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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남대문 괴담과 사라진 국보 번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8. 4. 14:42

가토 기요마사가 통과해서 남대문이 ‘총독부 보물’이 됐다고?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0. 남대문 괴담과 사라진 국보 번호

입력 2022.08.03 03:00
 
 
 
 
 
서울 남대문은 국보1호였다. 2021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관련법을 개정해 지정번호 표기를 없애면서 ‘국보 남대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남대문으로 입성해 한성을 함락시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남대문을 보물1호로 등재시켰다는 이야기가 초래한 결과다. 찬찬히 뜯어보면, ‘일본 전승 기념을 위한 남대문 보물 지정’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 괴담이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xdrfm8uSAw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밤 남대문이 전소된 이후 남대문은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남대문은 무사히 복구됐지만 또 다른 논쟁이 터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2번대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남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고, 식민 시대에 총독부가 남대문을 ‘전승문(戰勝門)’으로 기념하기 위해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했으며 그 체계를 답습한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전승문을 ‘국보 1호’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논란 끝에 2021년 남대문은 물론 ‘보물 1호’였던 동대문도 1호 딱지가 떨어졌다. 전국 팔도 모든 국보·보물 번호가 사라졌다.

이런 조치가 합리적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전부 “맞는다”라고 답해야 한다. 첫째,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는가? 둘째, 조선총독부는 그 남대문을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했는가? 셋째, 가토 기요마사의 개선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정했는가? 조목조목 본다.

임진왜란과 남대문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한 2번대는 한강을 건너 계속 전진해 5월 2일 저녁 남대문을 통해 경성에 입성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그날 오후 8시 동대문에 접근했으나 성문이 닫혀 있었다. 이에 장사 몇 명을 시켜 수문을 파괴하고 진입해 안에서 성문을 열게 했다. 이로써 아군 전 병력이 경성을 점령했다.’(日本參謀本部 編 ‘日本戰史-朝鮮役’, 偕行社(도쿄), 1924, pp167, 168) 1924년 일본 참모본부 ‘일본전사(日本戰史)’에 실린 내용이다. ‘실록’과 ‘징비록(류성룡)’ 같은 다른 기록에도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으니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본군이 한성 함락 작전 때 통과한 문이 분명하다. 첫 번째 질문 답은 ‘사실이다’.

1934년 조선총독부 관보. 남대문과 동대문에 조선 보물 1, 2호 번호가 붙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의 보물 선언

1934년 8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하 ‘보존령’)에 관한 고시가 게시됐다. ‘보물’ 153점과 ‘고적’ 13군데, ‘명승천연기념물’ 3군데가 보존할 문화재로 지정됐다.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리스트 첫머리는 이러하다.

제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3호 보신각종, 4호 원각사지탑, 5호 원각사비.

해방 후 이들 ‘보물’을 일체 ‘국보’로 격상시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들 가운데 가치가 떨어지는 문화재를 ‘보물’로 격하했다. 다음은 그 대한민국 ‘국보’와 ‘보물’ 상위 명단이다.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 국보 2호 원각사지탑, 보물 2호 보신각종, 국보 3호 진흥왕 순수비, 보물 3호 원각사비.

국보와 보물 명단을 통합하면 ‘진흥왕순수비’ 외에는 총독부 보존령 보물 명단과 일치한다. 이게 대한민국 국보 체계가 일재 잔재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사실이다.”

‘조선회고록’(1915). 필자인 전 요미우리신문 주필 나카이 긴조는 남대문 파괴를 주장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자신이 남대문은 가토 기요마사 전승문이라며 존치를 설득했다고 적혀 있다./일본국회도서관

“남대문 부수지 마라, 가토 장군 입성한 문이다!”

2008년 겨울 남대문이 불에 타 사라지면서 전 국민 관심이 남대문에 집중됐다. 그리고 문득 장안에 있는 모든 신문과 방송은 2002년 서울대 대학원 유학생인 일본인이 쓴 석사 논문에 주목했다.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라는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생이 쓴 논문 제목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 조사와 성곽 정책’이다. 오타는 현재 가고시마국제대 교수다.

