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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사랑했던 별서의 들고난 사람살이를 지킨 소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13. 14:17

[나무편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사랑했던 별서의 들고난 사람살이를 지킨 소나무

  ‘거리두기 해제 후 첫 명절 연휴’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단단히 채비했습니다. 멀리 떠나려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을 천천히 여유로이 헤집고 다닐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서울 노거수 조사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짐작이었지요. 사람도 자동차도 많은 서울 지역의 노거수를 찾아다니는 건 언제나 매우 번거로운 일이거든요. 혼잡한 교통과 번거로운 주차 사정을 생각하면 서울 지역 답사는 당연히 걸어서 다니는 게 좋습니다. 지난 봄부터 서울 지역의 큰 나무를 답사하는 과정에 몇 차례는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했지만, 그때마다 혼잡한 도로 사정을 버텨내기가 버거웠고, 겨우 목적지에 다다랐어도 자동차를 주차하지 못해, 한참 돌아다니다가 목적지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자리에 주차하고는 다시 먼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이번 추석 명절 연휴, 이른바 ‘민족 대이동’이 여간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서울이 비교적 비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특히 서울의 중심이랄 수 있는 중구와 종로구의 나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계산하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휴가 기간에 서울에 남아 있는 분들의 상당 수가 바로 중구와 종로구에 모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궁궐 나들이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때가 바로 휴가 기간이었던 겁니다. 특히 이번 연휴 중에는 새로 개방한 청와대를 찾는 분들이 유난히 많아 보였습니다. 결국 서울에 자리잡고 사시는 많은 분들이 고향을 떠난 이 시기였건만 서울의 중심지에는 더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습니다. 서울 지역 나무 답사는 편한 날이 없습니다.

  이번 서울 나무 조사에서는 그래도 의미 있는 큰 나무들을 적잖이 찾아보았습니다.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는 연휴 동안 찾아본 서울의 큰 나무 가운데에 가장 나이가 적은 나무부터 소개 올립니다. 이 나무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개인 사유지 안에 들어 있어서, 미술관을 통해 들어가야만 볼 수 있습니다. 미술관 입장권은 1만5천원입니다. 나무 한 그루만을 보기 위해서라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 나무보다 훨씬 크고 좋은 나무들을 그저 아무 때나 아무 비용 없이 찾아가 바라볼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미술관의 일정에도 맞추어야 합니다. 미술관이 일찍 문을 연다 해도, 나무가 있는 ‘석파정’ 앞까지 가는 문은 오전 11시가 되어야 열어 줍니다.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10시도 채 안 되어 도착해서는 하릴없이 한 시간 넘게 시간을 흘려 보내야 했습니다. 개방 시간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서 “서울에 산다는 건 이래저래 복잡하고 힘겨운 일이고, 돈도 좀 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여간 ‘석파정 서울미술관’의 입장료를 내고, 개방 시간까지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났습니다. 〈서울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입니다. 오랫동안 ‘천세송 千歲松’이라고도 불려온 소나무입니다. 대략 200년쯤 된 나무입니다.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리는 여느 나무에 비해 어린 나무입니다. 특히 400년 넘게 살아온 나무가 많은 소나무 가운데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서울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석파정 石坡亭’부터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석파정은 처음에 조선 철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라는 분의 별서였습니다. 워낙 풍광이 좋은 곳이어서, 가까이에 안평대군의 집터인 ‘무계정사 武溪精舍’, 윤치호의 별장인 ‘부암정 傅巖亭’이 있기도 합니다. 김흥근은 이곳에 ‘삼계동정사 三溪洞精舍’라는 이름의 별서를 짓고 살았습니다. 이 별서를 탐낸 사람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습니다. 이하응은 김흥근에게 별서를 자신에게 팔라고 여러 차례 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이 별서를 포기하지 않은 이하응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인 임금 고종과 함께 이 곳을 찾아 하루 묵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임금이 묵은 집에 그 신하가 살 수는 없다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다는 걸 이용한 거죠. 이 아름다운 풍광의 별서는 결국 이하응이 물려받게 됐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 집을 무척 좋아했고, 주변이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해서 집 이름을 ‘석파정 石坡亭’, 즉 ‘바위고개 정자’라고 고쳤으며, 심지어 자신의 호까지 ‘석파’로 바꾸게 됐지요. 이하응은 이 집에서 오래 머물렀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후손들이 별장으로 이용했습니다. 한국전쟁 뒤에는 한국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던 적도 있었고, 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 뒤에도 소유권이 자주 바뀌었는데, 마침내 2006년에 의약품유통업체인 ‘유니온약품그룹’의 회장이 이 집의 최종 소유자로 확정되었고, 그는 석파정 입구에 사설 미술관을 세우고 석파정을 함께 관리하게 돼 지금에 이릅니다.

  참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나온 별서입니다. 나무 이야기는 별로 하지 못하고 석파정 이야기만으로도 글이 길어졌습니다. 곡절을 겪으며 소유자가 바뀌는 동안 석파정 주변의 풍경도 따라서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고 든든히 이 집의 역사를 증거하며 살아온 건 ‘천세송’이라고 불러온 소나무 한 그루입니다. 나무 이름만으로는 천년을 살아온 나무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한 1968년에 측정한 나무나이는 대략 180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50년 넘게 지났으니 이제 200년을 조금 넘은 나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나무나이로 보아서는 대단할 것 없는 나무이지만 살펴볼 만한 이유는 충분한 나무입니다.

  앞에서도 되풀이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우선은 풍광이 참 좋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곳 석파정에서 내다보는 풍경이라 해 봐야 서울 도심의 풍경이지만, 석파정 앞으로 널리 펼쳐진 도시 풍경은 마음을 훤히 뚫리게 합니다. 그리고 나무 그 자체만으로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나무입니다. 나무의 높이는 고작해야 6미터에 불과하지만,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높이의 세 배나 되는 18미터 가까이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이처럼 넓게 펼친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겁니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가만가만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흐름을 살펴보면 금세 놀라게 됩니다. 우선 나뭇가지들이 배배 꼬이며 마치 용틀임하듯 솟아오른 광경은 하나하나가 모두 매우 특별합니다.

  눈에 띄는 특별한 현상으로 몇 곳의 연리지 현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촘촘히 뻗어나가다가 다른 가지와 만나면서 아예 하나로 붙어 버린 경우를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무려 세 곳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연리지 현상을 찾을 수 있는데요. 그 세 곳 외에도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연리 현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한쪽에서 올라온 가지가 다른 쪽에서 올라온 가지와 만나면서 세모 모양의 폐곡선을 이룬 부분도 있고, 위로 뻗었던 가지가 아래로 늘어지면서 바로 아래 쪽의 가지와 완전히 붙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 둘 짚어보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닙니다. 혹시라도 〈서울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를 찾아가시게 된다면 풍광만 즐기실 게 아니라, 나뭇가지가 지어내는 신비로운 모습까지 꼭 살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매우 즐거운 경험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명절 연휴를 이용해 살펴본 여러 큰 나무 가운데에 가장 어린 나무인 2백 년 된 나무 이야기였습니다. 어린 나무이지만, 나무를 심어 가꾼 사람들의 이야기의 부침이 심했던 탓에 오늘의 《나무편지》가 턱없이 길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오늘의 길었던 나무 이야기를 줄이겠습니다.

  푸근했던 추석 연휴가 지나갔습니다. 다시 평안한 마음으로 갈무리의 계절 가을을 더 알차게 맞이하실 채비에 나설 때입니다. 모두 풍성한 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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