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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편지] 이름만으로도 무더위를 식혀줄 듯한 물푸레나무 큰 나무 한 그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8. 8. 18:30

 

 

[나무편지] 이름만으로도 무더위를 식혀줄 듯한 물푸레나무 큰 나무 한 그루

  팔월의 첫날 아침입니다. 태풍 하나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데, 또 하나의 태풍이 올라온답니다. 바람은 크지 않을 듯한데, 비를 많이 몰고 온다네요. 태풍 탓에 한낮의 더위는 조금 식는다고는 해도 열대야가 이어진답니다. 초복 중복 다 지나고 이번 주말은 입추立秋입니다만 폭염은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은 태풍도 폭염도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싶습니다. 아마 이번 주는 더위를 피해 잠시 쉬는 휴가를 보내는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이 즈음일테니, 쉬어가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즐겁고 평안한 휴가 보내시기 바라면서 《나무편지》 전해 올립니다. 

  ‘무더위의 여름’에 잘 어울리는 나무를 떠올리라면 가장 먼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남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물푸레’라는 나무 이름이 지어내는 소리가 주는 삽상한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을 나무로 충남 보은은 한적한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떠올린 것도 그래서입니다.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를 답사한 건 지난 해 시월이었습니다. 마을에는 물푸레나무와 함께 찾아볼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었습니다. 산수유입니다. 먼 길을 찾아가서 한 마을에서 두 그루의 큰 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지요. 발걸음을 줄이면서 더 많은 나무를 찾아보는 결과가 될테니까요.

  지산리芝山里는 마을 북쪽에 ‘건지봉’이 있어서 ‘지산’이라고 불리는 보은읍 남서쪽 마을입니다.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가 서 있는 마을은 ‘원지산’ 혹은 ‘선학동(仙鶴洞)’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지요. 효자 마을로 널리 알려진 이 근처에는 백씨 성을 가진 효자의 전설을 담고 ‘효자못’으로 불리는 연못이 있습니다. 어느 겨울 날, 이 젊은이의 병든 어머니가 생선이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돈을 주고 생선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젊은이는 고민하며 길을 나서던 중에 마을 남쪽의 연못에 이르렀는데, 연못의 얼음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잉어가 뛰어올랐습니다. 젊은이는 이를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생각하고 가져와 어머니께 드려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연못을 ‘효자못’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효자마을 선학동을 찾았던 그 날, 시월이었지만 내리쬐는 볕이 강해 모자를 질끈 눌러쓰고 마을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인 살림집들은 모두 근사했습니다. 대개는 새로 지은 깨끗한 집들이었습니다. 상업적 펜션이 줄지어선 마을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새로 고쳐 지은 집들이었습니다. 걷던 중에 담장 곁에서 마을 아낙을 뵙고, 산수유와 물푸레나무의 존재와 위치를 물었습니다만, 갸우뚱하면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릴없이 그저 한적한 산책이라 생각하고 뒷산으로 이어지는 마을 골목을 걸었지요.

  마을 끝에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과수원 안쪽에서 〈보은 지산리 산수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높이 6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2미터인 이 산수유는 백이십 년밖에 안 된 나무입니다. 규모나 연륜으로 보아서 딱히 찾아 보아야 할 만큼 큰 나무는 아니었지만, 기왕에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를 찾으러 들어선 김에 찾아볼 요량이었던 나무였습니다. 과수원 울타리 안쪽 언덕 위의 산수유는 다른 나무들에 둘러싸여서 찾기 쉬운 건 아니었지만, 유심히 돌아보면 찾을 수 있는 나무입니다. 〈보은 지산리 산수유〉는 그러나 중심 줄기 안쪽이 많이 썩어 속이 완전히 드러나고 줄기 껍질만 겨우 남은 상태입니다. 그래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를 세우고 나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수명을 다한 듯 보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이유도 알 만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보은 지산리 산수유〉이고, 오늘의 다른 사진은 모두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입니다.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를 찾을 차례입니다. 지산리 선학동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아담한 크기의 나무인데, 자동차로 마을에 들어설 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는 삼백오십여 년 전인 조선 현종 5년(1664)에 우암 송시열이 보은읍 종곡리에 있던 ‘김수온 부조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손수 심은 나무로 전합니다. 삼백 년 이상 된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는 비슷한 나이의 여느 물푸레나무에 비해 작은 편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큰 나무였는데, 한때 병충해가 심해서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수세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그때 나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나뭇가지의 상당 부분을 쳐내면서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거죠. 그 뒤 관계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의 외과수술을 비롯한 다양한 보호 대책으로 수세는 회복되었지만, 줄어든 규모야 어쩔 수 없지요.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는 곧게 오른 몸통줄기의 2.5미터쯤 높이에서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펼치며 단아한 수형을 갖췄습니다. 몸통줄기 위쪽은 오래 전에 부러진 흔적이 눈에 띕니다. 앞에 이야기한 오래 전의 병충해 위기의 흔적이지요. 위쪽이 완전히 부러진 이 부분은 외과수술로 메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밖에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 부분에는 특별한 훼손 상태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서쪽 방향으로 살짝 기운 몸통줄기는 위쪽이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고르게 펼쳤습니다. 까닭에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습니다. 몸피를 줄이면서까지 죽을 위기를 이겨낸 작은 나무치고는 수형이 아름답다고 해도 될 만합니다.

  나무 곁에는 이 마을을 가리키는 ‘선학동’이라는 작은 입석을 세웠으며 그 뒤에는 돌무지를 쌓아놓았습니다. 돌무지를 봐서 마을 동제를 지내는 나무로 보이지만, 나무 곁에서 뵈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동제를 지내지 않은 지 오래 됐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을 사람의 일부는 이 물푸레나무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수세가 약해지면서 나무의 특별함이 사라진 탓이지 싶네요. 나무의 북동쪽 바로 곁으로 대추나무 과수원의 비닐하우스가 이어져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대형 우사牛舍가 자리잡았습니다. 나무 주변에 울타리는 따로 설치하지 않았고, 나무와 대추나무 과수원과의 사이에는 바닥에 경계석을 놓고 보호하는 상태입니다.

  마을의 뒷동산에는 1984년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한 ‘김수온부조묘’가 있습니다. 바로 송시열이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를 기념식수로 심던 그때에 옮겨온 사당입니다. 김수온부조묘는 조선 성종이 어명을 내려 세운 김수온의 사당입니다. 조선 전기 문신인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세종 때에 벼슬자리에 올라, 호조판서를 거쳐 성종 때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까지 지낸 문신입니다. 특별히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의 문장은 당시 명나라에까지 알려질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사당인 부조묘를 삼백오십 여 년 전에 이 마을로 옮기는 작업은 당대 최고의 권력이었던 송시열이 주도했으며, 부조묘를 옮긴 기념으로 송시열이 손수 마을 어귀에 심은 나무가 바로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입니다.

  〈보은 지산리 물푸레나무〉는 처음 심어질 때부터 쓰임새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 자랑거리의 하나로 여기기 위해 심은 나무여서 삼백오십 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살아온 문화적 가치를 가지는 나무입니다. 나무의 수세가 약해졌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보호로 여전히 싱그럽게 살아있는 나무를 앞으로도 오래 보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아침의 《나무편지》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모두 이 여름, 건강히 나십시오.

  고맙습니다.

- 팔월 첫 날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