논문 가운데 남대문에 관한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회는 용산을 포함한 40만~5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 건설을 계획했다. 문제가 된 것은 교통상 장애가 되는 남대문 처리 문제였다. 당시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포차(砲車) 왕래에도 지장이 생기니까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논문에 인용된 위 하세가와 말 출처는 ‘조선회고록(朝鮮回顧錄)’(1915)이라는 책이다. 필자 나카이 긴조(中井錦城)는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주필까지 지낸 언론인이다. 조선에서 ‘한성신보’를 운영하고 일본인 거류민단 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본명은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다.

회고록에 따르면 나카이는 이렇게 하세가와를 설득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다. 그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세 개밖에 없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그러자 장군은 내 주장을 받아들였고 나는 문 양쪽 도로를 넓히는 방안을 내놨다. 그리고 도면을 첨부해 공사관에 제출했다. 그 결과 내 방안이 통과됐다.’(中井錦城, ‘朝鮮回顧錄’, 糖業硏究會出版部(도쿄), 1915, p169) 논문 저자 오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인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을 통과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남대문은 보존됐던 것이다. 동대문이 보존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잿더미가 된 남대문 앞에서 망연자실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대문이 일본 전승문이라서 총독부 보물이 됐다’는 소식은 강력한 뺨따귀였다. “남대문 복원해내라”는 여론과 동시에 “국보 1호 지정을 해제하고 대신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문화재청은 법을 바꿔 지정 번호 자체를 없애버리는 조치로 여론에 대응했다.

1910년 세키노 다다시 조선문화재 목록. 남대문이 맨 처음 나온다./일본국회도서관

1910년 세키노 다다시 리스트와 남대문

자, 가등청정이 남대문으로 입성한 사실도 맞고 조선총독부가 남대문을 지정 번호 1번 보물로 정한 것도 맞는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이다. ‘남대문이 일본 전승문이기 때문에 보물 1호로 지정했는가?’

 

건축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는 조선 문화재 연구 선구자다. 1902년 조선 고건축 조사를 시작하면서 당대 조선 예술과 문화 연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식민 시대 고건축 연구에 필수적인 사진 도록 ‘조선고적도보’는 세키노가 주도해 만든 대작이다.

1909년 9월 세키노는 통감부 치하 대한제국 탁지부 용역을 받고 서울과 개성, 평양, 의주를 답사했다. 이듬해 세키노가 ‘조선예술의 연구(朝鮮藝術之研究)’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책 첫 꼭지에 실린 논문 ‘조선건축조사략보고(朝鮮建築調査略報告)’에 공식적인 조선 보물 분류표가 첫 등장한다.

경성을 보면 남대문-원각사십삼층탑-명정전 등 창경궁 건물 일부-창덕궁 돈화문과 인정전 등이 나열돼 있다. 뒤쪽에 동대문과 남묘, 북묘가 보인다. 각 문화재에는 甲(갑)~丁(정) 등급이 매겨져 있다. 세키노는 ‘최우수인 갑과 을은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세 번째인 병은 조선 전역을 조사한 후 을(乙) 편입 여부를 결정할 대상’이라고 설명했다.(세키노 다다시 등, ‘朝鮮藝術之硏究: 朝鮮建築調査略報告’ p2, 度支部建築所, 1910)

남대문이 갑(甲)인 이유는 이러했다. ‘개국부터 임진왜란 때인 선조까지 약 200년 기간은 명나라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유한 발전이 있었던 시대였다. 실질적으로 한국적인 목조건물이 시작된 시기다. 이 시대 목조건축이 다소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개성 남대문과 경성 남대문이 있다.’(세키노, 앞 논문 pp25, 26)

이 1910년 세키노 다다시 분류표가 1937년 조선총독부 보존령에 따른 조선 보물 리스트의 뿌리다. 분류 기준은 ‘시대’와 ‘대표성’이었다.

