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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도시에서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시정을 느낀다는 것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1. 15. 13:44

[나무편지]

도시에서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시정을 느낀다는 것은……

  낮 길이가 짧아지는 게 느껴지던 즈음에 어느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낙엽 떨어진 거리를 걸으며, 가을의 시정詩情을 느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도시에서는 낙엽을 그냥 두지 않고 곧바로 쓸어버려서 아쉬워요.” 그러자 함께 하신 어떤 분께서 “낙엽을 그냥 두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면서 “낙엽 쌓인 길이 미끄러워지면 넘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맞는 말이지요. 가을 기운을 느끼겠다고 공연히 폼 잡는 사이에 누군가는 미끄러워진 길을 걸으며 넘어져 크게 다칠 수 있는 게 맞는 말입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에 잠깐 들이닥쳤던 비에도 도시 곳곳에서는 큰 피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머무르는 곳에서는 빗소리도 크게 느끼지 못할 만큼 큰 비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비 내리며 낙엽 깔린 길을 걸을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인천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 일부 지역에서는 곳곳에 침수 피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원인은 낙엽이었습니다. 거리에 떨어져 쌓인 낙엽이 배수로에 들어차 배수구를 틀어막으면서, 짧은 비였지만, 빗물이 빠지지 않고 길 위로 차오른 겁니다. 그러고보면 낙엽이 아무리 가을의 상징이라 해도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는 재깍재깍 치워야 할 일입니다.

  어지러운 사람살이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가만가만 낙엽 밟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길을 떠올릴 수밖에요. 도시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다녀온 해남 흑석산 주변의 숲길이 머릿속에 맴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사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많이 찾아보아야 하는 나무 답사 길에서라면 제게도 그처럼 천천히 숲길을 걷는 게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주의 해남 흑석산에서는 사람 없는 고요한 숲길을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할 수 있는 한 더 천천히 걸었습니다. 나무가 혹은 숲이 가진 최고의 미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치유의 미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입때껏 초록이었던 나뭇잎들은 붉거나 노랗게 바뀌었습니다. 높지거니 나뭇가지를 솟구쳐 올린 백합나무(Liriodendron tulipifera L. 튤립나무)의 잎은 초록 빛을 내려놓고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널찍한 잎으로 비쳐드는 가을 햇살은 더없이 화려했습니다. 걸음걸음이 가볍고 편안했으며, 나뭇잎이 광합성의 큰 노동을 내려놓은 것처럼 사람살이에서의 밀린 일에 대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다른 일은 잊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치는 나무를, 그리고 나무 위에서 생명의 온갖 빛깔을 끌어올린 잎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걷고 싶은, 머무르고 싶은 숲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는 도시의 회색빛 길을 걷습니다. 그때처럼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가로수 우거진 길이어도 낙엽 쌓인 길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 그 숲을 떠올리며 길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붉은 단풍나무 낙엽, 벚나무 낙엽, 노란 은행나무 낙엽 쌓인 자리를 찾아 뒤뚱뒤뚱 어색하게 걸어봅니다. 한햇동안의 큰 노동을 마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무의 마지막 흔적이 가만히 들려주는 가을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를 가슴에 고이고이 담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2년 11월 14일 대낮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