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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원의 말글 탐험

'가을비 우산 속'에서 잊어버린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0. 14:30

[양해원의 말글 탐험]

'가을비 우산 속'에서 잊어버린 것

 

양해원 글지기 대표

 

입력 2016.10.27 03:09
 
 
 
 
 

붉으락푸르락 가로수가 요란스럽다. 그악스러웠던 여름한테 느지거니 성이 났나 보다. 메마름을 달래주려는지 가을비가 내렸다. 질세라 '낙엽 비'까지. 나뒹군 잎새가 아직 축축해 안쓰럽다. 흘릴 눈물도 없을 텐데. 이맘때면 조건반사처럼 피아노 전주(前奏)가 귓가에 맴돈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최헌 '가을비 우산 속')

40년 다 됐어도 마음을 적시는 이 노래, 옥에 티가 있으니 '잊혀진'이다. '잊다'의 피동형(被動形)은 '잊히다'인데, 같은 피동을 나타내는 보조동사 '지다'가 덧붙어 이중 피동이 됐다. 듣기 좋으면 됐지 노랫말까지 뭐 그리 퍽퍽하게? 대중가요면 몰라도, 언론 매체가 버젓이 어법을 거슬러서 문제다.

'포털 업체들이 최근 잊혀질 권리 지침 적용에 나선 가운데….' 2014년 유럽에서 퍼지기 시작한 이 권리, 영 부자연스럽다. 'right to be forgotten'을 그대로 옮겨 '잊힐 권리'라 해도 이상한데, 하필 이중 피동을 썼으니 그럴밖에. '온라인상 자기 정보나 흔적을 지워달라고 요구할 권리'쯤으로 뜻을 추린다면 차라리 '정보 삭제권'이 어떨지.

단순 피동문도 대개 거북하다. 능동(能動)이라야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영어 투로 변질(變質)한 탓이다. 너무 비틀려, 들리는 것도 뵈는 것도 피동투성이다.

'북한이 발사한 3발의 탄도미사일은 한·미 정보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 상 터널에 숨겨져 있다가 기습적으로 발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미사일을 놓고 능동(발사한)과 피동(숨겨져, 발사된)을 뒤섞었다. 추적을 피하려 했다면 '숨겨 놓았'어야지 '숨겨져' 있었다니. '발사된'은 '발사한'이 마땅하다. '알려졌다'도 '드러났다'고 하면 좋겠다.

이런 표현은 어찌해야 할까.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1995년 정계에 입문한 추 대표는….' '~에 의해' 자체가 영어 직역이다. 문장 호응(呼應)이라도 되려면 '입문된' 해야 하는데, 그런들 자연스러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시킨' 하고 틀을 바꿔야 한다. 아니, 우리말 틀을 되살려야 한다. 잊히는 게 아니라 잊기 전에. 이미 떠나간 가수도, 노래도 잊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