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妊婦와 産婦는 엄연히 다른데…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골골샅샅 아기 울음 그득했던 1960년대 출산 억제 표어(標語)다. 그래도 넘쳤던지 70년대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했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던 80년대를 지나 세기가 바뀌자 억제가 장려로 바뀌었다. '아기들의 웃음소리 대한민국 희망소리.'
마침내 올해 신생아(新生兒)가 6·25 이후 가장 적으리라고 통계청이 최근 발표했다. 최악인 2005년이 43만5031명이었는데, 자칫 41만명대로 주저앉을 판이란다. 나라 앞날 걱정할 만큼 귀해진 새 생명, 그 엄마도 귀하게 모셔야 할 시대다. 전철 안 문구가 그걸 말한다. '지하철 전 차량 중앙 좌석 양끝은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주변의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시는 배려를….'
잘 나가다 '임산부(妊産婦)'에서 삐끗했다. 임부(妊婦=임신부·아이를 밴 여자)와 산부(産婦=산모·아이를 갓 낳은 여자)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낳느라 애쓴 산모도 보살피자는 뜻 아니냐 한다면 객차 방송이 반증(反證)한다. "우리 열차는(…) 특히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도 이용할 수 있도록…." 여기에 교통 약자 배려석 영문(英文)이 거든다. 'Seats for the handicapped, old, weak, pregnant woman, or accompanied with baby.' 영어로는 pregnant(임신한)라고 제대로 쓸 줄 알면서…. 성치 않은 한국어를 외국어(이 영문 역시 일부는 성치 않지만)가 확인해주다니, 서로 민망하다.
꼭 1주일 전 독자 투고(投稿)는 여러모로 안타깝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30주 된 임산부다. 만원 지하철에서 임산부가 임산부 석을 이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 임산부 아닌 사람이 앉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임신부 배려 않는 현실 고발이자, 잘못된 언어 현실 고발인 셈이다.
공교롭게 같은 날 다른 지면 기사(記事)도 고발감이다. '세 살짜리 아들을 둔 임산부 정○○(여·36)씨는 요즘 육아 의료 관련 책을 읽고 있다. (…) 정씨와 함께 육아 의료 공부를 하는 임산부 김○○(여·31)씨는….'
그나저나 엄마들 얘기 하면서 괄호 안에 '여(女)'는 왜 넣었담. 잘하면 임신부(妊娠夫) 나오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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