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독자를 끝없이 홀리는 단어 '입장'
성질이 순한 사람을 흔히 양(羊)이라 한다. 호랑이는 거꾸로 몹시 사납고 무서운 사람을 빗대는 말이다. 미련하거나 행동이 굼뜨면 곰, 능청스러우면 구렁이다. 간사하거나 꾀 많기로는 여우가 으뜸이다. 말에도 이런 '여우'가 있다.
'입장(立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처지(處地)로 순화.' 하지만 이 정도 사전 풀이로 곱게 잡힐 여우가 아니다. 신문에 나타난 여러 모습을 살펴보자.
'딸의 불륜에 충격을 받았을 김민희 어머니 입장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전 풀이대로 '처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입장'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표정을 바꿨다. '홍 감독과 김민희는… 불륜설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어울리지 않고, 경위(經緯)나 해명이 그나마 가깝지 싶다. 차라리 '불륜설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했으면 어땠을까.
'박씨는 그러나 배출가스 장치 조작 여부 등은 몰랐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우가 다시 둔갑(遁甲)했다. 주장인가, 태도인가. 역시 입장이란 말 빼고 '몰랐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나았겠다.
'경제계에선 일단 (김영란법의) 첫 시범 케이스로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생각'을 넘어 '각오'라는 뜻으로도 통할 법하다.
'리우 당국은 올림픽 개막 사흘 전에는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을 내놓고 있다.' 예상인지 의견인지, 아니면 판단인지. 보는 사람 홀리기가 끝이 없다.
'한진해운 측은… 나머지 금액을 지원해달라는 입장을 전달했지만, 채권단은 추가 지원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채권단 내부적으로는… 논의해 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요청'도 마다치 않더니 '방침'을 내세웠다가, '태도'나 '분위기'를 풍긴다. 한자리에서 이렇게 요술(妖術)을 부리니, 이쯤 되면 여우도 그냥 여우가 아니라 구미호(九尾狐)다.
한둘도 아니고, 일본식 한자어 운운(云云)은 잠시 접어두자.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굳이 들먹이지 말자. 다만,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언론의 기본이라면, 사람들 제대로 홀릴 생각 아니라면, 뜻 모를 말 쏟아내지 말자. 이 더위, 구미호 사냥으로 이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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