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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원의 말글 탐험

돌아가신 분한테 永眠하라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3. 3. 12:02

[양해원의 말글 탐험]

돌아가신 분한테 永眠하라니…

양해원 글지기 대표
입력 2016.11.10 03:11업데이트 2020.07.23 03:02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라를 뒤집어놓은 사람이 한 말이다. 정말 그런 죄가 있는지 조사받으러 들어가며 또 한마디 했다. 용서(容恕)해 주십시오. 그럼 조금 전 자복(自服)한 말은 뭐란 말인가. 죄는 지었는데 벌은 안 받겠다? 과연 말이 될까. 입으로 하는 말이 흔히 그런다 치자. 틀리면 바로잡을 여지가 있는 글도 말 안 될 때가 잦아 탈이다.

'태국 국민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으로, 특히 가장 어렵고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깊은 존경을 받아온 푸미폰 국왕의 영면을 기원한다.'

지난달 태국 국왕이 서거하자 우리나라 대통령이 애도 성명(聲明)을 냈다. 국무총리도 태국 대사관으로 조문 가서 방명록에 썼다. '… 영면을 기원합니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듦, 죽음을 이른다. 그러니 남의 나라 국왕한테 '숨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한 꼴이다. 그것도 이미 숨진 분한테. 숱한 언론 매체가 이걸 받아쓰고 말았다. 망발(妄發)이 따로 없다. 외교 문제로 번지면 어쩌려고…. 일본이 툭하면 과거사를 놓고 우리한테 유감(遺憾)이라 하지 않던가.

'야심 차게 출시한 신작 게임은 사용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기는커녕 역대급 망작(亡作)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급(級)'은 '~에 준하는'이란 뜻의 접미사. 그래서 이 접미사가 붙은 말은 중상(中上)이니 최악(最惡)이니, 수준이나 평가를 담아야 한다. 하지만 '역대(歷代)'란 그냥 '대대로 이어 내려온 동안'을 말한다. 대대로 이어진 동안에 준하는? 그래서 역대급은 말이 안 된다. 누리꾼들이 온라인에서나 쓰는 말로만 여겼더니, 지면(紙面)에 등장한 지 오래다.

어느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이름도 괴이하다. '고수들의 손맛 전쟁―한食대첩.' 대첩(大捷)은 '크게 이김'이란 뜻. 살수대첩, 한산대첩, 청산리대첩으로 익히 알듯 장소가 앞에 온다.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주체(主體)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바른 용법이다. 설령 말버릇이 바뀌었다 쳐도, 한식끼리 겨루면서 무슨 한식대첩인가. 4년 전 짝 없는 젊은이끼리 모인 행사 이름 '솔로대첩'이나 마찬가지다.

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가 우리 마음만 같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탓이다. 세상일도 말글살이도, 말이 되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