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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가을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길섶에 피어난 팜파스글래스 꽃차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19. 14:54

[나무편지] 가을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길섶에 피어난 팜파스글래스 꽃차례

  마음이 급한 것일까요? 가을 다가오는 속도가 느리지 않나 싶습니다. 충남 지역에 때아닌 폭염특보까지 내렸던 지난 금요일에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구월 중순에 폭염특보라니요. 그 날 천리포수목원은 무척 더웠습니다. 한여름 무더위에 견줄만한 뜨거운 날씨였습니다. 이제 그만 여름을 떠나보내려는 나무들의 몸짓은 뚜렷했지만, 아직 가을 빛깔은 채 올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려한 단풍도 아직은 이릅니다. 좀더 기다려야 합니다. 단풍이 아름댜우려면 앞으로도 거의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저 이맘때면 이른 봄에 꽃 피어나기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날짜를 손꼽아보곤 합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가을 풍경을 압도하는 건 무엇보다 팜파스글래스입니다. 팜파스글래스는 우리나라의 자연 상태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입니다. 우리의 억새와 마찬가지로 벼과이지만, 억새 속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한 종류도 없는 코르타데리아 Cortaderia 속에 들어가는 식물입니다. 코르테리아 속의 식물은 세계적으로 스물 세 종이 있는데, 주로 뉴질랜드와 남미 지역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억새에 비해 꽃차례가 훨씬 풍성하고 높이도 훨씬 크게 솟아오른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억새와 같은 분위기의 가을 식물입니다. 엊그제 상황으로 봐서는 한 주일 정도 더 지나야 수목원 안 곳곳에서 자라는 팜파스글래스 꽃차례들이 절정을 이루지 싶습니다.

  역시 이 즈음에 마주치는 화려한 식물로 꽃무릇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식물학에서 부르는 ‘석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우리가 예부터 불러온 ‘꽃무릇’이라는 이름이 훨씬 정겹습니다. 잎 하나 없이 훌쩍 올라온 꽃대 끝에서 핏빛으로 화려하게 피어난 꽃은 잎을 그리워 하고, 꽃 진 뒤에 돋아날 잎은 다시 꽃을 하냥 그리워하는 슬픈 운명의 꽃이지요. 큼지막한 꽃송이와 꽃송이 바깥으로 삐죽이 뻗어나오는 꽃술이 유난스레 화려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땅 위에는 아무 조짐을 보여주지 않다가 바람결에 가을 기미 스밀 즈음이면 화들짝 꽃대를 솟구쳐 올리며 꽃을 피웁니다. 천리포의 꽃무릇 역시 팜파스글래스처럼 한 주일 정도 지나면 절정을 이루지 싶습니다.

  꽃무릇을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상사화는 다른 식물입니다. 꽃의 생김새나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상사화 꽃은 분홍색이고, 꽃무릇은 짙은 주홍빛이라는 것부터 다릅니다. 또 상사화의 꽃술은 다소곳이 꽃송이 안쪽에 모여 피어나지만 꽃무릇의 꽃술은 꽃송이 바깥으로 솟아나오는 바람에 상사화보다 화려해 보입니다. 또 여섯 장의 꽃덮이(화피, 花被)도 다릅니다. 꽃무릇의 꽃덮이는 상사화보다 더 깊이 갈라져서 길고 가느다랗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꽃 피는 시기도 달라요. 상사화 꽃은 꽃무릇보다 한 달 쯤 이른 7월 쯤에 피어나거든요.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상사화는 꽃 피기 전에 잎사귀가 먼저 돋아났다가 잎이 지고나서 꽃이 피어나는데, 꽃무릇은 꽃 진 뒤에 잎이 나와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난다는 거죠.

  가을이면 거개의 식물들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햇동안의 노동의 결실을 갈무리해서 이듬해에 태어날 후손을 준비해야 하지요. 식물의 생애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이지 싶습니다. 그래서 이 즈음이면 수목원 곳곳의 모든 나무들이 열매를 돋워 올립니다. 열매는 나무마다 빛깔과 모양이 제가끔입니다. 그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신비롭게 돋아나는 열매로 좀작살나무의 열매를 들 수 있습니다. 좀작살나무는 작살나무보다 작은 나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좀작살나무는 특히 작살나무와 함께 가장 돋보이는 열매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좀’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따로 분류한 겁니다.

  작살나무와 좀작살나무는 모두 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나무로 손꼽힙니다. 늦봄부터 초여름 즈음에 피어나는 꽃은 워낙 작아서 별 존재감이 없지요. 그러나 열매만큼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매력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빛깔이 그렇습니다. 2~5밀리미터 크기의 이슬 방울처럼 영롱하게 맺히는 열매는 짙은 보랏빛입니다. 참 독특한 빛깔입니다. 좀작살나무의 열매처럼 짙은 보랏빛에 반질반질한 표면을 가진 채 익어가는 열매는 드문 편입니다. 가지 위에 줄줄이 돋워올린 열매들은 볕 잘 드는 쪽부터 서서히 선명한 보랏빛으로 익어갑니다. 아직은 거개의 열매가 연록색을 띠고 있습니다. 보랏빛으로 영롱하게 익은 열매는 몇 되지 않습니다.

  아직 단풍은 이르지만, 꽃무릇 꽃 피어나면 누가 뭐래도 가을이 우리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또 좀작살나무처럼 열매들이 서서히 제 빛깔을 띄워 올리면 우리도 갈무리의 계절을 차분히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이 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2년 9월 19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