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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봄마중 채비에 나선 늦겨울 은행나무의 싱그러운 아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0. 14:21

[나무편지]

봄마중 채비에 나선 늦겨울 은행나무의 싱그러운 아침

  이제 더 기다릴 게 없습니다. 이 즈음이라면 꽃샘바람 잎샘추위가 분명 댑차게 찾아올 걸 모르지 않지만, 나무는 그래도 봄마중에 나섭니다. 아직 사람들의 겉옷은 바뀌지 않았지만, 두꺼운 겨울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 담긴 한기는 한결 덜합니다. 이제는 겨울을 떠나보내고 화창한 봄 마중을 채비해야 합니다. 나무들이 언제나처럼 봄마중의 맨 앞자리에 나섰습니다. 꼭 한 해 전 이맘 때 찾아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의 이 즈음 소식이 궁금합니다. 가을이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은행나무로 여기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은행나무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로는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를 따를 나무 없을 겁니다. 대개는 온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 찾아보게 되는 나무입니다. 처음 이 나무를 찾아본 게 이십 년도 더 지났습니다. 나무를 찾아 떠돌던 거의 처음이었던 길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나무 주변은 쓸쓸했습니다. 큰 길에서 나무 바로 앞까지 들어가는 길은 비좁았습니다. 겨우 진입했던 자동차를 돌려서 나오려면 막다른 길 끝까지 들어가 남의 집 마당을 이용해 돌려야 했지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었기에 나무 곁에 길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의 주변 사정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진입로 양쪽으로는 살림집들과 주민들의 밭이 있어서 더 넓히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좁은 길 안쪽, 나무 앞으로는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했습니다. 은행나무 축제 비슷한 행사 진행을 위해 설치한 간이 시설도 큼지막하게 설치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자리이고 보니, 보다 편안하게 하기 위한 배려이지요. 그나마 나무의 생육 공간은 해치지 않았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지난 해 말에는 원주시에서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일대를 2023년 중에 공식 관광지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주변의 좁은 주차장과 협소한 진입로를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이 사업에 약 50억여원을 들여서 나무 일대에 광장을 넓히고, 주차장은 150대가 넘게 주차할 수 있도록 하며, 진입로도 넓혀 명실상부한 원주시의 관광자원으로 추진하겠다는 겁니다. 올 상반기에 시작해 늦어도 가을 은행나무 잎에 노란 단풍 물이 오르기 전까지 완공하겠다는 겁니다.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할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사람의 편의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굳이 여기서 예전의 한적하고 쓸쓸했던 풍경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러웠던 옛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탄할 일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람과 나무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자리로 만들어가는지를 감시하고 끊임없이 의견을 제시하고 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꼭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뿐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무, 어떤 자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나무의 장엄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돌아보면 몇 해 전 가을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를 찾았을 때에 오가는 자동차와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번거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노란 단풍물이 짙어지기 전이었음에도 사람들과 자동차로 붐볐습니다. 좁다란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교행할 수 없어서 서로 당황하기도 했고, 자동차를 주차할 수 없어,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유난히 오토바이 여행객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제 살 자리를 더 평안하게 확보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편안하게 나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의 은행나무 가운데에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꼽는 나무입니다. 나무나이 8백 년의 이 나무는 높이 32미터, 줄기둘레 16미터의 무척 큰 나무이지요. 사방으로 30미터에 이를 만큼 광활하게 펼친 나뭇가지의 품은 더 없이 넓고 웅장해 마주하게 되는 첫 순간부터 저절로 경이로움의 탄성이 나오게 되지요. 오늘 《나무편지》에서 보시는 것처럼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나무가 보여주는 표정이 무척 다르다는 것도 이 나무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멀리서 바라보는 순간 시선을 압도하는 나무입니다만, 할 수 있다면 시간을 오래 갖고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면 이 나무의 절반도 채 보지 못한 겁니다. 여러 방향에서 나무의 다양한 표정을 읽었다면 이번에는 나무 주변의 울타리에 바짝 다가서서 울 안의 땅 위로 솟아오른 뿌리의 꿈틀거림을 꼭 보아야 합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나뭇가지 못지않게 무성히 솟아나온 뿌리들의 아우성도 장관입니다.

  나무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습니다. 옛날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스님이 기도처를 찾으며 유람하던 중에 이 마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님은 다리쉼을 하며 물 긷는 처녀에게 물 한 두레박 얻어 마시고 마을 풍경을 내다보는데, 유난스레 마을이 평안해 보였다는 거죠. 스님은 언제든 다시 찾아오고 싶은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표시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님은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우물 곁에 꽂아 표시했습니다. 그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서 지금의 큰 나무가 됐다는 전설입니다. 결국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평화로운 마을의 상징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이지요.

  나무에 얽힌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살던 이씨 성을 가진 어떤 어른이 심고, 정성껏 키운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에 얽힌 이야기나 옛 선조의 이야기나 모두 기록으로 전하는 건 아닙니다. 아.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이 나무의 줄기 안에는 천년 묵은 흰 뱀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가까이하기 어려운 신성한 나무라는 상징으로 마을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슬기로운 전설입니다. 마을의 지킴이가 되어 살아온 이 나무에 노란 단풍이 한꺼번에 올라오면 이듬해 농사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으며 사람들은 나무를 바라보며 살아온 것입니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를 이야기할라치면 말보다는 더 많은 사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무편지》도 길어졌습니다. 오늘 사진의 위에서부터 아홉 장은 모두 지난해 이맘 때의 풍경이고, 맨 아래 두 장은 2019년 초가을에 찾아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의 조금 이른 단풍 모습입니다. 아직 샛노란 빛은 아니지만 참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이번 주를 넘기면, 학교들이 문을 여는 개학 철이네요. 대학에서는 이제 모든 강좌를 대면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삼월을 여는 다음 주부터는 그래서 이래저래 다시 분주해지겠네요. 나무처럼 더 활기차게 새 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2월 20일 아침에 띄우는 1,168번째 《나무편지》였습니다. - 고규홍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