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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피부병에서 속병까지 고칠 수 있다는 신목으로 살아남은 큰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17. 15:37

[나무편지]

피부병에서 속병까지 고칠 수 있다는 신목으로 살아남은 큰 나무

  ★ 1,176번째 《나무편지》 ★

  지난 주에 드린 《나무편지》에서는 대한민국 열혈청년 김창수가 ‘김구’라는 이름을 얻게 된 자리로 기억되는 김천의 느티나무 숲을 이야기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잠깐 다리쉼이나 할 겸 들렀던 작은 숲이었는데, 그 숲에 그런 의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지나는 길이라고 쓰기는 했습니다만, 그냥 지나는 길은 아니었죠. 김천 월곡리의 큰 나무를 찾던 중이었는데, 주변의 길을 몇 차례 오가면서도 나무를 찾지 못해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찾아 나무의 위치를 묻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선 길이었습니다.

  작은 우체국이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서던 길에 바로 그 숲이 눈에 들어왔던 겁니다. 매오로시 오래 된 나무를 중심으로 찾아다니다보니, 백년쯤 된 느티나무 열 그루가 모여서 이룬 이 숲은 애시당초 길머리를 잡을 때에 생각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곳 월곡리에서 마을의 정자 노릇을 한다는 육백 년 된 오래 된 느티나무만큼은 찾아보고 싶었던 겁니다. 이 오래 된 느티나무는 ‘수풍정’이라는 남다른 이름까지 가진 나무여서 꼭 찾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 큰 마을이 아니어서 금세 찾을 줄 알았지만, 몇 차례 오가면서도 나무를 찾지 못하고 지나온 길을 거듭해 되돌아가며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머리도 식히고, 마을 사람을 만나 수풍정 느티나무의 존재를 물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바로 그 ‘백범 김구의 숲’에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개울가 숲의 풍광이 좋아 천천히 둘러보는데, 숲 가장자리에 큼지막하게 세워놓은 ‘월곡마을 보물지도’라는 입간판이 보였습니다. 월곡리의 명소라 할 수 있는 몇 곳을 사진과 함께 간략히 소개하고 위치까지 표시한 안내판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분명 ‘수풍정’이라는 이름의 느티나무가 사진과 함께 표시돼 있었는데, 유독 이 나무의 위치가 지도의 맨 가장자리여서 정확히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도에 표시된 나무 위치 부근은 방금 전에 지나온 자리이기도 해서 더 애매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숲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느티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취해 편안히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나무를 찾아볼 요량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긴가민가하며 오던 길을 천천히 되짚어가며 사방을 살폈습니다. 그때 길에서 마주친 마을 노인께 수풍정 느티나무를 찾아간다고 했더니, ‘다 죽은 나무인데, 시(市)에서 겨우겨우 살린 나무’라며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방금 전에 지나오면서도 나무를 찾지 못했던 것은 지나는 언덕길의 절개지 바로 아래쪽에 숨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언덕 아래로 난 비좁은 농로 안으로 들어서자 수풍정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을 노인의 이야기대로 나무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노거수로서의 기품은 많이 상했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나무의 중심이 되는 줄기의 상당 부분은 오래 전에 부러졌습니다. 예전에는 나무 줄기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굵은 가지로 나눠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굵은 가지 대부분이 부러져 없어지고 지금은 서북쪽으로 뻗은 하나의 굵은 가지만 남아 전체적으로 매우 초췌한 모습입니다.

  줄기가 부러진 자리는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한 뒤에 외과수술을 거치며 메운 충전재의 흔적이 성한 부분보다 더 컸습니다. 서북쪽으로 뻗은 하나의 굵은 가지가 기운 정도도 심해서 나무가 버티고 서 있는 상태가 위태로워 보일 정도입니다. 큰 비와 센 바람이 몰아친다면 쉽게 쓰러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앞에 이야기한 ‘월곡마을 보물지도’에는 예전에 이 나무의 줄기에 물이 고였는데, 그 물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물을 마시면 속병까지 고치게 되는 신목(神木)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나무 이름을 ‘물(水) 좋고 바람(風) 좋은 정자나무(亭)’라고 붙인 것이지 싶습니다.

  나무도 살아있는 생명인 이상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벗을 수 없겠지요. 육백 년을 살아온 〈김천 월곡리 수풍정 느티나무〉 역시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떨칠 수 없습니다. 보호수라는 이름을 얻는 바람에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생(生)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어가면서 임종(臨終)을 채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 그루의 크고 오래 된 나무는 스러지고, 아름다운 마을 김천 월곡리에는 지난 주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린 ‘백범 김구의 숲’이 더 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남겠지요. 사람살이의 흔적을 사람보다 더 오래 간직하고 살아있는 이 땅의 모든 나무들에 담긴 생명의 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4월 17일 아침에 1,176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