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유물과의 대화

복원한다는 광화문 월대, 있기는 했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7. 18. 16:25

[박종인의 징비]

복원한다는 광화문 월대, 있기는 했나?

입력 2022.07.17 15:20 | 수정 2022.07.18 03:20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사진. 광화문 앞 월대가 훼손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지난 17일 서울시는 서울 광화문 앞을 가로지르는 사직로 도로 모양 변경 공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2023년 10월까지 추진하는 ‘광화문 월대 복원’에 앞서서 직선형인 광화문 앞 도로를 곡선형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선행돼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복원할 월대’가 과연 존재했는가. 둘째, 복원할 가치가 있는가.

월대(月臺)는 주요 궁궐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이다. 경복궁 근정전 주변 월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딱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1866년이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경복궁영건일기’라는 문서다.

1866년 음력 3월 3일자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궁 안에서 짊어지고 온 잡토가 4만 여 짐에 이르렀다.’(국역 ‘경복궁 영건일기’ 1권 1866년 3월 3일, 서울역사편찬원, 2019, p404) 이후 서양인이 방한해 촬영한 각종 사진에는 웅장한 월대 모습이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월대가 식민시대인 1923년 광화문 앞 전차 선로 개설과 함께 철거됐다고 추정한다.(서울시, ‘광화문광장 개선 종합기본계획’, 2018) 1866년에 준공돼 1923년에 사라졌다면 그 존속기간은 57년이다. 이후 광화문 앞은 99년 동안 도로였다.

경복궁 중건 이전에는 월대가 있었을까. ‘기록’으로만 보면 ‘없었다’.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예조판서가 아뢰기를, “광화문 문밖에 섬돌이 없어서 관리들이 문 지역까지 타고 와서야 말에서 내리니 타당치 못하나이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곳을 낮고 누추하게 버려두는 것은 부당하니 계단과 둘레를 쌓고 안바닥을 포장해 한계를 엄중히 하게 하소서”하자 임금은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세종이 월대 건축공사를 ‘불허’했다는 기록이다. 월대 공사가 세종에 의해 불허되고 19일 뒤 광화문이 완공됐다.(1431년 4월 18일 ‘세종실록’)

이후 광화문 월대에 관한 언급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기록에 근거하는 한, 장구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광화문 앞에 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1866년 대원군에 의해 월대가 만들어지고 운용된 57년밖에 없다. 서울시는 소재 불명에다 존재 여부도 불투명한 이 월대를 ‘간악한 일제가 훼손했다’고 복원하겠다고 한다.

2018년 문화재청이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를 통해 만든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종 때 조성된 월대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되며,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과 함께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문화재청, 2018)

 

도대체 월대를 ‘세종 때 조성됐다’고 단정한 근거가 무엇인가. 땅속을 파보지도 않고, 그리고 ‘월대 공사를 불허하고 19일 뒤 광화문이 완성됐다’는 기록을 ‘월대가 존재했다는 추정’의 근거로 삼는 이 황당한 추정은 누가 가르쳐줬는가. 그 땅속에 뭐가 있는지, 있다면 그게 뭔지, 시대는 언제인지 시험발굴을 한 뒤에 복원 여부를 판단하는 게 상식이다.

2018년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광화문 월대가 행사용 무대와 같은 기능으로 개방되었다는 점에서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로 의미가 있다’고 적혀 있다.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록은 또 다르다. 1431년 월대 신축을 불허했던 세종은 9개월 뒤 광화문에 부녀자 출입을 금지했고(1431년 12월 10일 ‘세종실록’) 1545년 인종은 광화문 바깥에서 산대놀이 공연을 ‘금지’시켰다.(1545년 4월 27일 ‘인종실록’) 세종대까지 광화문은 물론 근정전 안쪽까지 부녀자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지만, 이 또한 세종이 금지시켰다.

한마디로 광화문 앞쪽은 금단의 땅이며 백성에게는 위압과 압제의 상징이었다. 이런 공간을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며 복원하겠다는 발상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며 왜곡이고 의도적인 무식이다. 따라서 월대 복원이 ‘왕도정치와 시민주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역사적 가치와 화합·통합의 미래적 가치를 담는 상징적 표현’(2020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9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이라는 문화재청 주장은 왜곡을 넘어 수치스러운 견강부회다.

막대한 예산과 엄중한 시민 교통 불편을 감수할 만큼 월대 공사가 정당하려면 시범 발굴을 통해 월대 존재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진짜 세종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월대를 만들었는지 알아보면 간단하다. 그 시대 월대 흔적이 나왔을 때 공사를 시작하면 된다.

덕수궁 앞에는 역시 스스로 황제가 된 광무제 고종이 만든 대한문 월대 공사가 한창이다. 존재 가치 자체가 모호한 대한제국 허영의 상징 대한문 월대를 ‘복원’이 아니라 ‘보행자를 배려한 축소 재현’으로 공사 중이다. 민속촌인가? 사전 발굴 없이 광화문 월대 복원을 강행한다면 이 덕수궁 월대와 함께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에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 상징이 부활하게 된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