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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서로에게슬픔의 나무이다97

존재의 내면 들여다보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13. 15:27

■해설

 

존재의 내면 들여다보기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누가 이렇게 이쁜 이름 걸어놓고 / 황홀하게 죽어갔는가 / 무지개 / 그 양쪽 끝에서/ 터벅거리는 / 사랑 / 사막 / 지옥

 

- 「실크로드」전문

 

“저녁에 닿기 위히여 새벽에 길을 떠난다 ”라는 직관의 1행시 「집과 무덤」의 시인 너호열. 그는 80년대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바 있지만 1991년 『시왁시학』지를 통해 새롭게 데뷔한 이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사람사는 일에 대한 탐구를 깊이있게 전개해가고 있는 역량있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지난 93년에 「상계동」 연작을 집중 수록한 시집 『칼과 집』을 통해서 갇힌 삶, 사막화한 오늘의 삶의 형태에 대해 날카로운 자기성찰을 펼쳐 보인 바 있다.

 

거대한 감옥이었다

 

마음 속에 집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과

마음 밖 먼 곳에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

아무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른다

 

갇혀서 오늘을 산다

 

- 「水落山下 -상계동 ⁃27」전문

 

그렇다! ‘오늘날 여기’ 에서의 현대적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사는 수형생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순응하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려고 갈등하며 방황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모두에게 있어 ‘오늘 여기’서의 삶이란 고통스런 사막의 삶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 // 갇혀서 오늘을 사는”막막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막은 “나는 어디에든 // 따뜻한 알을 낳고 싶다”( 동상이몽 – 상계동 ⁃ 1」라고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함부로 촛불도 꺼트리고 / 쉽게 마음을 조각내는 /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 칼이 될”(「칼과 집」)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칼이 되어 부딪치면서 무관계한 칼의 삶, 광물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호열 시집 『칼과 집』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광물성의 시대를 기계인간이 되어 살아가면서 불신과 단절의 벽을 더욱 높이 쌓아가는 시대에 생명 회복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집이란 존재의 주거이면서 죽음을 의미하는 한 표상이고 동시에 부활의 집이자 창조의 터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칼과 집’이란 바로 현대적 실존의 소외와 위기를 칼로 날카롭게 상징하면서 소외와 우기 극복 의지를 영원한 집에 대한 갈구로써 형상화한 것이다, 집은 모든 존재의 원초적 삶이 시작되는 근원이며, 세상으로 열려 떠나온 곳이면서 동시에 끝내 다시 돌아갈 장소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그곳은 흙 또는 무덤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현실에서의 집에서 살다가 모든 존재는 여8ㅇ원의 집으로서 무덤으로 돌아가게끔 운명지워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나호열의 시들은 현대적 실존의 모습을 칼과 집, 또는 감옥과 무덤으로 예리하게 상징화함으로써 이 근래 많은 젊은 시인들과는 달리 깊이 있게 철학성을 탐색하는 진지성을 보여준 데서 주목에 값한다. 평론가 박윤우 교수의 지적대로 나호열의 시에서 삶이란 존재의 집을 찾기 위한 끝없는 방랑의 길이며 그 목적지에 무덤이 가로놓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집『칼과 집』 해설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에의 길」).

바로 여기에 필자가 나호열의 시를 주목하는 까닭이 놓여진다. 요즈음 많은 젊은 시인들은

삶의 본질에 깊이 있게 육박하는 것에는 별 관심없이 요설이나 신기한 이미지 또는 실험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른바 소문난 시인일수록 머리로 쓰는 시 또는 손끝으로 쓰는 데 몰두하여, 쓰기 위한 시를 쓰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최근 많은 신진시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깊이 있는 철학서의 빈곤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이며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종용히 몸짓으로 보여 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 「나는 물었다전문

 

이번 상재하는 시집에서 시인은 그간의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에 대한 형이상적 탐구를 더욱 심화해가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실존적 삶의 표징성 또는 존재론적 징후 읽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본질 또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들여다보기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몸짓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나무며 구름, 꽃이며 길과 강들은 모두가 고유한 존재 양식과 독자적인 법칙성을 지닌다. 개별자들이 지닌 존재의 독자성을 존재론적 환원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시인의 네ㅐ면적인 고심이 ‘커져가는 귀’ 또는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라는 질문 제기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문득 길을 잃다」 에서는 사물의 본성이 어둠과 밝음,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면성, 모순성으로 파악될 수 있음을 통해서 삶의 존질을 비워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쁜 화음’의 세계를 갈망하여 존재론적 초극을 지향하기도 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나귀는 앞질러 걸어갔다

뒤쳐져 따르는

일기장이나 편지 같은 것

녹슨 추억의 꾸러미는

쓸데 없이 무겁다

지친 물음으로 나귀가 나를 부른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 「문득 길을 잃다」전문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는 고달픈 순례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인식이 새롭게 시작되는 연작 「문득 길을 잃다」의 내용으로 짐작된다. 녹슨 추억의 꾸러미를 지닌 채 무거운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사막을 가고 있는 낙타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에 해당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어디를 지금 가고 있는가 묻고 있는 낙타의 모습이란 바로 존재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인간의 또 다른 형상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실상“너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모습에대한 인식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서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바로 시를 보는 일이라는 인식이 함께 반영돼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전개하면서도 그의 시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실존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서 시적 건강성과 탄력성이 드러난다.

 

하루에두세번씩

맹수의으르렁거림으로

거울앞에선다

바보스럽기는하지만

엄숙하게칫솔을물고 하얗게

하얗게번져나오는탐욕의거품을내뱉는다

초식과육식의갈림길(희망과절망의그사이)

송곳니와어금니의표정들을 하나로묶으면서

내가살기위하여죽여야하는

불특정다수를향해

무기마냥소중하게이빨을닦으면서

 

-「판토마임」전문

 

이 시는 이빨을 닦는 행위를 통해서 운명과 도전, 육식과 초식, 절망과 희망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의 실존성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있다. 오늘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회의와 반성을 아이로니컬하게 묘파하면서 사람다운 삶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일일까를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호열의 시가 지닌 미덕 또는 건강성이 예리하게 부각된다. 그것은 오늘의 실존적 삶에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본질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일이 오늘에 있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길인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성찰을 끊임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는 오늘의 삶을 사ᅟᅵᆯ아가는 실존의 몸부림과 함께 존재의 본질 또는 자아의 진정한 발견과 실현을 향한 구도적인 안간힘이 제시됨으로써 이즈음 많은 시들이 처한 철학 상실의 위기를 돌파해 나아가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드러난다.

현실의 깊디깊은 갱도 그 어둠 속에 갇혀 묵묵히 인간적 진실의 알갱이를 캐내는 고독한 시의 탄부(炭夫)로서 나호열의 시적 정진은 그 누가 알아주고 않고 간에, 세간의 명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현실의식과 삼투되는 철학성의 획득, 사회의식과 길항하는 예술성의 탐구와 따뜻한 진실미 추구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시는 이미 스스로 빛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 세기말의 기로에서 그의 ‘오늘 여기’가 한 편의 시로 메아리쳐 와서 가슴을 울려준다.

 

누가 뿌린 눈물이기에

이렇게 아리도록 흰 어여쁨이냐

발가벗은 온몸으로 승천하는 것이냐

언젠가 숙명으로 다가왔던 바다는 없고

세월에 절은

이 짠 맛!

 

- 「곰소 염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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