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섭씨 40도의 사월 … 결국 낙화 채비까지 마친 ‘오월의 꽃’들
★ 1,177번째 《나무편지》 ★
이 즈음이면 가까운 친구들의 살가운 연락에 대거리하기를 “오동나무 꽃 지면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고작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노루귀 복수초에서 시작한 봄꽃은 수선화 튤립 목련 벚나무를 거쳐 이팝나무 개화에 이르렀지요. 그리고 이팝나무 꽃잎이 파르르 낙화 채비를 서두를 때면 철쭉과 함께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게 대개는 오월 중순쯤이었습니다. 그 오동나무 꽃 지고나면 성마르게 피어났던 봄꽃들은 대개 한 숨 돌리곤 합니다. 그래서 봄 나무 답사를 정리하면서 여유를 갖고 만나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올 봄 철쭉도 이팝나무도 오동나무도 벌써 다 피었습니다. 아직 사월도 다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전에 펴냈던 제 책들은 모두 폐기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 책에서는 분명 철쭉은 오월에 피고 이팝나무는 입하 즈음인 어린이날이 지나면서 피어나 오월 중순 너머까지 볼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때는 그게 틀린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틀렸습니다.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 갈수록 날이 따뜻해지는 때문인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나무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빨라졌다 늦어졌다 들쭉날쭉하다는 겁니다. 꽃 피는 순서는 아예 망가진 지 오래됐습니다. 회양목 꽃이 겨우 피어났는데 목련이 피어나는가 하면, 철쭉 시들고 지려 하는데 아직 쥐똥나무 꽃은 감감무소식입니다. 헛갈릴 수밖에요.
개화 시기를 비롯한 나무의 생태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분명 점점 따뜻해지는 지구의 기후에 적응해가는 과정이겠지요. 어제는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섭씨 40도를 넘는 이상고온 현상을 보였다는 소식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사월인데, 섭씨 45도를 넘는 폭염으로 시민들의 출입을 자제하라는 경고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동안의 흐름을 보아서는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고는 해도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있는 이 험한 지구 위에서 나무가 살아가기 위한 안간힘이겠지요. 어찌 됐든 한두 마디로 해석하기 어려운 하수상한 시절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우리의 날씨였건만 봄은 분명히 짧아지는 듯합니다. 결국 길어질 수밖에 없는 올 여름을 맞이해야 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도시 아파트 울타리에 사월 초부터 피어, 벌써 시들어 떨어질 채비에 들어선 철쭉 꽃이 그저 반갑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 사정을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이 수상한 계절, 아무쪼록 탈 없이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4월 24일 아침에 1,177번째 《나무편지》 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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