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의문의 원효로 ‘심원정터’를 말없이 지켜온 느티나무 노거수군
오늘의 《나무편지》는 다시 서울의 나무 이야기입니다. 용산문화원 뒤편 언덕에는 심원정(心遠亭)이란 정자 터가 있습니다. ‘심원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긴 하지만, 이는 새로 지은 정자이고 원래의 정자는 오래 전에 사라진 상태입니다. ‘심원정터’라고 해야 하는 거죠. 바로 곁에 용산문화원이 있고, 그 곁 언덕 위의 작은 공원이 바로 ‘심원정터’입니다. 알려진 대로라면 이 자리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쪽의 심유경(沈惟敬)과 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강화를 교섭한 장소입니다. 그 증거로 ‘왜명강화지처비(倭明講和之處碑)’란 기념비까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왜명강화지처비’를 비롯한 실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에는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편에는 분명히 왜군 고니시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 자리를 명나라의 심유경이 찾아가 협상을 진행한 곳이라고 돼 있기는 합니다만, 그 자리가 이곳 심원정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겁니다. 당시 왜군이 진을 쳤던 곳은 용산에 12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유경이 왜군과의 교섭을 위해 용산의 적진에 들어간 건 맞지만 그곳을 지금의 심원정터라고 확증할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심원정이라는 정자 또한 임진왜란이 벌어진 때에는 없었습니다. 심원정은 임진왜란 발발부터 거의 200년 쯤 지난 뒤에 남공철(1760~1840)이라는 사람이 처음 지었다고 합니다. 왜군과 명군이 교섭할 장소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심원정은 나중에 조두순의 소유가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라는 일본인이 별장으로 사용합니다. ‘왜명강화지처비’ 기념비 또한 1936년 이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걸 바탕으로 하면 심원정을 별장으로 이용하던 일본인 이노우에가 나중에 세운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곳 심원정터를 찾은 건, 600년 넘은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 정보 없이 나무의 위치 정보만을 가지고 골목골목을 돌아들어 겨우 나무를 찾아내고 보니, 큰 나무 곁에 ‘왜명강화지처비’라는 기념비가 있었고, 주변에는 다른 느티나무 노거수 여러 그루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한켠의 전망 좋은 곳에는 ‘심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새로 세운 정자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지만, 주변의 느티나무 노거수 다섯 그루가 한데 어울려 있다는 점에서 자세히 살피게 됐습니다. 주변에는 심원정터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적은 몇 가지 안내판이 있어서 샅샅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돌아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대개는 안내판에서 보았던 내용 그대로였습니다만, 여러 자료 중에 역사칼럼니스트인 박종평 님의 글을 보게 됐습니다. 박종평님의 글은 안내판의 내용에 들어있는 허점 등을 지적하고, 고증 자료를 비교하며 설명한 좋은 글이었습니다. 심원정이라는 정자가 임진왜란 당시에 없었다는 점을 비롯해 조목조목 지적한 내용이 합당해 보였습니다.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를 논할 입장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만 용산구청에서 작성한 ‘심원정터’에 대한 안내문에는 의심을 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논란의 향방과 무관하게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은 서울 지역에서 나름의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해야 할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고증에 있어서 허술한 점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에라도 이 공간을 지켜온 노거수 느티나무들에 대해서는 더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에서 ‘논란’이라고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심원정과 왜명강화지처비에 대해서는 사실상 ‘논란’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인 듯합니다. 논란의 어느 쪽으로도 명확한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없어서이겠지요. 어딘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올 때까지 아마도 논란은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장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려다보니, 나무 이야기가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논란과 무관하게 일단 이곳의 노거수들은 한데 묶어 ‘서울 원효로 심원정터 느티나무군’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습니다. 모두 다섯 그루의 노거수 느티나무입니다. 지금은 ‘심원정터’를 마을 근린공원으로 조성한 상태인데, 이 터의 입구에서 먼저 나무 높이 21미터의 300년 된 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자리의 돌담에 있는 17미터 높이의 200년 된 느티나무, 그리고 심원정 안쪽에 높이 20미터의 200년 된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새로 지은 정자 심원정이 바로 그 곁에 있습니다.
이 자리가 가파른 언덕 자리여서, 심원정터로 구획된 곳을 평탄화하다 보니, 아래쪽으로 절개지가 형성됐는데, 그 아래 쪽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더 있습니다. 그 중 한 그루가 이 곳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 된 630년 된 느티나무이며, 다른 한 그루는 200년 된 느티나무입니다.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가 무리를 지어 작은 마을 숲을 형성한 셈인데, 문제는 나무마다 생육 공간이 비좁아서 나뭇가지 펼침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한눈에도 무척 답답하다는 느낌입니다. 어쩌지 못한 나무들은 다른 곳의 여느 느티나무와 달리 가지를 옆으로 넓게 펼치기보다 햇빛을 찾아 하늘로 쪽쭉 뻗어오르며 애면글면 격동의 역사를 지켜왔습니다.
서울 지역의 노거수를 답사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를 찾는 일과 닿아있기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고, 하나하나의 내력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기만 합니다. 이 땅의 사람살이를 가장 격동적으로 보낸 곳이 바로 이 곳 한양 땅, 서울인 때문이겠지요.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지켜온 의문의 심원정터 느티나무 노거수군 이야기였습니다. 정확한 답은 아무래도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만 분명 이 자리의 ‘장소적 가치’는 한번쯤 짚어봐야 하지 싶어서 시원한 답도 드리지 못한 채 오늘의 《나무편지》는 이만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아침 바람이 되우 차갑습니다. 그래도 결실의 계절 가을, 알차고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2년 10월 24일 아침에 …… 솔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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