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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고려 공민왕의 흔적에서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 관리 자취까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0. 11. 11:45

[나무편지] 고려 공민왕의 흔적에서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 관리 자취까지

  ‘곤지암 소머리국밥’은 널리 알려졌지만, ‘곤지암’이 대관절 바위인지, 절집인지 헷갈릴 수 있습니다. 뭐 그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겁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 이야기할 ‘광흥창’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마포의 ‘광흥창역’은 잘 알아도 정작 ‘광흥창’이 뭐하는 데인지를 아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우리 사람살이의 긴 역사를 간직한 지역이 한두 곳 아니고, 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름은 입에 익어도 그 내력을 우정 짚어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도시 생활이라는 게 죄 그런 거 아닌가 싶다는 거죠. 오늘 《나무편지》에서 전해드리려는 나무가 바로 광흥창터 공민왕사당에 있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들입니다.

  우선 광흥창廣興倉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네요. 간단히 하자면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 및 그 관할 하의 창고를 말하는 곳입니다. 고려 때에 처음 설치해서 국가 재정을 관할하는 주요 기관으로 운영하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다가 조선 고종 33년인 1896년에 폐지한 관서입니다. 전국에서 곡식이 한강변의 양화진으로 실려오면 그 곡식을 바로 이곳 광흥창이라 불리던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장소는 몇 번의 이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서강(西江)의 북쪽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바로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에서 조금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광흥창이라는 옛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광흥창 터’ 표지만 남아있는 상황이지요.

  이곳 광흥창터에는 고려 공민왕사당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당 역시 원래의 건축물은 아닙니다. 한국전쟁 때에 완전히 무너앉은 것을 전쟁 뒤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복원된 것입니다. 광흥창터에 공민왕사당을 건립한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광흥창을 지을 때 마을 노인의 꿈에 공민왕의 영령이 나타나서, “여기는 나의 정기가 서린 곳이니 사당을 짓고 봉제하라. 그러면 마을의 살림살이가 번창하리라”고 했다는 거죠. 그래서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린 겁니다.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공민왕사당을 탐탁치 않게 여겨 ‘신당’이라 불렀는데, 19세기 초반부터 원래의 이름인 ‘공민왕사당’으로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복원한 건물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됐고, 지금도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오랜 사람살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광흥창터 공민왕사당을 지키고 있는 건 어김없이 커다란 노거수 다섯 그루입니다. 회화나무 세 그루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 나무들입니다. 다섯 그루 모두 제가끔 지정번호를 부여받은 산림청 보호수입니다. 굳이 다섯 그루를 합쳐서 한꺼번에 이름을 붙이자면 〈서울 창전동 공민왕사당 노거수군群〉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 겁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광흥창터’를 내세울 수도 있지만, ‘공민왕사당’이 더 익숙한 듯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보호수로 지정하긴 하지만, 나무나이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다섯 그루 가운데에 가장 오래 된 나무가 지정번호 ‘서 14-3’인 회화나무인데, 그래봐야 고작 280년 된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의 회화나무의 대표급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아무래도 모자랍니다.

 

 

  그 오래 된 회화나무는 광흥창터-공민왕사당의 맞은편의 ‘서강쌍용예가아파트’ 단지 안에 있습니다. 당연히 이 오래 된 회화나무는 아파트 소유로 돼 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는 지정번호 ‘서 14-3’인 회화나무를 단지의 상징으로 여길 만큼 소중히 보호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나무의 생육 상태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나무높이는 12미터 정도 되는데요. 그 삼분의 일이 좀 넘는 5미터 높이까지의 줄기 부분의 절반은 아주 오래 전에 썩어 문드러져 겨우 옛 형체를 흉내낸 외과수술로 메워주었을 뿐입니다. 애면글면 줄기껍질만 남은 그 몸통줄기 끝 부분에서 가느다란 가지들이 솟아나오며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긴 했지만, 앙상한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고작 3백년쯤밖에 안 된 젊은 나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서울’이라는 환경이 나무가 오래 견디기 힘든 게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단지의 북서쪽 출입구로 나오면 좁다란 자동차 도로가 나오고 그 맞은편에 광흥창터-공민왕사당이 있습니다. 터가 도로보다 높아서 열 개쯤의 계단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 계단참에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두 그루 모두 180년 된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보호수로 지정한 회화나무 가운데에는 거의 막내 격으로 봐도 괜찮을 정도의 어린 나이의 나무입니다. 공민왕사당으로 오르는 좁은 계단 양쪽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넉넉히 가지를 펼칠 공간이 모자라 하늘로 더 높이 솟아서 두 그루 모두 24미터까지 올랐습니다. 아직 젊은 나무여서 싱그러운 생육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돋보입니다. 그러나 역시 땅값 비싼 서울에서 나무가 차지한 뿌리 부분의 땅이 너무 좁아서 앞으로의 생육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보입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대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붓한 마당 가장자리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바투 서 있는 게 보입니다.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220년, 다른 한 그루는 218년 된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건 처음에 한 그루를 심고 좀 지나서 다른 한 그루를 심었다는 이야기에 기초한 추정입니다. 계단참의 회화나무와 비슷한 나무나이의 느티나무여서 필경 ‘젊은 느티나무’라고 해도 될 만한데, 두 그루 중 218년 됐다는 느티나무는 줄기의 절반이 찢겨져 나갔습니다. 원 줄기보다 외과수술로 지은 옛 형체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상태입니다. 다른 한 그루의 느티나무는 큰 탈 없이 건강해 보입니다. 나무 주위에는 울타리를 쳤고, 또 나무의 뿌리 호흡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 바깥으로도 나무 데크를 설치해 흙다짐을 막았습니다. 나무 보호를 위한 최선의 대책을 다 한 것입니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바로 앞에 공민왕사당이 있고, 그 곁으로는 새로 지은 ‘광흥당’이라는 당호의 건물이 한 채 있습니다. 한옥 형식으로 곁의 공민왕사당과 잘 어울리게 지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옛 광흥창과는 무관한 건물입니다. 마포구청을 비롯한 관내의 공립도서관이 이곳에서 갖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활용하는 건물입니다. 공민왕사당에서는 해마다 음력 시월초하루에 올리는 사당제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으며, 또 정월대보름에는 연날리기 지신밟기 등 민속놀이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등, 향토사료 발굴 전시 및 청소년 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섯 그루가 이룬 〈서울 창전동 광흥창터-공민왕사당 노거수군〉은 광흥창과 공민왕사당이라는 역사적 장소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나무로, 장소의 가치는 높지만, 나무나이가 적어서 생물학적 가치는 낮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힘겹게 살아온 그들의 세월과 나무들이 지켜온 사람살이를 돌아보면 오래도록 잘 지켜야 하는 나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무들이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 계절입니다. 아직 또렷하지는 않지만 짙은 초록 사이에 스며드는 붉거나 노란 단풍 빛깔이 눈에 들어옵니다. 단풍 들어 더 환해질 나무들을 찾아 다시 또 ‘고단한 서울 길’에 나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