건립 시기가 가장 오래된 남대문(1396년)이 갑 가운데 경성 소재 문화재 중 맨 첫머리에 기록됐다. 1467년에 건립된 ‘원각사십삼층석탑’ 또한 갑으로 분류됐다. 19세기 중엽인 1869년 중건된 동대문은 병으로 분류됐다.

타국 학자가 건방지게 남의 나라 보물 순위를 매긴 사실은 열 받지만 가토 기요마사 따위 민족사적 서사가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917년 총독부 보물 목록(1924년 인쇄판). 남대문과 동대문은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1917년 총독부 리스트: 사라진 남대문과 동대문

1916년 총독부는 유물과 명승을 조사, 보존을 위해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 각지 고적과 유물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17년에 완성된 그 목록이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古蹟及遺物登錄臺帳)’이다. 1924년판 이 대장 초록에 등록된 문화재는 193개다. 1호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이고 2호는 원각사비, 3호는 보신각종, 4호는 장의사지당간지주, 5호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다.

눈치챘는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남대문’은 고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동대문’은 사라지고 없다!

고적조사위원회는 총독부 관할이고 최종 결정권자는 조선총독이다. 1916년 총독은 누구인가. 바로 “가토 기요마사 전승문을 부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전 조선주차군 사령관이자 육군원수,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였다. 총독이 존치를 다짐했다는 전승문들이 목록에 없다면, 이는 목록 작성에 민족 감정이나 군인 정신 대신 그 당시 ‘시대’와 ‘대표성’이라는 기준이 적용됐다는 뜻이다.

부실 논문에 선동된 대한민국

온 국민을 흥분하게 했던 오타 히데하루 논문은 허점이 많다. 오타는 ‘첫째,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단이 대도시 건설 계획을 내놨고 둘째, 제일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남대문이었고 셋째, 남대문을 폭파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거류민단장 나카이 긴조가 그 역사성을 강조해 남대문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간대도 주인공도 뒤죽박죽이다. 을사조약 체결일은 1905년 11월 17일이다. 통감부는 3개월 뒤인 1906년 2월 1일 개설됐다. 따라서 거류민단이 통감부에 도시 계획을 내놓은 시점은 1906년 2월 통감부 개설 뒤다. 그때 나카이 긴조는 거류민단장이 아니었다. 나카이는 1905년 12월 민단장 직을 사임했고 1906년 1~2월 민단장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와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라는 골동품상 겸 기업인이었다.(국역 ‘경성부사’ 2권(경성부, 1934), 서울역사편찬원, p649)

그러니 어떻게 ‘전직 단장’ 나카이가, ‘아직 입안도 되지 않은’ 대도시 건설 계획에 대해서 ‘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또 나카이는 남대문 존치 계획을 하야시 공사에게 제출해 승인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일본공사관은 1906년 1월 해체되고 없었다. 따라서 자기가 강력하게 주장해 역사에 무지한 군인을 각성시켰다는 전직 언론인 나카이 긴조 주장은 과장한 기록이거나 허풍이 분명하다.

역사에 눈을 부릅떠야 하는 이유

식민 시대 관광객들은 ‘가토 기요마사 개선문’ ‘고니시 유키나가 개선문’ 따위 문구가 적힌 가이드북을 들고 경성, 전주, 평양 대문들을 구경 다녔다. 이는 최근까지도 식민지 때 전북 무주에 뚫은 터널을 ‘신라와 백제 국경인 나제통문’이라고 선전해온(2018년 1월 24일 ‘땅의 역사’ 참조) 21세기 대한민국 관광업계와 유사한 발상이니 고려할 가치도 없다.

무엇보다 ‘회고록’은 객관적인 사료로 삼으려면 다각적인 교차 검증이 필수적인 기록물이다. 그 검증 작업을 누구도 하지 않았기에 논문이 통과가 됐고 대중적 화제가 됐으며 대한민국 문화재 체계가 뒤흔들렸다. 남은 것, 아니 사라진 것은 국보와 보물 번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