 아닌 홀로 서 있는 동백나무 가운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유일한 나무가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입니다.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나무편지》에 보여드리는 나무도 충분한 보존 가치가 있는 동백나무입니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의 낙안읍성에서 멀지 않은 이곡리의 한 개인집 마당 앞에 서 있는 큰 나무입니다. 우선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의 나무나이는 무척 오래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2007년에 보호수로 지정하면서 산림청에서는 목록에 이 나무의 나무나이를 501년으로 기록해두었습니다. 얼마 전에 드린 《나무편지》에서 끝자리까지 적는 데에는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은 드렸지요. 그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501년이라기보다는 그냥 500년으로 해야 하겠지요. 이건 대단한 겁니다.

  큰 꽃을 무성하게 피우는 대개의 나무들이 그렇듯이 동백나무 종류에서는 그리 오래 된 나무를 찾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현재 산림청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보호하는 동백나무들의 평균 나무나이는 대략 200년 정도입니다. 200년이 채 안 된 나무도 보호수로의 가치를 가진다는 이야기입니다. 300년 넘는 동백나무는 몇 그루 안 됩니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동백나무는 모두 80여 그루인데요. 그 가운데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는 의 동백나무 가운데에 가장 오래 된 나무인 겁니다.

  나무높이는 15미터라고 기록돼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찾아보니, 그에 훨씬 못 미칩니다. 산림청에서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한눈에 봐도 틀렸다 싶을 정도로 나무를 측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보호수로 지정한 2007년에는 15미터가 맞았을 겁니다. 그 뒤에 나무가 겪은 세월이 나무의 높이를 바꾸어놓은 거지요. 사진을 보시며 짐작하실 수 있듯이 나무 밑동에서부터 뻗어나왔던 굵은 줄기가 부러진 겁니다. 나무 곁의 온실에서 일하던 집주인께 여쭈니 태풍으로 부러져나간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에는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고 강조했습니다. 굵은 줄기와 하늘로 솟구쳤던 위쪽의 나뭇가지가 그때에 부러져나가면서 나무높이가 낮아지고 보시는 것처럼 한쪽으로 불균형한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무높이를 15미터라 해도 기록에는 이보다 더 큰 나무가 몇 그루 더 있기는 합니다. 그 나무들도 현장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일단 기록으로는 그렇습니다. 나무높이 다음으로 나무의 규모에서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인 가슴높이줄기둘레는 2.7미터로 돼 있습니다만 이 수치 역시 굵은 줄기가 부러져 사라진 바람에 그보다는 작다고 해야 하겠지요. 처음 보호수로 지정할 때의 가슴높이줄기둘레가 그렇다는 겁니다. 보호수 목록에는 이보다 더 굵은 나무가 딱 두 그루 더 있습니다. 더 굵다고 해봐야 고작 30센티미터 더 굵은 나무와 40센티미터 더 굵은 게 전부입니다. 그 정도는 사실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해도 됩니다.

  나무나이 500년, 나무높이 15미터, 가슴높이줄기둘레 2.7미터. 처음 기록 그대로라면 앞에서 이야기한 유일한 천연기념물인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보다 훨씬 큽니다. 나주 금사정 동백나무는 나무나이 500년, 나무높이 6미터, 뿌리둘레 2.4미터입니다. 줄기가 뿌리에서 올라오면서부터 셋으로 갈라져 자라서 가슴높이줄기둘레는 잴 수 없어 뿌리둘레를 잰 것입니다. 몸뚱이라 부러지고 찢겨나가는 세월의 흔적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백나무 가운데에 가장 큰 나무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도 될 겁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 나무의 옛 모습을 그려봅니다.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는 사유지에 서 있는 나무입니다. 나무 바로 곁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블루베리와 몇 가지 작물을 키우는 집 주인장은 이 나무가 자신의 조상이 심은 나무여서, 대를 이어 잘 지키느라 애썼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전의 그 크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안타깝다는 이야기는 헤어질 때까지 몇 차례나 되풀이했습니다.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를 만나고 돌아온 게 찾아보니 2016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마을도 많이 변했겠지요. 다시 나무 줄기에 얹혀졌을 세월의 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마침 주중에 순천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짬이 나려나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찾아가 그의 안부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다녀와 더 좋은 나무 이야기 전해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 2023년 2월 27일 아침에 띄우는 1,169번째 《나무편지》였습니다. - 고규홍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